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mazinga님의 서재
  •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
  • 윌리엄 포크너
  • 9,900원 (10%550)
  • 2003-07-15
  • : 4,836

막막하고 참담한 이야기, 무력하고 비통한 이야기 틈에 종종 어처구니없는 실소가 새어 나온다. 한 가족의 희비극은 블랙 유머를 품은채 단지 소설일 뿐일까, 그들만의 삶일까 독자에게 묻는다. 그들은 목적지까지 순조롭게 이동하지 못한다. 대신 함정에 빠지고 난관에 봉착하다가 결국 부조리하게 끝난다. 장례 행진은 도착 지점이 정해졌으나 소설 결말 이후에 펼쳐질 귀로 역시 인물 개별로 보았을 때 동일한 행진의 연장선이다. 뫼비우스 띠처럼 이어지는 길은 끝나지 않는다. 이 길은 소설 밖으로 연결되어 독자 앞에 놓인다. 당신들은 좀 나은지 질문한다.

 

윌리엄 포크너의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김명주 옮김, 민음사, 2003, 1930, 316쪽 분량)는 열다섯 명의 화자가 번갈아 등장하며 보고 생각하고 느낀 것, 간파한 것과 감춘 것에 대해 증언한다. 윌리엄 포크너는 1926년 첫 소설을 발표한 이후, 『소리와 분노』(1929) 다음 해에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1930)를 발표하였다. 『압살롬, 압살롬!』은 1936년에 출간한다. 미국 모더니즘 문학의 선구자로서 혁신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한 포크너는 “현대 미국 문학에 강력하고 예술적으로 비할 바 없는 기여를 했다”는 평과 함께 노벨 문학상(1949)을 수상했다.

 

허구의 남부 지역인 요크나파토파를 배경으로 ‘문학적 우주’를 창조했던 작가는 『소리와 분노』에 이어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에서도 남부 한 가족의 행보를 추적한다. 이번에는 몰락한 귀족이 아닌 가난한 농부의 집이다. 전작 『소리와 분노』는 콤슨가 4남매 중 세 명이 일인칭 시점의 화자로 작품을 이끌고, 마지막 장은 사남매를 키운 흑인 하녀의 목소리를 빌어 작가의 전지적 시점으로 서술하며 네 개 장으로 이루어졌다. 이와 비교해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는 앤스 번드런과 그의 아내 애디, 네 명의 아들 (캐시, 주얼, 달과 바더만), 고명딸 듀이 델이 주 화자가 되어 일인칭 시점으로 진술한다. 그밖에 다른 인물들도 등장하기에 교차하여 서술할 때의 회전율이 높다. 독자는 인물별 목소리를 연결하면서 59장으로 나름의 지도를 그려간다.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의 ‘나’는 아내이자 어머니인 애디 번드런이다. 그리고 ‘나’의 위치에 등장인물들이 들어가 각자 ‘어머니의 관을 만들 때’(캐시), ‘자기의 말을 돌볼 때’(주얼)처럼 서술어를 교체하며 에피소드를 남기고 전체적인 그림으로 완성해간다.

 

“에디 번드런은 더 이상 바랄 게 없겠지. 죽어 누워 있기에 캐시의 관보다 더 좋은 것은 없을 것이다.”(p.9) 첫 번째 화자인 달은 두 페이지를 할애해 주얼과 캐시의 인상, 어머니를 언급한다. 이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어머니가 죽어 누워 있기에, 캐시의 관보다, 라니. 태연하게 반복되는 일상은 왜곡되고 일그러져 있지만, 그들에게는 이상할 게 없다. 바로잡을 방법을 알 수 없고 그럴만한 에너지도 의지도 없다. 문제라는 인식 자체가 부재하다. 이와 같은 일상이 누운 채 죽어가는 어머니 눈앞에서 벌어진다. 이웃은 번드런네 가족을 돕고자 하면서 시시콜콜 품평도 빠뜨리지 않는다. 목화를 따고 농사를 돕는 건 정작 다른 사람들이고 주얼은 무심하고, 캐시는 관에 못을 박을 뿐이다. 아버지는 아이들을 시키고 비난하며, 달 역시 일하지 않는다. 고민을 간직한 듀이 델은 달에게 비밀을 들키자 그를 증오하고, 그녀는 달이 방화 사건을 일으키는 소설 후반에 난폭하게 적개심을 드러낸다. 달은 결국 잭슨으로 가게 된다. 잭슨, 『소리와 분노』에서 벤지를 위협하는 수단이었으나 마지막까지 가지 않았던 그 정신 병원에 달은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결박된다. 달에게는 벤지에게 있었던 캐디나 딜지가 없어서였을까.

