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리스 레싱의 『다섯째 아이(정덕애 옮김, 민음사, 1999, 1988, 191쪽 분량)』는 꿈의 실현이 얼마나 취약한 기반 위에 있고 붕괴는 얼마나 손쓸 틈 없이 진행되는지를 보여준다. 사랑이 결혼으로, 안락한 집과 자녀로 이어지는 선순환은 타협하지 않고 추구할 만한 가치라 여겼다. 그러나 다섯째 아이는 가까운 미래, 먼 미래에 대한 계획과 꿈, 예측 가능한 삶, 그 안에서 누릴 소소하지만 빛나는 행복이라는 궤도를 끊고 이탈하게 만든다. 확신은 의심으로, 질문으로 대체된다. 내가 해리엇의 입장이었다면 어떠했을까, 데이비드의 행동은 최선인가, 벤은 위험한 인물인가, 그것은 누구의 잘못인가, 도울 방법은, 다른 선택지는 무엇일까 멈추지 않는다.
도리스 레싱은 88세로 최고령 노벨 문학상을 수상(2007년)한 영국의 작가이다. 레싱은 계급, 인종, 성별의 격차로 빚어진 인습과 폭력, 억압에 평생 저항했으며 공산당에 가입하는가 하면 아파르트헤이트 저항 운동, 반핵 운동 등 현실 정치에도 목소리를 높인 지식인이었다. 작가는 『다섯째 아이』를 두 가지 글, 유전자와 관련된 인류학자의 글과 한 어머니의 수기에서 착안하여 집필했음을 밝혔다.
데이비드와 해리엇은 ‘천생연분’(p.12)이었다. 성장 배경과 ‘영국의 계급제도라는 막강한 잣대’(p.26)를 놓고 볼 때 차이가 현격할지언정 둘은 이야기가 통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던 해리엇과 자신이 어떤 여성을 필요로 하는지 잘 알았던 데이비드의 결혼은 이상적으로 보였다. 불평등과 차이는 소통과 공감 앞에서 문제 되지 않았다. 60년대였음에도 젊은 부부는 대부분의 청춘과는 다른 가치를 추구한다. 빅토리아풍 대저택에서 다복한 가족과 함께 선물같은 일상, 고전적인 ‘옛날식 행복’(p.30)을 누리는 일에는 성탄절이나 부활절 같은 중요한 날들을 일가친척과 함께 기념하는 일도 포함된다. 부부는 “행복 그 자체”를 소유하기 원했고, 마땅히 소유해야 했는데 사랑스러운 아이들은 이 행복의 본질이자 주인공이고 축복의 대상이다.
“물질적 기반이 충분하지 않을 때 우리는 마치 심판받는 것 같다.”(p.18)고 생각하지만 부부는 부모님의 도움에 의지하고 일에 더 매진하며 계속해 나간다. 데이비드와 해리엇의 소망과 계획에 부모들은 우려의 목소리를 보태었다. 그들의 무모함과 판단착오를 직시하기 바라는 충고는 성과 없이 가라앉는다. 다락방까지 갖춘 거대한 집에는 커다란 식탁이 있고 이 식탁을 중심으로 아이들은 늘어가고 초대받은 사람들이 기뻐하는 행복의 초상을 거의 완성한다. 다섯째 아이가 태어나기 전까지.
다섯째 아이는 태어나기 전부터 지금까지의 네 아이와 달랐다. 도움을 주었던 친정엄마 도로시는 두 딸의 하인으로 남은 일생을 마칠 수 없다고 단언한다. 크리스마스 휴가에 모인 가족들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목소리를 내는데 놀림으로 시작하여 더 이상 존경심이 아닌 그 뒷면을 보이기 시작한다. 무엇보다 태내에서부터 자신을 괴롭히는 아이를 해리엇은 “원수”(p.56)라 생각하며 재움으로써 고통에서 놓여나고자 진정제를 복용한다. 의사 앞에서는 반감을 살까 싶어 “괴물”이라는 말을 속으로 삭인다.
