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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zinga님의 서재
  • 나는 왜 쓰는가
  • 조지 오웰
  • 16,200원 (10%900)
  • 2010-09-15
  • : 11,971

책은 한 번에 완독하자고 다시 한 번 약속해본다. 서평에 불필요한 사족을 먼저 언급하자면 『나는 왜 쓰는가』는 2년 전 리더동기모임의 토론도서였다. 완독을 못한 채 전반부 수록작품에서 논제를 만들었는데 그날 나온 논제 대부분이 약속이나 한 듯 앞부분에서만 나왔다. 다음 달에 후반부 토론을 하기로 하고는 아직 모이지 못한 채 2년이 되어간다. 책을 보면 2022년 12월 5일 <문학 예방> 말미에 ‘대단하다!’라는 메모가 있다. 지난 6월에 다음 이야기인 <행락지> 부터 펼쳤고 마지막 페이지 이후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재독을 시작했다. 읽기를 중단한 사이에 특별한 변화라면 『1984』를 읽고(서평쓰기까지 포함) 토론했다는 차이가 있겠다. 『1984』는 슬로건을 내세우고 언어를 조작하는 전체주의 사회의 지옥도와 그 안의 함의들을 직접적으로, 동시에 상징적으로 그려낸다. 그 후 다시 보는 오웰의 문장은 낱말 하나, 문장부호 하나도 허투루 읽을 수 없게 만든다. 다시 편 <행락지>부터 감탄은 계속되었다.

 

『나는 왜 쓰는가(이한중 옮김, 한겨레 출판, 2010, 480면 분량)』는 조지 오웰의 에세이 선집으로 전체 스물아홉 편의 글이 담겨있다. 쓴 순서대로 묶인 에세이들은 작가이자 저널리스트, 관찰자이자 행동가였으며 진실을 추구하고 타협하지 않았던 정신의 증거이자 정직한 자화상이다. 영국령 인도에서 태어난 조지 오웰의 대표작은 <동물 농장(1945)>과 <1984(1948)>를 꼽지만 책으로 출간한 소설, 르포, 에세이집 11권과 수 백편의 에세이가 있다. 그는 계급의식을 풍자하고 사회의 부조리를 고발하는 데 탁월하였으며 정치적 글쓰기로 20세기 문학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조지 오웰은 필명으로 본명은 에릭 아서 블레어이다. 첫 작품 『파리와 런던의 부랑자』(1933)부터 '조지 오웰'이라는 필명으로 발표하였다.

 

작가가 제일 처음으로 발표한 1931년 글 <스파이크>는 부랑자를 위한 숙소에서의 체험을, 1948년 마지막으로 집필한 <간디에 대한 소견>은 인간됨의 본질과 성인됨을 거론한다. 가장 낮은 자리에서 눈을 맞추었던 오웰은 그 시간에 정성을 들였고 반론이 있을지언정 대중이 우러르는 위치에 있는 자에 대한 이야기로 자신의 글을 맺은 게 의미심장하다. “그러나 그를 정치인으로만 볼 때, 그리고 우리 시대의 다른 유력 정치인들과 비교해볼 때, 그가 남긴 향기는 얼마나 맑은가!”(p.460)로 책은 끝난다. 이 마지막 문장이 작가에게 돌아간다. 오웰이 남긴 향기는 얼마나 맑은지. 동시에 짙으면서 필요한지, 몸을 사리지 않고 세상과 그 안에서 부대끼는 인간을 꿰뚫어보았던 실천적 지식인에게로 이 문장은 기꺼이 돌아간다. 에세이들은 분량도 주제도 다채로워서 ‘전부 겨우 6페니를 주고 산’ 장미에 대한 단상격인 <나 좋을 대로>부터 자신이 통과한 유년을 역설적인 제목 아래 사실적으로 기록한 <정말, 정말 좋았지>까지 다양하다. 후자는 작가 사후에 지면에 발표되었으며 여덟 살부터 육년간, 유년의 시기에 세상이 얼마나 비정할 수 있나를 학습하는 장이었음을 고백한다.

 

모든 글에서 작가의 주장은 선명하게 드러난다. <정치와 영어>에서는 이와 같은 선명함이라는 게 무엇인지, 어떻게 글은 선명해지는지, 선명하지 않은 글의 문제점과 폐해를 조목조목 분석한다. 단어사용의 엄격함과 민감함은 역시 <1984>의 작가라는 걸 확인케 만든다. 문제점을 지적할 때의 진지한 분위기에도 위트는 사라지지 않고 독자는 주목하게 된다. 또한 지적에서 끝나지 않고 유용한 처방을 내린다. 최고의 글쓰기 강의를 지면을 통해 듣는 셈이다. “나는 왜 쓰는가”와 “어떻게 쓸 것인가”는 날기 위한 양 날개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표제작인 <나는 왜 쓰는가>에서 말하는 글을 쓰는 네 가지 동기는 스스로를 재어보게 하기에 주기적으로 떠올린다. 특히 “좋은 산문은 유리창과 같다.”(p.300)로 시작하는 말미의 명문장은 숨을 고르게 만든다.

