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 읽었던 책의 제목은 <생의 한가운데>였다. 오랜 시간이 지나서 다시 만나는 <삶의 한가운데>는 어제 읽은 듯이 생생하고 외우다시피 하는 문장 또한 상당하다. 니나 부슈만의 투신하는 삶은 지독할 정도였고 그래서 더 빛이 났으며 근접하기 어려운 차원이라고 여겼다. 전혜린 번역이기도 했고, 비슷한 시기에 전혜린의 수필집을 읽어서인지 작가인 루이제 린저와 작가를 대변하는 주인공 니나 부슈만, 그리고 전혜린까지 연결되면서 범접 불가한 열정과 순수, 뛰어난 실력이 하나의 이미지로 섞여 들었다.
『삶의 한가운데(박찬일 옮김, 민음사, 1999, 1950, 382면 분량)』는 독일 작가 루이제 린저의 자전적 소설로 니나 부슈만이라는 아이콘이자 전형을 완성한다. 니나에게서 분출하는 삶에 대한 호기심과 열정은 더 많이 알고,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용기 있게 선택하고 책임지는 일련의 과정을 견인할 뿐 아니라 잦아들지 않는 동력을 제공한다. 루이제 린저는 전후 독일의 가장 뛰어난 산문작가로, 토마스 만으로부터는 시대악과의 싸움에서 뛰어난 용기를 보인 작가라고 평가받았다. 나치의 억압으로 교사 해직 통보를 받고, 반反나치 투쟁으로 투옥되기도 하였다는 기록에 더해, 히틀러에 저항해 목숨을 걸었던 저항 문학가로 행세하며, 독일의 ‘잔 다르크’가 되길 원했(주간조선, 박광작, 2017)으나 본모습은 친 나치주의자라는 무리요의 평가가 추가되며 놀라움을 안긴다.
니나의 언니 마르그레트는 니나가 영국으로 떠나기 전 며칠간을 함께 보낸다. “여자 형제들은 서로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든지 혹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든지 둘 중 하나다.”(p.7)라는 첫 문장에서 후자에 가까웠던 마르그레트가 동생을 알아가는 과정을 소설은 담고 있다. 동시에 언니 마르그레트도 니나에 비추어 자기 자신을 서서히 발견한다. 오랜 시간 니나를 사랑하던 슈타인이 죽은 후 니나의 집으로 배달된 그의 일기와 편지, 메모와 공백까지 함께 읽어나갈 때, 슈타인 역시 니나를 거울삼았고, 그뿐 아니라 사랑의 유일한 대상, 삶의 이유이자 이상으로 여겼음을 알 수 있다.
“그녀가 문턱을 넘어왔을 때 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다. 내 안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났다고 해야 하리라. 나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p.43) 1929년 9월 15일자 일기는 슈타인의 미래를 예견한다. 그리고 그들이 만난 지 18년째 되는 날, 삶이라는 여정을 맺겠다고 결정하는 순간에 그는 자신의 죄가 ‘결단을 회피했다는 것’이었음을 고백한다. 하지만 비겁해서라기보다는 유약해서였다고, 끝없이 주의하도록 경고하는 목소리와 모든 경우의 장단점을 고려하라는 명령이 결단을 막았다고 스스로 변호한다. 그의 내면에는 멈추는 법 없는 북소리, 경고음이 울리고 있었던 셈이다.
니나는 그와 정반대였다. 니나는 수선화와 빨간 장미를 좋아하는 건 물론, 많은 것을, 아니 “모든 것”을 좋아하는데 심지어 “몹시 저주스러운 이 삶”(p.15)까지 좋아한다. 풍만함이나 포만함은 참을 수 없는 대신 공포와 불안에 흔들릴지언정 미지의 가능성은 애착을 느끼는 대상이다. 당면한 일을 회피하지 않고 의무를 다하는 일, 약속을 지키는 일은 그녀에게 중요하다. 일신상의 편안함은 고려 조건이 아니었기에 당면한 일을 수행한다.
니나는 흘려버리고 말 일상도 순간마다 붙들고 그 안의 감정과 의미를 들여다본다. 삶에 산재해 있는 여러 관념을 명명하고 각각 분리하기 원한다. 사랑은 무엇인지 행복은 무엇인지 재정의한다. 사랑과 정열의 차이, 행복에 대해 새롭게 바라보고, 결혼의 의미와 결혼 생활 안에서 일어나는 의무나 당위, 제반 사항을 탐색하며 관계 맺는 일에 대하여 질문한다. 멋진 순간이 우리 삶에 존재한다는 것을 책에서 읽었던 니나는 그런 삶을 살아냄으로 직접 확인하기 원한다. 처음에 그녀에게 삶이란 “아는 것, 무섭게 많이 아는 것, 생각하는 것, 모든 것을 파고드는 것”(p.55)을 의미했다. 그녀에게 삶이란 점차 약속을 지키는 것, 주어진 역할을 감당하는 일로 확대되었고, 자기 목소리를 내고 위험을 무릅쓰는 일, 전쟁에서 비롯한 거대한 부조리에 저항하는 일, 무엇보다 제대로 된 글을 쓰고, 멈추지 않고 행동하는 일이 된다.
