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감정의 동물이라고 하는데 감정의 양면성을 인지하고 최대한 조절하려는 시도는 일종의 과업이기도 하다. 감정을 읽고 지지하는 자기 돌봄은 필요하나 휘둘리는 일은 지양한다. 충동은 대부분 후회를 부르고 자기점검을 강화한다. 또 그랬니, 왜 그랬니, 그러지 말자, 할 수 있어로 이어지는 순환은 자전하듯 멈추지 않으나, 그럼에도 과잉 감정은 조금씩 순화되고 점점 더 나아지리라는 기대를 남긴다. 환경과 교육의 중재가 모두에게 허락된 조건은 아니지만, 충족될 경우 원초적 감정은 다른 길을 낼 것이다. 감정의 순기능에 의지하여 나와 타인을 돕거나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아름답고 필요한 매듭을 늘려가는 일은 중요하다. 여기 감정을 극단으로 내달리도록 풀어버린 이들이 있다. 어떤 고삐는 최대한 손에 쥐고 당길 때와 놓을 때를 조절해야 하지만 그들은 고삐 자체를 제거했고 끝없이 달리다가 추락하는 순간 공멸한다. 『테레즈 라캥』의 테레즈와 루앙이 그렇다.
에밀 졸라의 『테레즈 라캥(박이문 옮김, 문학동네, 2009, 1867, 360면 분량)』은 경계를 넘은 사고와 행동에 자신을 맡기는 새로운 인물, 새로운 전형을 소개한다. 과격하고 한편 무례해 보일만큼 생생한 작품은 당시 문단에서 환영보다는 공격의 대상이 되어 졸라는 직접 작품을 변호한다. 바보들아, 라고 쓰지는 않았으나 톤은 자못 격렬하다. 그는 자신이 나서서 “나의 판단자들에게” 작품을 소개한다며 “모든 것이 오해될지도 모를 미래를 피하기 위하여.”라고 말한다. 졸라는 사람의 성격이 아니라 기질을 연구하기 원하고, 자유의지를 박탈당하고 “신경과 피에 극단적으로 지배받는 인물들”(p.10)을 선택했음을 밝힌다. 소설은 실험 무대가 되고 등장 인물들은 부여받은 역할, 캐릭터 안에 세팅된 인자의 보이지 않는 융합에 의해 작동한다. 인물간 관계에서도 기전은 동일하게 움직인다.
에밀 졸라는 프랑스 자연주의 문학의 대표 작가로 출판사와 기자 생활을 거쳐 소설을 쓰기 시작하였다. 자연주의는 플로베르의 사실주의 문학이론을 발전시킨 사조이며 둘 다 객관성과 과학성을 강조한다. 『테레즈 라캥(1867)』은 졸라가 제시한 구체적인 첫 번째 예가 된다. 이후 1871년부터 1893년까지 약 이십여 년간 두 집안의 후손을 중심으로 제2 제정기의 프랑스 사회를 묘사한 20권짜리 소설이자 졸라 문학의 핵심인 <루공마카르> 총서를 출간한다. 졸라는 문학의 기본적 기능이 오락이나 개인 감정의 정서적 표현에 있지 않고 인간에 관한 객관적 진리 발견에 있다는 신념(p.357)을 작품을 통해 드러내고 여전히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미술 평론을 쓰며 인상파 화가들을 후원하고 관계를 맺었으며, 특히 오랜 벗이었던 세잔과의 우정과 결별도 회자되고 있다.
소설은 작품의 주요 배경인 퐁네프 파사주를 렌즈로 촬영하듯 묘사하며 시작한다. 베르농의 오래된 잡화상이었던 라캥 부인은 병약해서 더 애지중지해온 아들 카미유와 부모를 잃은 조카 테레즈와 살고 있다. 라캥 부인의 의지대로 함께 자라온 사촌간인 카미유와 테레즈는 결혼한 후 카미유의 요청대로 거처를 파리로 옮긴다. 퐁네프 파사주에 상점을 소개받은 라캥 부인은 이곳을 새로운 정착지로 삼는데 테레즈는 상점에 처음 들어서는 순간을 “마치 땅 밑에 있는 기름투성이 시궁창 속으로 내려가는 것 같았다.”39고 표현한다. 애초에 무섭고 더럽고 적막했던 공간은 놀라운 사건을 축적하며 인간에 의해 얼마나 더 무섭고 잔인한 광기의 무대가 될 수 있는지 속도감 있게 그려보인다.
라캥 부인의 집에서 매주 목요일 저녁 열리는 모임은 비극적인 상황 중에도 중단되는 일이라곤 없다. 부인의 오랜 친구인 미쇼와 경찰서 주임 경관인 그녀의 아들 올리비에 부부, 오를레앙 철도국의 서기 그리베가 멤버인데 각자의 이기심은 모임을 해체시키지 않는 주요 동기다. 도미노 게임을 하는 그들은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는 진실의 연쇄 반응에는 눈감고 있다. 자신들의 쾌락과 무관하기 때문이다. 어느날 이 모임에 새로 들어온 인물이 로랑이다. 카미유는 어린 시절 친구였던 로랑을 이십 년 만에 만나서 초대하였고 카미유와 거의 극단에 있는 인물의 등장은 가면을 쓰고 현재를 견디고 있는 테레즈에게 운명으로 다가온다. 테레즈와 로랑은 서로의 욕망과 기질을 알아보고 이중생활을 이어가나 만남이 차단당하자 다른 돌파구를 찾는다. 카미유를 제거함으로 그 자리를 차지하겠다는 생각이 들자 그들은 지체하지 않는다.
