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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포클레스 비극 전집
  • 소포클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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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10-10
  • : 5,045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소포클레스 비극 전집』(천병희 옮김, 숲, 2008, 575쪽 분량)은 그리스 비극의 완성자라고 불리는 소포클레스의 현존 작품을 모두 담은 원전 번역본이다. 아테네가 문화적으로 가장 성숙했던 시기에 배우인 동시에 극작가로 활동했던 소포클레스는 일생동안 123편의 작품을 발표했지만 남아있는 작품은 일곱 편뿐이다. 괴테는 소포클레스 이후 그 어떤 사람도 더 호감 가는 사람은 없다며 몇 편의 작품이 남아있지만, 재능있는 사람이라면 이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의 비극론도 소포클레스의 비극을 중심으로 작성하였다고 하며, 특히 <오이디푸스 왕>을 비극의 모범, 비극의 전형이라고 평가하였다. 그리스 비극은 서양 문학의 원천인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의 시기를 지나, 호메로스를 재해석하면서도 인간에 대한 성찰과 탐구를 가속였다. 그리스 비극은 디오니소스에게 바쳐진 제의에서 점차 무대에서 공연되는 국가적 행사로 자리 잡는다.

 

『소포클레스 비극 전집』은 테베 3부작이라고 불리는 <오이디푸스 왕>, <안티고네>,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를 먼저 배치한다. <오이디푸스 왕>에서 테베의 왕 라이오스에게 내려진 신탁은 라이오스의 죄과가 불러일으켰지만 작품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가혹한 예언을 피하기 위해 라이오스와 이오카스테 부부가 행했던 비밀스런 악행, 우연히 예언을 알고 벗어나고자 집을 떠난 오이디푸스의 결정도 운명을 벗어나게 하지 못했다. ‘이중의 혼인’을 슬퍼했던 ‘이중의 어머니’ 이오카스테는 ‘이중의 문’을 걸어 잠근 채 목숨을 끊는다. 이오카스테는 알려지지 않은 살인자를 찾아내 정화하겠다는 오이디푸스에게 우연의 지배를 받는 인간은 두려워한들 소용이 없다, 그러니 “되는 대로 그날그날 살아가는 것이 상책”(p.68)이라고 만류했으나 막을 수는 없었다.

 

오이디푸스는 충분히 오랫동안 보면서도 알아보지 못한 스스로에게 ‘앞으로는 어둠 속에서 보’라며 두 눈을 찔렀다. 그의 비극은 신에 의해 일어났지만, 이 행위는 운명이 아닌 자신의 의지로 행했음을 분명히 한다. 딸들에게 ‘이 아비는 그때그때 형편에 따라 살아갈 것이나, 너희는 이 아비보다는 나은 삶을 살게 해달라고’(p.89)기도할 것을 청한다. 그날그날 살아가라는 이오카스테의 말을 오이디푸스는 남은 생을 통해 실천하게 된다.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는 명제가 출현한 시기, 이성과 논리로 무장한 오이디푸스는 추리를 시작하고 범인을 찾고자 하나 손쓸 수 없는 비극을 목도하고 만다. 운명에 맞섰으나 실패한 그는 자기 의지로 자신을 벌하고 자신이 말로 내뱉은 판결을 실행한다. 반면 크레온은 ‘나는 마음이 눈멀지 않았’(p.52)다고 주장하는데, <안티고네>와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에서 그의 마음은 제대로 보지 못한다. 보고자 애썼으나 제대로 보지 못한 눈을 스스로 벌하는 오디세우스는 독자에게 연민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그에 반해 ‘모든 것을 보는 시간은 그대도 모르는 사이에 그대를 찾아내’(p.77)고 대가를 취한다. 인간의 의지와 정해진 운명의 격차는 상당하다. 그럼에도 비극은 최선의 선택을 하고 자기가 감당할 몫을 수용하는 인간을 숭고하게 그려낸다. 다음 작품 <안티고네>는 ‘이중의 가격’으로 한날한시에 세상을 떠난 오이디푸스의 두 아들 에테오클레스와 폴뤼네이케스의 장례 문제, 이로 촉발되는 주제를 담는다.