“마침내 이 긴 맹목적 투쟁 끝에 실제로 서로 눈을 마주칠 때 그녀는 무엇을 보게 될 것인가?”(p.66) 해리엇은 다른 사람들이 보고 싶어 하지 않는 실제, 아무도 알지 못하는 실체를 두려움과 괴로움 속에서 가늠한다. 다섯째 아이, 벤이 태어나자 해리엇은 동정심과 죄책감, 두려움과 분노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홀로 싸움을 이어가는데 이는 거의 투쟁에 가깝다. 선택의 기로에 서고 책임을 추궁당하고 아이들의 천진한 소리가 사라지면서 한 명씩 떠나간 후, 돌이키기 어려운 이별을 앞두고 혼자 넓은 식탁에 앉는다.
소설을 빨리 감기 해본다면 즐거운 나의 집이 나무 식탁을 중심으로 피어났다가 사위어간 여정으로 단축할 수 있겠다. 일가족 역사의 증인 역할을 한 식탁에 초점을 맞추는 말미의 사유는 책의 가장 함축적인 장면으로 『세피아빛 초상』의 침대에 맞먹는 상징성과 비중을 차지한다. 활자는 파노라마처럼 시간을 돌린다. 책은 이상과 현실, 꿈과 욕망, 책임과 의무에 대해서, 가정 내 성 역할 갈등, 부모 세대를 향한 불만과 다음 세대에 대한 기대와 불안, 서운함 등 세대 간의 갈등까지 다양한 주제를 보여준다. 간결한 문체는 바로 다음 장면에 무시무시한 사건이 일어날 것 같은 압박감을 높이면서 동시에 인물이 겪는 어려움을 속사포로 내뱉는 듯하다. 리듬감 있는 도치문의 반복은 효과적으로 긴장을 배가시킨다.
작가는 해리엇의 목소리로 “보는 일”의 의미와 중요성을 짚는다. “벤이 태어난 이후 권위를 가진 모든 사람들이 벤을 제대로 보지 않았다······.”(p.177) 벤은 자기 자신을 어떻게 보는지, 사람들은 그를 제대로 보는 일, 그의 본질을 인식하는 일을 거부할 것인지 묻는다. 『프랑켄슈타인』에서 빅토르는 자신의 창조물에 대해 악마, 괴물이라고 칭하다가 사유하는 크리처를 “그 존재”라고 바꾸어 부른다. 하지만 끝내 이름은 지어주지 않는다.
벤은 무심하게, 어쩌면 원치 않는 숙제 하나를 끝내듯이 어머니로부터 이름을 부여받는다. 그러나 그 이름은 끝까지 낯설고 위협적인 존재이자 가해자 역할을 떨치지 못했다. 가족에 온전히 소속되지 못하고 식탁에서 따뜻한 빵을 나누지 못했던 다섯째 아이는 편견과 소외의 대상으로 불안하게 집을 나선다. 감정과 심리묘사에 저절로 빨려드는 여운 깊은 작품은 우리 곁에 남아있는 여전히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와 다양한 벤과 그들이 속한 사회를 숙고하게 한다. 후속작 『세상 속의 벤』이 궁금하다. 마냥 즐거운 독서는 아니었지만 질문하는 작품이기에 레싱의 입문작으로 추천할만하다.
책 속에서>
몸을 뒤로 기울여 희미한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없게 되자 그녀는 이 식탁이 한때는 축제와 즐거움을 위해 또한 가족의 생활을 위해 어떻게 꾸며졌던가를 상상했다. 그녀는 20년, 15년, 12년, 10년 전의 장면들, 로바트 식탁의 단계들을 재창조했다. 먼저 데이비드와 자신을, 그의 부모들과 도로시와 자신의 언니들과 함께 있는 용맹한 젊은이로서의 모습을······ 그리고 아기들이 태어나고 어린아이들이 되고······ 새 아기들······ 스무 명의 사람들, 서른 명이 이 빛나는 표면 주위에 몰려 앉고 그 표면에 반사되었고 그들은 양쪽 끝에 다른 책상을 덧대고 가대 위에 널판을 대어 넓히고······. 그녀는 식탁이 길어지고 넓어지고 얼굴들의 무리가 그 주위에 몰려 있는 것을 보았다. 항상 웃는 얼굴들. 이 꿈은 비판이나 불화를 수용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아기들······ 어린애들······ 그녀는 어린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그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러고 나서는 식탁의 넓은 광택이 어두워지는 듯이 보였고 거기에는 이방인이자 파괴자인 벤이 있었다. 그녀는 그가 갖고 있다고 확신하는 감각들을 그 안에서 일깨우기를 두려워하며 조심스레 머리를 돌렸고 의자에 앉아 있는 그를 보았다.(p.1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