 

『소리와 분노』의 콤슨 부부가 기본적인 부모의 역할을 하지 못했던 것처럼 번드런 부부 또한 마찬가지다. 가장인 앤스는 철저히 자기중심적 인물이고 이를 숨기지도 않는다. 그의 우주는 자신을 기준으로 돌아간다. 땀을 흘리면 죽는다는 경고를 지키느라 수고하는 법이 없고 자기 욕구 충족에 철저한 아버지다. 애디의 경우 59장을 통틀어 단 한 번 속내를 밝히지만, 그녀가 간직한 생의 비밀은 결코 사소하지 않다. 아내이자 어머니라는 나름의 역할 수행도 나름의 복수를 감추고 있으며 복수의 이론적 근거 또한 명백하다. 소설에서 가장 시선을 집중시키는 장이고 질문을 던지고 사유를 촉발하는 부분이다. 그녀는 말한다. ‘말’은, 모성이나 공포, 자존심이란 단어는 “그저 빈 곳을 메우기 위한 형태일 뿐”(p.194)이라고. 쓸모없는 말에 속은 보복으로 ‘보복하고 있다는 사실을 숨기기’로 한 애디는 ‘내가 죽으면 제퍼슨에 묻겠다고 약속해 달라’고 요구한다. 이웃 코라는 그녀가 번드런 가족과 함께 묻히는 것이 싫어서 40마일이나 떨어진 먼 땅에 묻으라고 주문할 만큼 유난스럽다고 평한다. 장례 행진은 그렇게 시작된다.

 

번드런 가족은 죽은 어머니를 매장하기 위해 무더운 여름날 마차에 관을 싣고 집을 나선다. 요크나파토파에서 제퍼슨까지 40마일 거리는 반나절이나 하루면 도달할 수 있는데도 열흘이 걸린다. 열흘간 가족들은 홍수나 화재를 겪으면서 물과 불에 맞서고, 가축을 잃고, 다친 다리를 또 다치고, 악취에 시달리고, 필요와 욕망을 담금질하며 애도와는 정작 멀어진다. 하루에 도착할 40마일을 열흘 동안 가는 여정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불순종의 결과 40년간 치렀던 광야 생활의 축약으로도 읽힌다. 소설의 결말은 잠시 멈추게 할 만큼 아이러니하고 희극적이다. 이들의 문제는 무엇이었을까. 번드런 일가는 짧게 목소리를 내고 바통을 넘기는 소설의 형식처럼 서로의 마음을 읽을 시간이 부족하다. 눈을 맞추고 경청할 때 가능한 온전한 소통이 결핍되어 있다. 그들이 각자의 이야기를 할 때 청자는 멀리 있거나 듣지 않는다. 자기 이야기만 하는 사태의 반복은 동일한 목적지를 향해 함께 이동할지라도 서로를 소외시킨다. 작가는 터무니없을 만큼 고된 여정에 위트와 익살을 덧붙이면 독자는 잠시 숨을 돌린다.

 

소설은 볼드체, 도형, 공백 등을 활용해 함의를 추측하게 하고, 인물의 개성을 살려 문체에 변화를 준다. 아름답고 시적인 풍광 묘사, 개념을 파고들며 주장하고, 새롭게 정의 내리는 문장은 독자를 매료시킨다. 전작인 『소리과 분노』의 흔적을 발견하는 즐거움도 크다. 길과 집, 시간, 언어, 존재에 대한 성찰이 독자를 머물게 한다. 소설가 랠프 엘리슨은 고전의 위대함이 포크너가 인간 본성을 탐색했듯이 도덕적인 목표를 꾸준하게 추구하는데 있다며 ‘그래서 우리는 포크너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을 남겼다. 포크너가 철저한 기획과 실험 끝에 완성했다는 이 작품은 어느 길 모퉁이나 석양빛 아래, 여전히 발견되기를 기다리는 보물을 감추고 있을지 모른다. 반복해서 읽어야 하는 작가 포크너는 이번에도 독자를 쉽게 떠나보내지 않는다.

 

 

 

 책 속에서>


말과 행위가 맞아떨어지지 않을 때 사람들 사이에는 틈이 생긴다. 늘 그렇듯이 무서운 밤, 거친 어둠으로부터 들리는 거위의 울음소리처럼 언어는 떨어져 내린다. 누군가 군중 속의 두 얼굴 가리키며, 너의 엄마다 혹은 아빠다 말할 때, 정신없이 그 얼굴을 찾아 헤매는 고아처럼, 말은 그것이 가리키는 행위를 찾아 헤맨다.(p.197)

 

가끔씩 난 확신할 수가 없다. 누가 미쳤고 누가 정상인지 알게 뭐란 말인가. 어느 누구도 완전히 미치거나 완전히 정상일 수는 없을 거다. 마음의 균형이 제대로 잡히는 것이 쉽진 않으니까. 중요한 것은 사람이 어떻게 행동하느냐가 아니라,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의 행동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다.(p.263)








  • 댓글쓰기
  • 좋아요
  • 공유하기
  • 찜하기
로그인 l PC버전 l 전체 메뉴 l 나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