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정한 적도 없는데 요즘 하는 일이 일관된다. 앤드루 포터의 <사라진 것들>을 읽기 위하여 사두고 안 읽은 전작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을 읽었다. 클레어 키건의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읽기 위하여 사두고 안 읽은 전작 <맡겨진 소녀>를 읽었다. 이제 김애란 차례다. 배송중인 장편 <이중 하나는 거짓말>을 읽기 위하여 사두고 안 읽은 데뷔작 <달려라, 아비>를 읽었다. 이쯤되니 남들 다 읽을 때 읽자는 교훈을 얻을 수도 있고, 전작을 읽지 않았다는 죄책감도 일종의 병이나 편견이라고 유연하자 허용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당분간은 지금 A를 읽기 위하여 전작인 -A 또는 그 전작 -AA, -∞A (마이너스 무한대 A라고 읽어야 하나)를 더듬어 읽을지 모르겠다. 역행하여 오르는 사이에 근육이 붙을 날들이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읽기 위하여 데뷔작 <가난한 사람들>을 펴는 일은 당연과 강박 사이에 부유한다.
김애란의 첫 번째 소설집 『달려라, 아비(창비,2005, 268면 분량)』는 자기만의 과제를 해결하려는 자들의 분투를 이야기한다. 치열함은 분투의 기본값이지만 애쓰다 지쳐 분노하기보다는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인다. 오히려 관조하고 웃어넘기면서 다음 페이지에 희망을 남겨둔다. 다음 페이지를 누군가 대신 써줄 수 없고 내일을 누군가 대신 살아줄 수 없기 때문이다. 속임수나 부조리와 맞닥뜨리는 시기는 몇 세부터 몇 세 사이, 어릴 때 제외, 주로 사춘기 등으로 한정되지 않는다. 왜 아버지는 달려 나가셨고, 어머니는 안 계시며, 나는 복어의 독을 이겨내야 하는지 당면한 문제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왜 아버지는 잠깐만 있으라 하고 돌아오지 않는지, 왜 나는 잠 못 드는지, 불면의 원인 해결이 중요한지 증상 완화가 먼저인지 알고 싶다. 혼자 깨우친 한글로 비로소 완성한 세계, 필연의 작품은 왜 기필코 붕괴돼 버렸는지, 그녀들은 자기만의 방에 기거하는지 내가 그녀들의 방에 침범하는지, 애초에 나는 복제품 중의 하나인지, 익명은 실존의 극단이고 허상인지 알아내기 위하여 집중한다. 두려움을 떨쳐내며 한 번 더 집중한다.
한국 문단의 새로운 이름을 기억하자는 찬사를 비롯해 수많은 감탄 속에 등장했던 작가 김애란은 한국일보 문학상의 최연소 수상(2005)을 시작으로 여러 상을 받아왔다. 소설집과 장편소설, 산문집 등으로 꾸준히 독자를 만나왔으며 얼마 전 <이중 하나는 거짓말>을 출간했다. 젊은 거장이라 불리는 작가는 데뷔작 후기에서 문학이 신앙이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고 다만 소설 안의 어떤 정직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전한다. 그의 소설은 추앙의 별은 아니지만 정직한 바람, 간절한 갈망을 추려내 담는다. 간절함을 갈무리하는 방식은 비장하지도 소란스럽지도 않고 확성기를 통과시켜 사실을 증폭시키는 일은 더더욱 없다. 마지막의 너털웃음이나 침묵은 적절한 매듭으로 묶이고 스스로를 침잠케 하거나 매몰시킬 유혹의 여지를 없앤다.
소설집은 표제작인 <달려라, 아비>부터 등단작인 <노크하지 않는 집>까지 아홉 개 단편을 묶었다. <달려라, 아비>의 아버지는 ‘나’가 세상에 태어나기 전날 집을 나가 ‘나’의 세상으로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화자인 나는 그가 달리기하러 집을 나갔다고 “그렇게 믿기로 했다”(p.15)고 선언한다. ‘나’는 아버지의 지구별 무한 경주를 자신이 입혀드린 야광 바지로 식별해 내고 띄엄띄엄 마음으로 동행한다. 혼자 남겨진 어머니는 비장함이나 분노로 딸을 키우는 대신 “농담”으로 키웠고 농담은 어머니의 가장 큰 유산인 “자신을 연민하지 않는 법”과 조화롭다. 곤란과 고단과 억울은 할당받은 자기 영역 밖으로 흘러넘쳐 결국은 비극적 파장을 짙게 할 수도 있었을 텐데 소설은 다른 전개를 보인다. 마지막 온점까지 읽고 났을 때 따라오는 건 감탄이다.
편의점을 배경으로 현대인의 일상을 성찰하는 소설이 인기였다. 편의점은 마치 하얀 도화지처럼 어떤 사연, 어떤 인물에게도 공평한 배경을 제공했다. <나는 편의점에 간다>는 어쩌면 많은 편의점 노벨의 시조다. 편의점이 변주를 시작하면 동네 사랑방 같은 다정함도 투명한 벽으로 칸막이 치는 싸함도 무난하게 완성할 수 있다. 어느덧 이십여 년 전인 2003년의 편의점 풍경은 이십 대 청춘의 일상을 사실적으로 기록할 때 중요한 장치이자 상징이 된다. 불안과 부담 사이, 침해받지 않을 자유와 안부 물을 공존 사이는 여전히 아슬아슬하다.