 

<안티고네>에서 하마르티아, 즉 결정적 흠결 또는 비극의 직접 원인은 크레온의 편협한 이성주의라고 볼 수 있다. <오이디푸스 왕>에서 자신은 현명하고 마음이 눈멀지 않았다고 자부했던 크레온이 권력을 가지게 되자 자기의 원칙을 앞세우며 조카인 안티고네, 아들 하이몬, 예언자 테이레시아스, 그리고 아내의 말에도 귀 기울이지 않고 결국 파멸을 부른다. 헤겔은 <안티고네>를 가장 숭고하고 완벽한 최상의 예술작품이라고 평했다. 그는 이 작품을 국가와 이성이라는 ‘인간의 법’과 자연과 감성이라는 ‘신의 법’의 충돌로 보았는데, 전자는 크레온이, 후자는 안티고네가 대표한다. “세상에 무서운 것이 많다 하여도 사람보다 더 무서운 것은 없다네.”(p.108)로 시작하는 코러스의 인상적인 대사는 인간의 위대성과 그로인한 오만을 경고한다. 자매인 안티고네와 이스메네의 입장 차이는 <엘렉트라>의 두 자매와 유사한 면모를 보인다.

 

오이디푸스 왕의 추방은 즉시 이루어지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고 격동하는 감정도 가라앉았을 때 아마도 크레온의 심정 변화로 추방된 오이디푸스 왕 곁에 안티고네가 따른다. 오이디푸스 왕의 신비로운 죽음까지 담고 있는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는 소포클레스가 죽기 직전에 쓴 비극으로 작가 사후에 그와 이름이 같은 손자에 의해 공연되었다.(p.152) 내용적으로는 <오이디푸스 왕>과 <안티고네> 사이에 위치하는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는 마치 작가가 반드시 마무리 짓고 싶은 이야기였던 것처럼 보인다. “그 행위들은 내가 행한 것이라기보다 당한 것이란 말이오.”(p.166)라고 적극 자신을 변호하는 오이디푸스가 인상 깊다. 크레온의 속내를 간파하는 오이디푸스, 특히 그의 저주는 <안티고네>의 결말에서 거의 실현된다.

 

<아이아스>는 소포클레스의 현존 비극들 중 맨 먼저 쓰여진 것으로 추정된다. 죽은 아킬레우스의 무구들이 투표에 의해 오뒷세우스에게 돌아가자 아이아스는 깊은 상처를 입는다. 그 후 일어나는 일련의 비극적 사건에서 아테나 여신의 개입과 오뒷세우스의 역할이 시선을 끈다. 트로이의 전사 헥토르와 아이아스의 선물 교환은 <일리아스> 7권 “헥토르와 아이아스의 대결”에 나오는데, 존중의 의미로 서로 교환했던 헥토르의 칼과 아이아스의 혁대는 훗날 서로의 죽음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아이아스의 결심을 만류하고자 호소하는 테크멧사는 헥토르(트로이의 영웅)를 만류하던 안드로마케를 떠올린다. 헤라클레스의 최후를 그린 희곡 <트라키스 여인들>도 아내 데이아네이라의 하마르티아를 살펴볼 수 있고, 무엇보다 부모를 잃게 된 휠로스의 반항적 대사에 답하는 코러스의 구절, “하지만 그중에 제우스가 아닌 것은 하나도 없어요.”가 의미심장하다.

