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덮으며 ‘추스르다’라는 낱말을 찾아본다. 몸을 가누어 움직이거나, 물건을 추어올려 잘 다루거나, 산만한 정신이나 마음 따위를 바로잡아 안정시키는 걸 말한다. 한 가지 더, 일을 수습하여 처리하는 것도 뜻한다. 『바깥은 여름』의 인물들은 추스르는 일이 만만하지 않은 상태에 직면한다. 몸이나 물건 따위, 마음이나 일도 왜 추슬러야 하나, 꼭 그래야 하나 아득하다.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어떻게 가능할지 방법을 알지 못한다. 밖은 여름이어도 그들이 서있는 공간은 계절의 영향에서 벗어나고 자연법칙을 어긴 채 얼음 어는 성이 된다. 녹지 않는 얼음성이다.
김애란의 단편소설집 『바깥은 여름(문학동네, 2017, 272면 분량)』은 온기나 발광채, 유일한 해를 잃어버린 서늘함을 체감케 한다. 바깥은 자신의 외부이기에 그곳에 속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외면하거나 상상하거나 잊기를 결심할 수 있으나 훼손 이전으로 회복하지 못한 채 타자로 남고 만다. 겪어낸 시간은 저만치 뚝 떨어진 과거에 있으면서 동시에 영원 같은 현재가 된다. “오래전 소설을 마쳤는데도 가끔은 이들이 여전히 갈 곳 모르는 얼굴로 어딘가를 돌아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작가의 말처럼 그들이 그렇게 있는듯하다.
<입동>에서 아이를 잃은 부부는 ‘세상이 우리만 빼고 자전하는 듯’(p.21)이 보인다. 애써 마련한 우리집에서 안도와 감사의 시간은 찰나고 고통의 시간은 무한에 이른다. 내부에서 고통은 모든 것인 사랑의 상실로, 외부에서는 판단하고 돌을 던지는 차가운 손에 의해 이중으로 옥죄어 온다. <노찬성과 에반>에서 열 살 찬성은 사고로 아버지를 잃는다. 동생같이 아끼던 유기견 에반이 아프면서 모든 게 그대로인데 다른 세상에 온 기분을, 떠나보낼 결심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말인 ‘용서’를 혼자 감당한다. <건너편>의 도화는 연인 이수와 얼추 개수명과 비슷한 십 년을 함께했지만 역시 떠나보낼 결심을 내린다. 그녀에게는 신뢰하는 말이 있어서, 왜곡 없는 문장을 구성할 수 있어서 다행이랄 수 있을까.
<침묵이 미래>는 역대 최연소 수상으로 화제를 모은 이상문학상 수상작이다. 영(靈)이고 말(言)이며 침묵의 무게는 정체성 난해한 정체인 ‘나’로 의인화하여 마지막 화자를 설명한다. 사라져가는 언어를 보존하는 소수언어박물관이 마지막 화자들의 거처다. ‘쩌렁쩌렁한 모어 한복판에’(p.127) 버려진 그들은 눈물날 것 같이 친근한 모국어를 그리워하지만 마지막 화자이기에 소통은 불가능하다. 그저 소통할 대상이 없기에 있어도 소용없는 말들의 소용돌이에 갇힌 형국이다. 나의 순례는 끝이 없고 막막하다. 첫 번째 이름 ‘오해’에서 필요에 의해 ‘이해’로 변화하나 점점 거대해져 죽음을 맞는 허무 또는 장관은 생명의 순환과 견주게 된다.
<풍경의 쓸모>에 나오는 “볼 안에선 하얀 눈이 흩날리는데, 구 바깥은 온통 여름일 누군가의 시차를 상상했다.”(p.182)라는 문장에서 책의 제목을 만난다. 다른 궤도에 존재하는 시공간은 다른 풍경을 보여준다. 엇갈려 있기에 스치거나 만날 수 없겠고 풍경은 과거에 촬영된 화면으로 미래 어느 시점에야 확인된다. 정우는 ‘프로’ 부모의 역할에 충실했던 어머니를 보았다. ‘프로’ 강사에 가까워지던 자신, 그러나 ‘프로’ 성인이 된 후에도 거짓 서명에는 프로일 수가 없다. ‘프로’ 되기의 자명함과 어려움을 인생이 내게 왜 이러나 싶으면서도 받아들여야 할 때, 시간에 무기력하게 등 떠밀리며 눈감는다.