<스카이 콩콩>은 아버지와 두 아들의 일상을 그린다. 불통과 일탈, 다시 화합도 그린다. 집 앞에 서 있는 오래된 가로등은 가족을 내려다보는 무심한 목격자부터 기적을 공유하는 증인까지, 꿈과 상상, 시간과 공간을 넘나든다. 스카이 콩콩이 보이지 않는 날개를 선사했다면 가로등은 어떤 가능성도 지지하겠다고 윙크한다. <그녀가 잠 못 드는 이유가 있다>는 불면증에 대응하는 백 한 가지 방법을 연상케 하면서 설상가상으로 갑자기 동거하게 된 아버지 일화를 보탠다. 아버지는 불청객이면서도 종국에는 불쌍해지는데 나와 아버지 중에서 누가 더 불쌍한지 독자는 가늠하기 어렵다.
<사랑의 인사>는 네스호 괴물 네시의 출몰과 약속을 저버리고 사라진 아버지와의 조우를 나란히 놓는다. 우연한 조우가 단 한 번의 사랑의 인사를 하기 위한 아버지의 선물이라 여겼지만, 극적으로 맞닥뜨린 그 아버지는 “예전부터 유일하게 잘해왔던 일, 즉 내 앞에서 사라져가는 일”(p.160)에만 충실하다. 아비가 달리는 일에만 충실했듯이. 상실은 또다시 출발점에 서나 상실감을 느끼는 일은 그만 마다한다. <누가 해변에서 함부로 불꽃놀이를 하는가>에서 나는 소리친다. “아버지 좀! 그러지 말고 말해보세요. 진짜 이야기를.”(p.183) 지금 하고 있다고 대답하는 아버지. 부자의 대화는 현실과 환상을 넘나들며 ‘진심’으로 채색된 꿈자리를 편다. <종이 물고기>는 이야기의 변신, 글쓰기의 가능성을, <노크하지 않는 집>은 대학가 한 건물에서 익명의 사람들과 지내는 화자가 겪는 어긋남을 보여준다. 예측은 빗나가고 몸 둘 바 모르겠는 순간은 느닷없이 도착하고 있다.
이토록 즐거운 소설 읽기라니. ‘즐거운’이라는 낱말은 ‘의미있는’, ‘특별한’, ‘새로운’, ‘매력 넘치는’, ‘웃픈’, ‘짠한’ 으로 계속 바뀐다. 페이지를 빠르게 넘어가다가도 한 번씩 뭉클할 때면 그대로 멈춘다. 웃음과 낙관 사이에 마음 추스르고 나아가려는 의지는 부단히 개입했을 것이다. 소설의 ‘나’들은 현재의 ‘나’를, 내가 처한 조건을 선택한 일이 없으나 최대치의 성실로 하루를 잇대어 살아 나가야 한다. 불안정한 관계와 불확실한 소통에도 지지 않고 스스로를 소외시키지 않으려는 노력이 빛을 발한다. 놀이처럼 게임처럼 숨바꼭질 또는 숨은그림찾기처럼 긴장과 느슨함을 왕래할 때 가끔 가로등의 윙크도 받는다. 유쾌하고 매력 넘치는 문장은 독자에게 신선한 자극을 안긴다. 한 편씩 아껴 읽은 이야기가 소중하다. 남들 다 읽을 때 읽기를 미루지 말자, 이 무슨 시간 낭비이며 뒷북인가 싶은 마음도 들지만 한편으로 높아지는 지수가 있으니, 딩동, 택배가 도착했습니다. 알람이 울린다. <이중 하나는 거짓말>, 설렘 지수는 높아진다.
책 속에서>
오래전 우리집 앞에는 나이를 많이 먹은 가로등 하나가 있었다. 정확하게는 우리집이 아니라 우리 주인집 앞이었지만, 그가 온전히 굽어보던 것은 옥상 위의 우리집. 그중에서도 나와 형이 살고 있는 방의 창문이었다. 그 시절, 형과 나의 정수리에는 언제나 가로등 불빛이 노랗게 고여 있었다.(p.60, 스카이 콩콩)
오래전 우리집 앞에는 나이를 많이 먹은 가로등 하나가 있었다. 그는 먼 옛날부터 그곳에 있었기 때문에 모르는 게 없었다. 나는 창가에 턱을 괴고 앉아, 지구보다 더 큰 둘레를 그리며 돌고 있는 가로등의 운동을 상상하곤 했다. 지구의 원주와 가로등이 손끝으로 그려내는 원의 너비. 그리고 그 두 원의 너비 차가 만드는 사이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를테면 형이나, 아버지, 혹은 나 같은 사람들.(p.81, 스카이 콩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