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책은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처음 읽던 순간의 즐거움을 그대로 간직한다. 할머니 댁 책꽂이에서 발견했던 첫 번째 『키다리 아저씨』는 전집 중 한 권이었고, 묵직한 느낌의 꽤 튼튼한 내지가 기억나고, 글에 한 번 그림에 한번, 두 번씩 감탄하느라 몰두해 읽었다. 그 후로 <어린왕자>나 <빨간 머리 앤>을 모으듯이 몇 권의 『키다리 아저씨』를 수집한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진 웹스터의 『키다리 아저씨(김선영 옮김, 푸른숲주니어, 2024, 1912, 256쪽 분량)』는 고아 소녀 제루샤 에벗이 후원자인 키다리 아저씨에게 보내는 편지모음으로 서간체 문학이면서 일인칭 성장 소설이다. 마크 트웨인의 조카손녀인 진 웹스터는 학창시절부터 글쓰기에 열정을 보였으며 재학 시절에 창작한 단편 모음집 『패티가 대학에 갔을 때』가 성공하자 『키다리 아저씨』를 발표 후 『속 키다리 아저씨』도 출간하였다. 인권에 대한 작가의 관심은 작품에도 드러나는데 독자는 키다리 아저씨 외에 또 다른 수신자가 되어 제루샤의 대학생활 4년과 1900년대 초기의 사회상을 보게 된다.
제루샤 에벗은 후원자인 가칭 존 스미스 씨 앞으로 한 달에 한 번 감사 편지를 쓴다는 의무를 수행한다. “키다리 아저씨께”로 시작하는 편지는 폐쇄적인 단체 생활에서 처음으로 벗어난 자유로움과 놀라움, 설렘과 기대, 염려와 다짐을 솔직하게 담고 있다. 자신에게 주디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다른 친구들과의 간극을 줄이기 위해 규칙을 정하고 실천한다. 주디의 열정은 전염성이 있어서 언급하는 책의 제목에 한 번 더 주목하게 만들고, 학습과 수행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고, 당면한 일은 비록 마뜩찮을 경우에도 성의를 다할 때 주디의 입장을 상상케 한다. 주디를 빛나게 하는 가장 큰 요인은 아마도 성의 있는 태도와 낙관주의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엄청난 기쁨이 아니라 소소한 것들에서 얻는 즐거움이지요. 저는 행복의 진정한 비밀을 발견했어요. 바로 현재를 사는 거예요. 과거를 영원히 후회하지도 말고, 미래만 바라보지도 말고, 바로 이 순간에서 얻을 수 있는 것들을 최대한 많이 가지는 걸 말해요.”(p.177)라는 말에서 보듯이. 일상의 편지글인 만큼 크고 작은 에피소드가 이어지는데 개성있는 두 친구이자 룸메이트이기도 한 샐리와 줄리아는 물론, 샐리의 오빠 지미와 줄리아의 삼촌인 저비스 팬들턴과의 관계 맺기는 자연스러우면서도 필요한 긴장을 제공한다.
독자는 주디를 보면서 최선을 다하는 일이 그 자체로 아름답다는 점, 선한 영향력은 애쓰지 않아도 퍼져나간다는 걸 이해하게 된다. 현상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대신 원인을 질문하고 다른 목소리를 내는 일도 마찬가지다. 소설은 일정 부분 작가 자신을 투영하고 있는 주디의 목소리를 빌려 여성 참정권이나 아동 복지, 다양한 차별의 문제를 지적한다. 가독성 높은 제루샤 에보트의 성장담 중에서도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이라면 읽고 쓰는 묘사들이다. 특히 글쓰기에 매진하는 모습이 꾸준히 그려졌으며, 선명한 목표를 가지면서도 목표에만 매몰되지 않는 주디는 은근한 도약을 이루어낸다. 주디의 성장이 마치 나의 성장처럼 이입되면서 뿌듯함이 차오를지도 모른다. 물론 키다리 아저씨의 정체를 알게 되는 마지막 하이라이트도 고전적 명장면이다. 『키다리 아저씨』는 백 년이 지났지만 연극과 뮤지컬, 영화와 애니메이션까지 만날 수 있는 선택의 폭이 넓다. 그래도 한 번 보면 절대 잊을 수 없는 작가의 삽화를 곁들여 읽는 ‘책’이 최고이지 않을까. 꼼꼼한 각주와 유익한 해설로 깊이를 더한 푸른숲 주니어 판본은 애독자라면 한 번 더 찾아볼만 할 것이다.
책 속에서>
저는 하루 종일 해가 지기를 기다려요. 해가 지면 우선 방문에 ‘방해하지 마세요.’라고 쓴 종이를 붙인답니다. 그러고는 포근한 빨간색 가운으로 갈아입고 폭신한 슬리퍼를 신은 다음, 쿠션을 잔뜩 쌓은 소파에 기대어 앉은 채 침대 옆 탁자의 등을 밝혀요. 그다음에는 책을 읽고 읽고 또 읽어요. 한 권씩으로는 모자라서, 한 번에 네 권을 쌓아 두고 동시에 읽는답니다. 지금은 테니슨의 시집과 <허영의 시장>, 키플링의 <산중야화>······.그리고 웃으시면 안 돼요. <작은 아씨들>을 읽고 있어요. 알고 보니 이 학교에서 저만 <작은 아씨들>을 안 읽었더라고요.(p.46)
정말 그래요. 세상에는 행복한 일이 참 많아요. 갈 수 있는 곳도 많고요. 자기 앞에 주어지는 것들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만 있다면요. 여기서 비밀은, 바로 유연한 태도예요.(p.153)
아름다운 풍경과 넉넉한 음식, 아늑한 침대, 원고지 뭉치, 그리고 잉크 한 병······. 세상에 뭘 더 바랄까요?(p.225)
(출판사 도서제공-서평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