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고 추구하는 이상과 발 딛고 서있는 현실 사이에는 간격이 있다. 꿈이 미화될수록 현실은 척박하게 다가오고 간극은 커진다. 선택은 자기만의 몫으로 압박을 가한다. 이를테면 만 갈래로 세분화되는 선택지에서 은연중에 작동하는 방어기제에 올라타는 수도 있다. 어느 날은 자기 암시나 합리화가 선봉에 서고 어느 날은 전쟁을 선포하기도 한다. 무너뜨리겠다고 작정하다가 여기까지 온 게 어딘가라며 톤을 바꾼다. 표정을 감추고 숨어버리기도 하지만 싸우겠다고 칼을 뺐는데 대상이 증발하기도 한다. 간극이 시대적 배경에서 기인할 경우 이 싸움은 시작하기도 전에 패색이 짙어진다. 이디스 워튼의 『석류의 씨(송은주 옮김, 휴머니스트, 2022, 248면 분량)』는 어긋나고 비틀리는 관계와 그로 인한 불통의 괴로움, 그에 관여하는 여러 요소를 섬세하게 보여주는 단편집이다.
이디스 워튼은 뉴욕의 상류층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유복했던 어린 시절의 경험은 유한계급의 생활을 묘사하는 작품을 쓸 때 도움이 된다. 23세의 나이에 열세 살 연상의 에드워드 로빈스 워튼과 결혼한 후, 불행한 결혼생활, 사회적 지위와 작가적 야심 사이의 갈등으로 신경쇠약을 앓았다. 신경쇠약을 치료할 겸 유럽으로 여행을 떠나 여러 나라를 옮겨 다니며 생활했으며, 소설과 유럽 여러 지역의 역사, 건축, 미술에 대한 글을 썼다. 전쟁 후 1920년에 발표한 『순수의 시대』로 1921년 여성 최초로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대표작으로는 『순수의 시대』 외에도 『환락의 집』(1905), 『이선 프롬』(1911), 『암초』(1912), 『여름』(1917) 등이 있다.
나에게 부족한 부분을 넘치도록 채워주는 타인을 향한 우상화는 부지불식간에 일어나고 대개 시야를 가리면서도 속도는 높인다. <편지(1910)>의 리지 웨스트가 화가인 빈센트 디어링의 딸을 가르치느라 왕래하는 집은 긴 언덕을 올라가야 나온다. “삶의 얼굴”이 바뀐 운명의 날부터 리지는 그곳에 날개 달린 발로 다가갔고, 마치 “천국의 계단을 오르는 꿈의 비행”(p.10)과 같았으며, 그와 함께 이야기하면 그의 "지성의 넓은 날개를 타고 창공으로 솟아 오르는" 듯했다.(p.17) 그런 듯했고, 그래 보였고, 그렇게 느꼈던 모든 일은 한꺼번에 의심할 수 없는 영역으로 이동한다.
그녀의 삶이 그녀에게 유용한 방어 기술을 익히게 하였음에도 기술이 작동하지 않는 영역, 예외구역은 불가침 조약을 맺고 외따로 떨어져있다. 의심할 수 없는 영역이다. 재회 후에도 그는 그 영역에서 건재했고, 흡족한 결실도 맺었으나 3년의 행복한 결혼생활은 개봉되지 않은 자신의 편지를 발견하면서 균열이 간다. 초점은 보고 싶은 대로만 자동으로 맞춰졌던 건가, 그렇다면 그녀는 초점을 재조정을 할 것인가. 작가는 리지의 심리 묘사를 리듬감 넘치는 언어로 생생하게 포착하고 매끄러운 문장은 각각의 장면으로 그림처럼 빨아들인다.
<빗장 지른 문(1909)>의 휴버트 그래니스는 명성을 얻기 위해 거의 모든 문학적 실험을 했으나 10년간의 열정에도 불구하고 계속 실패하였고, 자비로 무대에 올린 희곡 <곤경> 역시 대실패하면서 생애 최고의 10년, 잃어버린 반생을 회고한다. 결정적 곤경에 빠진 그는 새로운 선택을 한다. 바로 사촌인 조지프 렌먼 살인사건의 범인이 자신이라고 고백함으로 추구했던 이상에 단 한 번도 접근을 허용치 않았던 삶, 곤경 자체였던 삶으로부터 벗어나겠다고 결심한다. 소설은 “삶에 사슬로 매여 있”(p.119)듯이 그래니스의 시도가 거듭 좌절되는 아이러니를 속도감 있게 그린다.