“개수대 앞 창문을 열어 바깥을 본다.”(p.187)는 문장으로 <가리는 손>은 시작된다.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는 아이, 분신과도 같은 아이이기에 내 안의 역사를 통해 바라보는 일은 어렵지 않다.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식, 전해오는 이미지는 어긋나 있고 동의할 수 없지만 어떤 괴리, 어쩌면 배반은 갑작스럽게 포착되고 도무지 해석되지 않는다.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에서 남편을 잃은 아내는 그의 부재에 마냥 아프다. 특히 상대에게 닿지 못하는 일상의 말은 입가에서 주저하고, 잔소리와 농담, 둘만의 언어가 갈피잡지 못한 채 공간에 부유할 때 그렇다. 새로운 소통의 시도는 고통이라는 감각을 예민하게 할 뿐이었는데 그의 선택을 복기하게 한 편지는 처음으로 다른 생각을 시작하도록 만든다.
<이중 하나는 거짓말>을 펴기 전 두 번째 과제로 <바깥은 여름>을 마쳤다. 일곱 개 단편을 읽으며 무엇이 가장 좋았다고 헤아릴 수 없다. 일곱 개의 세계가 밀도 높게 펼쳐지고 그 안에 초대되었다가 나오는 일은 심해를 잠수하고 떠오르는 듯 다른 압력, 다른 세기에 적응하도록 한다. 활자를 통해 바닷물에 섞이지 않는 눈물을 구별하고 눈빛을 읽는 일이 반복된다. 출간된 지 칠 년이 지난 작품 속 인물들에게 인사 건네고 싶다. 노찬성은 열 아홉이 되었겠네, 잘 지내고 있나요 안부를 묻는다.
간결하면서도 아름답고, 아름다우면서도 찌르는 문장이 뒤따르고 뒤따르니 넋 놓고 읽을 뿐이다. 작가는 매끄럽게 질주하면서도 필요한 만큼의 감정을 정확하게 곁들인다. 덧대거나 치장하는 법이 없다. 과도하거나 미흡하거나 어색한 순간을 만나지 못한다. 독자는 감정의 파고를 차분하게 견디는 인물에게 이입하고 안타까워하고 태도를 배우며 결국 안녕을 기도하게 된다. 이름들을 기원의 목록처럼 지니게 만든다. 데뷔작인 <달려라, 아비>의 재기발랄한 유쾌함, 불굴의 희망바람, 위트와 다정함은 <바깥은 여름>에서 더 깊이 있고 진지하게 직시하는 법을 보여준다.
화자는 “어느 땐 그게 타인을 가장 쉬운 방식으로 이해하는, 한 개인의 역사와 무게, 맥락과 분투를 생략하는 너무 예쁜 합리성처럼 보여서.” 라고 “가뿐하게 요약하고 판정할 때”(p.200) 드는 반발심을 설명한다. 말의 홍수 시대를 사는 현재에 보내는 경고와도 같다. 역지사지라고는 없고 품이 드는 이해보다 오해를 방치하는 경우도 흔한 나날들.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말의 여러 가지 면모는 페이지를 넘겨보며 연결 짓게 하거나 한동안 숙고하게 만든다. 여름 끝에 읽은 <바깥은 여름>이 늦었지만 다행이다. 어쩔 수 없이 걸리고 만 여름 감기가 뒤꿈치를 들어 올린 만큼 마음의 키를 키워줄 작품을 추천한다. 이제 <이중 하나는 거짓말> 차례다.
책 속에서>
손바닥에 고인 땀을 보니 문득 에반을 처음 만난 날이 떠올랐다. 손바닥 위 반짝이던 얼음과 부드럽고 차가운 듯 뜨뜻미지근하며 간질거리던 무엇인가가. 그렇지만 이제 다시는 만질 수 없는 무언가가 가슴을 옥죄었다. 하지만 당장 그것의 이름을 무어라 불러야 할지 몰라 찬성은 어둠 속 갓길을 마냥 걸었다. 대형 화물 트럭 몇 대가 시끄러운 경적을 울리며 찬성 옆을 사납게 지나갔다. 머릿속에 난데없이 ‘용서’라는 말이 떠올랐지만 입밖에 내지 않았다. 찬성이 선 데가 길이 아닌 살얼음판이라도 되는 양 어디선가 쩍쩍 금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p,81, 노찬성과 에반)
어느 부족의 시제에는 전생과 환생이 들어간다. 그런 건 누가 정하고, 어떻게 설득하는지 다른 부족은 조금도 가늠 못한다. 어느 나라 동사는 백오십 번 이상 몸을 바꾼다. 그것은 프리즘에 닿은 빛처럼 여러 갈래로 꺽이며 굴절된다. 단어가 소리에 반사돼 정신에 무지개를 비춘다. 어느 민족에게 사랑은 접속사, 그 이웃에게는 조사다. 하지만 또다른 부족의 경우 그런 건 본디 이름을 붙이는 게 아니라 하여 아무런 명찰도 달아주지 않는다. 어떤 민족에게 ‘보고 싶다’는 한 음절로 족하다. 하지만 다른 부족에게 그 말은 열 문장 이상으로 표현된다. 뿐만 아니다. 어느 추운 지방에서는 몇몇 입김 모양도 단어 노릇을 한다.(p.138, 침묵의 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