 

<엘렉트라>는 오레스테스 신화를 다룬 대표작 중 하나다. 10년간의 트로이 전쟁에서 돌아온 그리스군 총사령관이자 미케네의 왕인 아가멤논이 아내 클뤼타임네스트라와 그녀의 정부 아이기스토스에게 살해당한 후, 엘렉트라와 그녀의 남동생 오레스테스가 완성하는 복수를 다룬다. <필록테테스>는 트로이아 전쟁 때 트로이아로 항해하던 중 독사에 물려 무인도 햄노스 섬에 버려졌던 그리스 명궁이다. 작품은 전쟁 승리를 위해서 그가 가지고 있는 헤라클레스의 활이 필요하다는 예언에 따라 버렸던 자를 고향에 데려다 준다고 속여 트로리아로 데려가려는 과정 중의 갈등을 그린다. 오뒷세우스의 지략과 술수가 동원되고 필록테테스는 저항하지만 헤라클레스의 환상적 개입으로 합의하게 된다. 네옵톨레모스가 처음에는 오뒷세우스의 계획에 동의하였으나 결국은 자신의 본성에 따라 행동한다는 변화에 중점을 둔다. 아킬레우스의 아들 네옵톨레모스의 추후 행보는 트로이아 함락 후 헥토르의 남은 가족에게 상당히 잔인하여 놀라움을 안긴다.

 

그리스인들은 연극을 보면서 정화와 부활의 기쁨을 느꼈다고 한다. 제의적 합창 트라고디아에 배우가 추가되면서 연극처럼 변화한 그리스 비극을 보는 관객은 어느 사이 무대 위 배우에 자신을 일치시켰을 것이다. 본의 아니게 불행한 상황에 처한 그들에게 공감하고, 감정을 이입하는 일, 선택을 지켜보며 그 자리에 나를 대입하는 일, 배우의 대사에서, 코러스와 주고받는 대화에서 마음을 울리는 문장을 건져 올리고, 간직하는 일은 자체가 성찰이자 정화였을 것이다. 그리스 비극을 읽으며 현대의 독자 또한 배우들의 목소리와 합창을, 몸짓과 발소리, 절규와 침묵을 듣는다. 분투하는 인물들과 치열하게 논쟁하며 논리를 세우는 이들이 등장한다. 어쩌면 논리 세우기는 상대방을 설득하기 보다는 자신을 먼저 이해시키고 확증하기 위한 것처럼 보인다. 여타의 조건에 시선을 빼앗기다 자칫 중심을 잃을세라 부지런히 목소리를 내는 인물들은 자신이 가진 모든 힘을 끌어 모으고 집중한다.

 

그들이 맞설 대상은 다양하다. 타협할 수 없는 신탁, 이미 정해졌다는 운명, 착오와 착각, 속아 넘어간 어리석음일 수도 있다. 신의 개입은 억울함을 더 부추기나 하소연 할 상대조차 없다. 불의하다, 불공평하다고 외치는 대가를 목숨으로 지불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소포클레스의 현존하는 비극 일곱 편은 일곱 개의 보석처럼 조명에 따라 다른 빛을 낸다. 읽을 때마다 독자의 상황을 반영하여 다르게 읽힐 것이고 다른 문장에 밑줄을 더한다. 아름답거나 확신에 찬, 비유와 상징을 가득 품은, 오래 묵은 명언이나 명제처럼 독자의 마음에 다가오는 구절들이 깊은 울림을 남긴다. 오랜 여운을 안긴다. 저항함으로 극복하고 수용함으로 카타르시스를 전하는 인물들이 퇴색하는 법 없는 질문을 던진다. 숭례문학당에서 함께 읽기를 진행하며 작품별 논제로 한 뼘 깊이 숙고할 수 있어서 감사했다. 빛을 잃지 않는 고전, 그리스 비극 읽기를 추천한다.

 



 책 속에서>


코로스:

끔찍한 일을 저지른 분이여, 어찌 감히 스스로 눈을

멀게 하였나이까? 어떤 신이 그대를 부추겼나이까?

 

오이디푸스:

친구들이여, 아폴론, 아폴론, 바로 그분이시오.

내게 이 쓰라리고 쓰라린 일이 일어나게 한 분은.

하지만 내 이 두 눈은 다른 사람이 아닌

가련한 내가 손수 찔렀소이다. 보아도

즐거운 것은 아무것도 보지 못할진대,

무엇 때문에 보고 있어야 한단 말이오!(1327-1335/p.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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