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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zinga님의 서재
  • 한강
  • 13,050원 (10%720)
  • 2018-04-25
  • : 330,913

한강의 『흰(문학동네, 2018, 196면 분량)』은 흰 것들의 목록으로 시작한다. 작가가 흰 것에 대해 쓰겠다고 결심하고 처음 한 일은 목록작성이었다. 목록은 ‘강보’부터 ‘수의’까지 열다섯 가지이고 이들은 열병식을 치르듯 종으로 정렬한다. 태어나 몸에 감싸는 강보와 죽은 몸으로 입는 마지막 옷 수의 사이에 놓인 흰 것들은 고유한 묵직함으로 간격을 두고 선다. 둘 사이에 놓여 마땅한 즐거움과 괴로움, 보잘것없음과 벅참을 강보가 곧 관이었던 아기는 아무런 잘못 없이 누리지 못했다. 아무런 잘못 없는 느닷없는 죽음들은 이 도시와 저 도시에, 그때와 지금, 빛의 속도로 변하는 세상에서 한 치의 변화 없이 반복되고 있다. 목록을 보면 독자는 물들듯 나만의 흰 것을 헤아리게 된다. 투명에 가까운 흰과 재색에 가까운 흰도 있을 테고, 만져지는, 향기가 나는, 온기 또는 차가움을 전하는 흰 등, 각각 꼽은 흰이 그 사람만의 세계를 축조할 것이다.

 

작가가 구축한 세계는 3개 장으로 이루어진다. 1장인 ‘나’에서 목록부터 시작하였으나 단어가 문장이 되는 일의 의미는 확신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날카로운 시간의 모서리에서 ‘우리는 앞으로 나아간다’(p.11)고 선언한다. 달리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어머니로부터 태어나 두 시간 만에 죽었던 언니의 이야기를 듣고 자란 작가는 <배내옷>에서 이야기를 영원의 자리로 옮긴다. 글로 생명을 덧입은 아기언니는 2장 '그녀‘에서 작가의 감각을 빌려 육화한다. 도시와 인간의 세상을 경험하는 언니는 낯설고 온통 일회성인, 그러나 잊거나 빼앗기지 않을 삶을 산다. 소설에서 가장 많은 분량과 목록을 차지하는 2장에서 그만큼 마음은 기울고 흘러 고인다.

 

3장 ‘모든 흰’은 가장 짧은 열한 개 목록으로 구성한다. 의지를 세우고 다시 책 밖 삶으로 걸어나서는 뒷모습 같다. 3장에서 독립된 목록 제목으로 ‘언니’를 처음 호명한다. “언니가 있었다면, 생각하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p.122) 하며 문을 여는 한 편은 불가능한 자매의 일상을 꿈처럼 살아본다. 마지막 두 편은 “작별”과 “모든 흰”이다. 최선의 작별의 말은 “죽지 말아요. 살아가요.”(p.133)라고, 말을 모르던 언니에게, 당신에게, 스러지던 무명의 모두에게 눌러쓰고, 책의 마지막 문장을 “그 흰, 모든 흰 것들 속에서 당신이 마지막으로 내쉰 숨을 들이마실 것이다.”(p.135)라고 맺는다. 나에게서 그녀에게로 다시 모든 이, 지금도 스러지고 있는 그들에게 하는 결연한 약속이다. 개인의 아픔에서 멈추지 않고 기꺼이 연대한다는 의지로 읽힌다.

 

책은 흰색 간지와 여백을 넉넉하게 품고 흑백 이미지를 가끔씩 보태며 책이라는 물성까지 하나의 주제를 위해 힘쓴다. 텍스트와 이미지와 구성이 목적을 향해 오롯이 복무하는 듯하다. 각각의 목록 아래 한 면부터 길게는 네 면 분량의 글을 담고 있는데, 한 편씩 떼어내도 그 자체로 시 같고, 지나온 페이지를 불러내 깊이를 한 뼘씩 더해가기도 한다. 독립적이면서도 밀착하고 있는 서사는 종이라는 평면에 기록되었으나 입체로 돋아난다. 과거와 현재, 이곳과 저곳(한국과 폴란드), 이미 죽은 이들과 살아남은 자들, 살아있으나 죽어가는 이들, 영혼과 실존이 혼재하고 서로를 응시한다. 떨어진 장소에서 유사한 아픔을 목도하면서 파괴된 두 도시, 두 곳에서 얼마나 다른 방식의 애도가 이루어졌나, 아니 그 자체가 없었던가 병치하는 <넋>(p.108~109)은 가장 인상 깊은 부분 중 하나다.

 

개정판에서 작가는 “모국어에서 흰색을 말할 때, ‘하얀’과 ‘흰’이라는 두 형용사가 있다. 솜사탕처럼 깨끗하기만 한 ‘하얀’과 달리 ‘흰’에는 삶과 죽음이 소슬하게 함께 배어 있다. 내가 쓰고 싶은 것은 ‘흰’ 책이었다.”(p.186)라는 말을 추가했다. 책 전체가 작가의 말이라고 했던 초판 발행 당시와는 달리 귀중한 힌트가 보태졌다. 인간은 보편적으로 화사하고 돋보이는 하얀에 대해 말하고 싶을 것이다. 아마 더 수월할지 모른다. 그럼에도 기억하고 기념하겠다는 의지를 벼려서 흰을 호명하는 일은 아프지만 아름답게 느껴졌다. 고통을 감수하더라도 ‘흰’의 편에 서겠다는 작가의 의지가 숭고하다. 내밀한 목소리가 알알이 박힌, 고요하지만 추동하는, 차분하지만 여운 깊은 소설 <흰>을 추천한다. 계속 읽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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