소설은 인물의 감정을 섬세하게 그려 보인다. 니나를 잃은 슈타인의 슬픔은 만져질 듯이 표현된다. 그리고 이 절망이 바닥을 치고 오르는 순간 또한 기록한다. “나는 나 자신을 위로하지 않았다.”(p.304)고 자신과 대면 후에 고통을 극복하고 새로운 시작을 기대한다. 정화되는 심정과 각성 끝에 감사에 이른다. “나는 니나를 방해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나는 그녀가 살고 있는 쪽을 본다. 그리고 그녀에게 감사한다.”(p.305) 이 감정은 곧 곤두박질하지만 그는 운명이라 여기고 운명을 종결짓는다. 보편과 극단을 아우르며 마음의 움직임과 파생되는 인간의 감정을 다시 한번 바라볼 수 있게 하는 작품이다.
인상적인 부분을 다 꼽을 수 없지만 소설가인 니나가 가지고 있는 글에 대한 태도는 빼놓을 수 없다. “누구든 그가 쓴 것과 똑같아. 이걸 분리시킬 수는 없어.”(p.130)라고 단언한다. 살기로 결심한 즉시 실행에 옮기는데 바로 책상에 앉아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니나에게 산다는 것은 곧 소설을 쓰는 것이다. 책 속의 책인 니나의 소설에서는 그녀에게 문학이란 무엇인지, 작가는 어때야 하는지 밝힌다. 소재가 자기 자신을 알아볼 수 없게 될 때까지 맷돌에 갈고 또 가는(p.164) 이유, 곧 값싼 효과를 허용함으로 빨리 타락하는 일을 방지한다는 원칙도 진실에 더 가깝게 다가가기 위한 조건이다.
소설은 일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니나와 슈타인을 비롯한 여러 인물의 삶을 보여준다. 용감한 인생 탐구자인 니나와 함께 삶의 의미, 추구할 가치, 도달해야 할 목표지점을 향한 여정에 돌입하게 된다. 슈타인과 니나의 글은 시간순으로 정렬되어 있지 않고 지그재그를 그리듯 엇갈리며 배치되어 있어 수월하게 읽히지 않는다. 다행히 간결한 문체와 속도감 있는 전개는 이를 상쇄하는 요소다. 대화와 서술이 섞여있고 공간적 배경도 글에 따라 현재와 과거를 왕래한다. 화자인 언니가 대강 펼친 뒷부분을 먼저 읽기도 하기에, 결말에 다가가다 앞으로 다시 거슬러 읽는 일도 생긴다.
그와 같은 수고는 글로써 남겨진 자의 흔적을 쫓을 때 일정 부분 정성으로도 간주된다. 어쩌면 사랑을 이루지 못한 슈타인 박사만이 아니라 폭력의 무참한 시기에 희생양으로 사라진 이들을 애도하는 방식일수도 있겠다. 재확인한 작가의 행보가 지금까지처럼 몰랐던 게 나았겠다는 아쉬움도 생긴다. 다시 읽은 작품이 다시 잃은 작품이 되었나 생각할 때, 작품은 작품으로 남겨두고 싶다. 온통 의지와 정신으로 형성된 듯한 니나는 새롭게 질문을 시작한다. 니나 부슈만은 여전히 삶의 한가운데에서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엄정한 기준을 제시하며 곧바로 실천할 태세다.
책 속에서>
-그러니까 니나가 밤새 쓴 것은 편지가 아니라 지켜야 할 약속이었다. 피로와 절망, 이별에도 불구하고 지켜야 할 약속.(p.149)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운명이 없어. 그런데 그것은 그들 탓이야. 그들은 운명을 원하지 않거든. 단 한 번의 큰 충격보다는 수백 번의 작은 충격을 받으려고 해. 그러나 커다란 충격이 우리를 전진하게 하는 거야. 작은 충격은 우리를 점차 진창 속으로 몰아넣지만, 그건 아프지 않지. 일탈이란 편한 점도 있으니까. 혹은 마치 파산 직전에 있는 상인이 그것을 숨기고 여기저기서 돈을 융통한 후 일생 동안 그 이자를 갚아가며 늘 불안하게 사는 것과도 같지. 나는 파산을 선언하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쪽을 택하고 싶어.(p.144)
-그러나 이렇게 하는 것이 더 진실에 가까워. 우리는 영웅이 아니야. 가끔 그럴 뿐이야. 우리 모두는 약간은 비겁하고 계산적이고 이기적이지. 위대함과는 거리가 멀어. 내가 그리고 싶은 게 바로 이거야. 우리는 착하면서 동시에 악하고, 영웅적이면서 비겁하고, 인색하면서 관대하다는 것, 이 모든 것은 밀접하게 서로 붙어 있다는 것, 그리고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한 사람으로 하여금 어떤 행위를 하도록 한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아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걸 말이야. 모든 것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데도 그것을 간단하게 만들려는 게 나는 싫어.(p.166)
나는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변신을 보고 전율한다. 나는 이 시대를 감당하지 못하는 것이다. 니나는 내가 현재를 이해하도록 도울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아마 그녀도 내가 시대와 현실에서 도피하고 있다고 비난할지 모른다. 내가 그런가? 정말일까? 도대체 누가 도피하고 있다는 말인가? 쫓겨난 자들과 함께 미지의 해안으로 달려가는 자들인가, 아니면 한때 소중했던 것들을, 아마도 영원히 바래지 않을 것들을 지키기 위해 자기 자리에 머물러 있기를 원하는 자들인가.(p.3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