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여년 전 한 대학 연구팀은 긍정의 말을 들려준 식물이 더 잘 자랐다는 결과를 보고했다. 반려식물을 키우며 정서적으로 교감하는 이들도 주변에 만날 수 있다. 수동적인 대상에 머무는걸 넘어 만일 식물이 적극적 기록자라면 어떨까. 기록을 저장하고 전달하고 소통의 매개가 되며 개인을 넘어 종족의 명멸을 지켜보고 지켜내는 증인이라면. 황모과의 『그린 레터(다산책방, 2024, 268쪽 분량)』 는 민족의 굴곡진 역사 틈바구니에서 개인이 감당한 아프고 아름다운 여정을 섬세하게 담는다.
“그저 소박하고 행복하게 살기만을 꿈꿨는데, 삶은 각오보다 훨씬 많은 일을 제게 짐 지웠습니다. 모두에게 그랬듯이요.”(P.44) 프룬의 말이다. 소설은 여섯 개 장에서 네 명의 화자가 그들이 살아낸 시간을 복기한다. 프룬과 로밀야는 같은 쿠진족이라 같은 언어와 문화를 지녔다. 둘은 처음 만나는 순간부터 운명처럼 이끌린다. 마을의 청혼 방식대로 비티스디아 뜰을 가꾸고 잎사귀를 건넨 푸룬은 함께할 시간을 꿈꾸면서 서로의 다름도 존중한다.
그러던 어느 날. 그들 사이에 철조망이 생긴다. 조금만 기다리기로 한 사이에 철조망은 철벽이 되고 나란히 걷던 돌담은 국경이 된다. 프룬은 키운 사람의 성정을 그대로 드러내는 식물의 잎을 골라내어 잎사귀 앨범, 엽첩을 만든다. 그가 미래를 기대하며 반복했던 노동은 한낱 착취의 도구였음도 너무 늦게 깨닫는다. 1장, 푸룬의 이야기를 채우는 세 번째 엽첩은 삼십 년 후, 평생을 그리워한 아내 로밀야에게 건네는 작별인사다.
연구원인 이륀은 푸룬의 증손녀다. 그녀는 얼음산국에서 쿠진족을 미개하다 간주하기에 자신이 사 분의 일 쿠진임도 감추고 있다. 그녀는 업무 외 자기 시간을 할애해서 증조할아버지가 소중히 가꾼 식물을 연구한다. 전 세계에 단 1속 1종뿐인 희귀식물 비티스디아다. 잎사귀가 실재로 메시지를 드러낼지 궁금하지만 완벽하게 추론할 수 없는 영역은 쉽게 해답을 주지 않는다. 이때 도착한 메일은 쿠진족 발루의 해독키였다. 발루의 선조 할머니 이야기가 시작된다. 로밀야의 이야기다. 로밀야는 잎에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버텨 온 삶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한 인간의 오랜 싸움을”(p.102) 기록한다.
소설은 꼭 맞물리는 서사를 구축함으로 안타까움을 더한다. 정교하게 어긋나는 운명이 아련하게 다가온다. 구조적 폭거 앞에 인간의 무력함과 그럼에도의 역설을 보여준다. 실리를 앞세운 이들은 자원을 빼앗고, 경제를 침탈하고, 영토를 나누고, 왕래와 소통을 금한다. 주인은 한 순간에 종이 되고 언어와 문화를 금지당하고 혈통은 조롱당한다. “얼음산국이 주도한 광산 사업과 테러리스트 소탕 작전, 밀림국이 집행한 쿠진족 강제 불임 시술 등 민족말살정책, 그리고 열도국의 종교적 원리주의가 초래한 제노사이드 등, 세 강대국이 애써 감추고 싶은 이야기로만 남았다. 감춰진 이야기 속에서 쿠진이란 이름은 사라져 갔다.”(p.75)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계속되고 있는 폭압을 소설은 고발한다. 로밀야의 흔적을 추적하다 도달한 밑동 마을의 폐허, 그곳 남은 자의 증언과 주민의 삼 분의 이가 묻힌 자리는 우리 역사의 냉혹한 지점들도 겹쳐보였다.
푸룬도 로밀야도 생 전체를 건 사랑을 대전제로 삼고 운명에 맞선다. 동시에 곁에 있는 이들을 외면하지 않는다. 자신의 고통만을 외치지 않았다. 로밀야는 난민인 엘하디 언니를 다정히 대했고, 푸룬은 파윈과 아이린을 곁에 허락했다. 이 역시 사랑이고 환대였다. 최선의 표식이었다. 소설은 가상의 시간과 공간으로 독자를 데려가지만 기시감 짙은 역사의 굴곡을 선연하게 묘사한다. 사 대에 걸친 사랑의 연대기는 오대까지 이어지며 여전히 생동하는 이들처럼 기리고 호명한다. 화자가 쓴 편지, 잎에 남긴 메시지(잎이 새기고 있는 메시지), 엽첩과 별지 등 필사적인 기록의 의지, 소통의 희망이 숭고하게 여겨지고 끝내 결실을 맺는다.
현실에 뿌리내린 SF를 선보이는 황모과는 말과 국가를 잃은 이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일본에 거주하는 작가는 “언어의 세계, 좁게는 한국어, 그중에서도 활자의 세계”(p.262)가 모국이라고 밝힌다. 소설을 재독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감정이 요동하는 작품이다. 그토록 순전한 사랑이 완벽하게 어긋나버리는 운명 때문에 독자가 앞서서 억울하다. 무언가 조치를 취하고 싶으나 속수무책이다. 이처럼 무너지는 심정들이 도처에 얼마나 많을지 체감하게 만든다. 현재 진행중인 비극을 생각한다. 얼마나 많은 연인들이 어머니가 아버지가 눈물 흘리고 있을지를 소설은 일깨운다. 가상과 현실의 절묘한 결합, 악하고 어리석은 시스템에 부속으로 기능하는 무감각에 대한 비판도 날카롭지만 면면히 흐르는 사랑은 작품 전체를 애틋함으로 채운다. 완전한 끝이나 소멸은 없다. 소설은 희망을 품는다. 경고하지만 동시에 낙관하는 책의 일독을 권한다.
책 속에서>
세계 곳곳에 공존과 소통을 상징하는 푸른 정원이 생겨났다. 비티스디아는 어떤 땅에서든 살아남았다. 단, 한 가지 조건이 필요했다. 반드시 식물과 교감하는 사람이 필요했다. 비티스티아는 강인한 식물이지만 소통할 수 있는 반려인을 만나지 못하면 속절없이 말라 버렸다. 씨앗을 심은 모두가 푸른 기적을 만난 건 아니었다. 의심하는 사람, 독특한 교감 방법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사람, 공감 능력이 없는 사람 앞에서 식물은 자신의 경이로운 힘을 발휘하지 않았다.(p.234)
아무리 우겨도, 사소하고 당연한 일들이 자신의 삶에서는 도무지 일어나지 않았다. 영원과도 같은 아득함을 견뎌야 했다. 뻥 뚫린 가슴으로 바람이 들어왔다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뒤늦게 아쉬워해 봐야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푸룬은 자신의 삶을, 로밀야의 삶을, 파윈과 아이린의 삶을 생각했다. 그러고는 남이 알아보지 못할 만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삶도 있다.’(p.2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