소설은 카미유 살해 이후 테레즈와 로랑의 변화에 초점을 맞춘다. “그들은 너무도 원하는 바람에 살인까지 하게 만든 이 자유로운 사랑의 생활을 아주 쉽사리 시작할 수도 있었으리라.”(p.152)하고 예축하였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테레즈는 ‘피와 신경’(p.155)으로만 사랑을 느껴왔으나 소설을 읽으며 ‘머리’로 사랑을 느끼기 시작한다. 그러나 다른 세계에 편입될 가능성은 그저 활자와 행간으로 멀리 있다. 로랑도 열정이 식어가나 들인 수고를 생각하여 ‘피와 공포’로 맺어진 둘의 관계를 상기한다. 둘은 서로에게 속해 있고 이를 완성하기 위하여 결혼을 공모한다. 진정한 징계는 부부가 된 날부터 시작된다.
작가는 테레즈와 로랑의 공포를 손에 잡힐 듯이 그린다. 연거푸 일어나는 몽상이 잠과 꿈을 침범하고 이러한 몽상은 로랑의 목에 남은 상처로, 그가 그린 초상화들로 다시 옥죈다. 작가는 “상이한 두 기질 사이에서 발생할 수 있는 기이한 연합을 설명”(p.11)하려는 시도로 집필했다고 밝혔듯이 작품 안에서 직접 목소리를 낸다. “두 사람은 피와 육욕으로 이루어진 관계였다.(중략) 이때부터 그들은 기쁨과 고통에 소용되는 단 하나의 육체와 단 하나의 영혼만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공통성, 즉 상호 침투는 심리적이고 생리적인 현상으로서 심한 신경증적 충격이 서로 맹렬하게 충돌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흔히 있는 것이다.”(p.176) 작가는 두 인물이 서로를 공격의 대상으로 삼는데 까지 밀어붙이는데 이미 다른 결말은 가능하지 않을듯하다.
소설은 자기 욕망에 충실한 인물들을 통해 감정의 다양한 결을 보여준다. 이기심은 진실을 보지 못하도록 눈을 가린다. 목요 모임의 구성원들이 자신의 작은 이득에만 몰두했듯이, 라캥 부인은 카미유의 안전을 위해 테레즈의 희생을 요구했고, 테레즈와 로랑은 라캥 부인을 공포의 방패로 삼았다. 독립된 에피소드로 읽을수도 있는 시체공시장 장면은 특히 인상 깊다. 작가는 타인의 고통이 전시되고 있는 놀라운 공간을 보여준다. 빈부와 무관하게 “무상으로 구경할 수 있는 곳”은 언제나 열려있다. 노동자들부터 익살꾼들, 연금생활자들, 여자들, 여자들 중에서 어떠어떠한 부류를 작가는 “갖가지 사람들”로 열거하고 반응을 기록한다. 예리한 관찰자의 눈으로 인간의 어두운 진면목을 조명함으로 고발하고 있다. 간결한 문체로 내밀한 심리를 집중적으로 조명하는 소설은 제동장치 없이 더욱 가속한다.
“나는 졸라를 향한 존경과 가없는 찬사에 사무쳐 있다. 군인과 성직자 같은 겁쟁이 위선자 아첨꾼들은 한 해에도 백만 명씩 태어난다. 그러나 잔 다르크나 졸라 같은 인물이 태어나는 데는 5세기가 걸린다.”고 마크 트웨인은 평했다. 비판의 중심에 놓였던 『테레즈 라캥(1867)』이 출간되고 4년 후부터 졸라의 기념비적 대작 <루공마카르> 총서가 나오기 시작한다. 자연주의 문학의 발명이자 완성이 백 년도 전에 이루어진다. 졸라는 문학사에 선명한 인장을 남긴다. 욕망으로 타오른 채 멈추지 못했던 인물들의 비참한 아우성은 영화로 그림으로 다양한 예술로 재현되고 있다. 과장되고 자극적인 서사가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펼쳐질 때 독자는 인간 극장의 한 가운데에 서게 된다. 졸라 문학의 진입서로 적절한 『테레즈 라캥』을 추천한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 <박쥐>를 비교해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책 속에서>
-시체공시장은 가난한 사람이거나 부자거나 누구든, 행인들이 무상으로 구경할 수 있는 곳이었다. 문은 열려 있어 원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들어왔다. 죽은 사람을 진열해놓은 이 광경을 놓치지 않으려고 일부러 먼길을 우회하는 괴상한 성벽의 사람들도 있었다. 포석이 비어 있을 때면 그들은 실망하고 중얼거리면서 급히 밖으로 나왔다. 포석이 꽉 차서 인간의 살덩이를 제대로 진열하고 있으면, 구경꾼들은 급히 달려와 값싼 감동을 느꼈다. 마치 극장에서 하듯이 농담하고 갈채를 보내고 휘파람을 불고는 오늘 시체공시장은 괜찮았다고 말하면서 만족하며 물러갔다.(p.138)
그녀는 소설을 읽었다. 그리고 그 젊은이를 로랑과 비교해보니, 로랑이 대단히 살찌고 둔하게 생각되었다. 독서는 그녀에게 여태까지 몰랐던 낭만적인 지평을 열어주었다. 그녀는 피와 신경으로만 사랑을 느껴왔었다. 그런데 이제 머리로 사랑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 날 그 학생은 사라졌다. 하숙집을 옮긴 모양이었다. 테레즈는 금세 그를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녀는 회원제 대출 도서관에 가입하고 소설의 모든 주인공들에게 열중했다. 이 갑작스러운 독서열은 그녀의 기질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녀는 예민한 감수성을 갖게 되어 공연히 웃고 울곤 하였다. 그녀의 마음속에 생기려 했던 균형이 깨진 것이다. 그년는 일종의 막연한 몽상에 빠졌다.(p.155~1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