삶의 목표와 지향, 소망과 계획이 그에게는 단단하게 ‘빗장 지른 문’처럼 열리지 않았다. ‘근심하지 않는다’(p.92)를 모토로 삼는 조지프 렌먼과 그가 키우는 멜론의 설정도 그래니스라는 인물을 비극적으로 부각한다. 표제작인 <석류의 씨(1931)>는 샬럿 애슈비에게 ‘집’의 의미가 어떻게 달라져 가는가를 보여준다. 집은 그녀에게 허리케인의 중심부에서 찾아낸 혼자만의 섬과 같은 안락한 성채였다. 그러나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날부터 도착한 회색 봉투의 편지는 불안하고 휴식할 수 없는 장소로 집을 바꾸어 간다. <하녀의 종(1902)>은 폭력적인 남편에 의해 희생당하는 브림프턴 부인과 시대적 위계질서의 고착으로 무력하게 방관할 수밖에 없는 피지배자이자 방관자의 공포를 기록한다.
『석류의 씨』에 담긴 네 편의 단편은 가리워진 진실을 그대로 둔다. 의문은 해소되지 않은 채 남고, 독자는 결말 이후를 상상하고 추적하다 길을 잃는데, 그 아득한 감정은 기시감이 든다. 참고, 넘어가고, 통과했던 크고 작은 순간들. 다행이라 여겼던 게 정말 다행이었는지, 다른 길을 선택했다면 전혀 다른 현재를 살고 있을지 누구나 정답 길만 걷지 못한다. 독자는 모호성, 양가성, 열린 결말(p.243)이라는 워튼의 고딕소설을 나타내는 특징에 매료될 것이다. 18세기부터 19세기까지 인기를 끌었던 여성 작가들의 고딕 소설은 ‘여성의 경험을 표현할 새로운 도구’가 되어 사실과 환상의 경계에서 취약함을 언어화한다. “고딕소설의 정신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것”(p.241)이라고 했던 워튼은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에 녹인다.
호흡이 길지 않은 단편이라 가독성이 좋고, 익숙하지 않은 서사라 몰입도를 높일 수 있지만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글을 이렇게 잘 쓴다고, 라는 감탄이었다. 접착제를 붙인 듯이 연결되는 문장, 단어의 선택과 효과적인 반복, 반복으로 인한 의미부여와 확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정확하게 짚는 비유, 현미경을 댄 듯한 심리서술, 구체어와 추상어 사이의 균형, 경쾌한 문체와 때론 위트까지 독자의 관심을 한 순간도 흐트러트리지 않는다.
그러니 <빗장 지른 문>의 주인공 휴버트 그래니스 같은 작가는 반평생을 허비했다고 총을 집었다 놓았다 하는 것이다. 작가의 성장 배경, 받아온 교육, 어려웠던 경험들이 모두 약이었겠지만 재능이라고 본다. 그리고 빼어난 통찰력. 당연히 밑줄이 많은 책이고 필사할 문장 또한 많으며 읽는 즐거움에 대하여 상기시킨다. 작품은 대표작부터 읽어야 한다고 여겨왔는데, 읽기만 한다면야 순서가 중요치 않겠다. 100여 년 전을 살았던 한 여성 작가의 목소리가 현대의 여성들에게 전달하는 삶의 편린은 여전히 유효하다. 워튼의 장편을 기대하게 만드는 소설집으로 추천한다.
책 속에서>
소설에서는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거짓말 위에 세워진’ 행복은 언제나 무너졌고, 그 폐허 밑에 주제넘은 건축가를 묻어버렸다. 그녀가 여태껏 읽은 모든 소설의 법칙에 땨르면, 그녀를 이미 한 번 속인 적이 있는 디어링 씨는 반드시 계속해서 그녀를 속일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가 계속해서 자기를 속이지는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p.67)
그래니스는 자신의 죄를 밝히려 무슨 짓을 해도 다 소용없다는 무력감에 사로잡혔다. 그는 삶에 사슬로 매여 있었다. “의식의 죄수.” 그 문구를 어디에서 읽었던가? 그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를 알게 되었다. 한밤중에 뇌가 불타는 듯한 기분일 때면 그의 고정된 정체성, 축소할 수도 정복할 수도 없는 자아의 감각이 여태껏 경험한 그 어떤 느낌보다도 더 날카롭게, 더 은밀하게, 더 피할 수 없게 찾아왔다. 정신이 이렇게 복잡한 자기 인식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마음 자체의 어두운 미로 속으로 이렇게 깊이 침투할 수 있다는 것을 전에는 전혀 알지 못했다. 그는 토막 잠이 들었다가 무언가가 그에게 달라붙은 느낌, 그의 손과 얼굴, 목구멍 속에 붙은 느낌에 깨어나곤 했다. 그러다 머릿속이 맑아지면 뭔가 진하고 끈적이는 물질처럼 그에게 달라붙은 것이 바로 자신의 혐오스러운 인격임을 깨달았다.(p.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