 

그 중에서 <어느 서평가의 고백>은 무척 흥미진진하면서 눈앞에 오웰의 방, 그의 책상, 종이더미들이 저절로 그려졌다. 나도 모르게 왜 내가 행복해지지, 자문하면서 읽은 후에는 정화되는 기분이 들었다. 도착하는 책들, 책배의 압박을 사실적으로 그리며 가운차림으로 고문당하는 사람의 일이자 사명을 유머러스하게 포착한다. <물속의 달>은 반전에 놀랐던 사랑스러운 글이었다. <걸리버 여행기>에 대한 평론과 셰익스피어의 명성에 반기를 들었던 톨스토이에게 대응하는 <리어, 톨스토이 그리고 어릿광대>는 문학비평이자 심리학적 분석으로도 읽힌다.

 

조지 오웰은 어렵고 곁을 내주지 않고 심각하고 마냥 진지할 것 같았다. 그러나 대여섯 살 때부터 작가가 되리란 걸 알고 있던 오웰은 “차분히 앉아 책을 쓰는 일”(p.289)에 전 생애를 바친다. 오웰에게 차분히 앉아 있는 장소는 총탄의 한가운데, 냉기 가득한 거리, 식민지의 근무처나 터무니없이 열악한 병원을 의미했고 어쩌면 기숙사의 젖은 침대도 여기에 포함되었을 테다. 읽을수록 작가의 시선은 명치 언저리까지 아릿하게 만든다. <코끼리를 쏘다>에서, 시를 쓰게 만든 이탈리아 민병대원을 기억하는 <스페인내전을 돌이켜본다>에서, 장작더미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인간과 너무 많은 짐을 진 당나귀로부터 사실을 상기하고 지적하는 <마라케시>에서.

 

『나는 왜 쓰는가』에서 작가는 기록하고 질문하고 입장을 밝힌다. 독자는 대답해보려 애쓰면서 책장을 넘기고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견주어본다. 간결하고 또렷한 문체는 건조하고 힘있게 파고들기도 하지만 아름다움이나 고귀함을 서정적으로 스며들게 만든다. 그는 진지한데 위트도 넘친다. 읽어야하는 책이면서 공부해야 하는 책이다. 눈으로 한번 스치고 말아서는 안 될 것 같다. 작가의 한 문장이 농축하고 있는 하루, 일상, 투신, 참여와 거리두기, 필연의 선택과 결정을 따라가 보는 일에는 정성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어느 날 어떤 글을 다시 찾아 읽게 될 테고 그때마다 감동은 여전할 것이다. 말미에 실린 <조지 오웰 연보>가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고 또 숙연케 한다. 활자는 작가가 살아낸 궤적으로 인해 식지 않는 온기를 후대에 남긴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때라던데 서두르지 않고 오웰을 읽어나갈 수 있겠다. 남아있는 오웰의 작품들을 헤아려보며 이게 무슨 복인가 생각한다. 치열한 글쓰기의 표본, 좋은 문장의 릴레이, 간곡한 기록인 『나는 왜 쓰는가』를 추천한다.

 



책 속에서> 


그런데 정말 이상한 것은 그들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몇 주 동안 매일 언제나 같은 시간에 노년의 여성들이 장작을 지고서 줄지어 집 앞을 절뚝절뚝 지나갔건만, 그리고 그 모습이 내 눈에 분명히 비치었건만, 나는 사실 그들을 봤다고 할 수가 없다. 내가 본 건 장작이 지나가는 행렬이었다. 내가 우연히 행렬을 뒤따라가다가 묘하게 들썩거리는 장작더미에 시선이 끌려 그 아래에 있는 인간을 주목하게 된 건 그날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때 처음으로 그 가련한 흙빛의 육신들이 내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엄청난 무게에 짓눌려 반으로 접혀버린, 뼈와 가죽만 남다시피 오그라든 육신들 말이다.(p.14)

 

그런가 하면 자기만의 개별성을 지우려는 노력을 부단히 하지 않는다면 읽을 만한 글을 절대 쓸 수 없다는 것도 사실이다. 좋은 산문은 유리창과 같다. 나는 내가 글을 쓰는 동기들 중에 어떤 게 가장 강한 것이라고 확실히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어떤 게 가장 따를 만한 것인지는 안다. 내 작업들을 돌이켜보건대 내가 맥없는 책들을 쓰고, 현란한 구절이나 의미 없는 문장이나 장식적인 형용사나 허튼소리에 현혹되었을 때는 어김없이 ‘정치적’ 목적이 결여되어 있던 때였다.(p.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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