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千洞好世, 얕은 책수레
  • 우리에겐 논쟁이 필요하다
  • 아리안 샤비시
  • 19,800원 (10%1,100)
  • 2024-05-22
  • : 3,582
아리안 샤비시는 쿠르드계 영국인으로, 케임브리지에서 자연 과학을 전공했습니다. 또한 천체 물리학으로 동대학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하는데요. 이후 그녀는 옥스포드 대학으로 옮겨, 물리학의 철학으로 두번째 석사 학위를 마치고, 케임브리지로 돌아와 제러미 버터필드와 휴 프라이스의 지도하에 철학 박사 학위를 취득합니다. 그녀는 2013년부터 2015년까지, 레바논 베이루트에 소재한 아메리칸 대학에서 철학 조교수로 일했고, 2015년부터 2019년까지는 잉글랜드 브라이튼에 소재한 공립 연구 대학인 서식스 의과 대학의 윤리학 강사를 거쳐, 이후 수석 강사에 이릅니다. 샤비시는 기본 윤리와 페미니스트 철학, 과학 철학, 사회적 인식론 등에 큰 관심을 갖고 있는데요. 특히, 샤비시는 도덕 철학과 페미니즘이 접목된 생명 윤리, 의료 윤리 및 이와 관련된 대학원생 지도 과정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녀의 이 책은 원제, "Arguing For A Better World"로 지난 2023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4년 5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저자의 이 책은 워키즘, 즉 '깨어있는 시민'이라는 정치적 의식과 관련된 사회 운동과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사회철학적인 분석과 오늘날 많은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소위 '구조적 불의'에 대해, 철학자로서의 비판적 의견까지 담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에게 철학은 어떤 현상이나 사건을 본질적으로 탐구하는 학문이기도 한데요. 여기에 현재 정치적인 영역에서 극단주의 우파들이 '표현의 자유'라는 타협할 수 없는 가치(여전히 헌법적 규정에서)를 앞에 내세워, 심각한 경제적 불평등 상황에 더욱 확산된 인종주의와 그런 맥락으로 점층되어 나타난 불의에 마찬가지로 철학자로서의 고민이 이 책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저는 저자가 말하는 사회 구조적 문제와 그런 양상, 그리고 그 속에서 나날이 고통 받고 있는 소수자들에 대한 연민과 얼토당토 없이 소수자들이 너무나 많은 권리를 사회에서 누리고 있다는 식으로 오도하는 그런 허위에 대한 문제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개인이 스스로의 이성으로 사회가 내포하고 있는 심각한 편견과 인종주의, 그리고 전통적 가부장제에 근거한 남녀 갈등 문제를 명확히 판단할 수 있다는 가능성은 아마도 부정할 수 없을 겁니다. 하지만 인간이 스스로 조장한 잘못된 사회적 관습을 그저 오래된 전통과 그것을 개선하는데 있어, 만연한 대립이 우려스럽다는 식으로 자신들의 이익과 권리를 다수에 기대어, 획책하는 극단주의자들의 모습은 저자가 말하는 '구조적 불의'라는 문구가 무엇을 말하는 건지 여실히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앞선 내용이 순차적으로 논의되는 글의 2장에서, "차별과 배제를 선동하는 은밀한 말"이라는 주제 의식은 근래 어느 지식인이나 학자가 쉽게 다루지 못한 주제이기도 합니다. 최근에 읽었던 수전 니먼의 글도 정치적인 측면에서 엿볼 수 있는 당면한 현실과 다소 한발 물러서 있는 듯 보이는 분석으로, 요즘 학계의 성향이 아닌가 싶기도 했습니다. 특히 2장에서 인용된, "넌 날 알잖아. 난 인종차별 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중국인들은 도무지 믿을 수가 없어"와 같은 소위 저자가 규정하는 무화과잎은 "마치 나는 평범하고 정상적인 사람이야. 그렇지만 내가 보는 다른 인종은 의구심이 들어"와 같은 아주 교묘하면서 지독한 인식이라고 느껴졌는데요. 찰스 다윈 이후로 규명된 인종에 대한 분류의 역사가 백인을 그 기준점으로 놓고, 흑인과 유색 인종으로 규정한 학문적 매개와 같은 사회적 관습이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지배적인 인식이 되어 왔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겁니다. 과거의 계몽주의자들이 불의인 것을 인지하고 있음에도 노예 제도 존치를 위해, 인간이라면 마땅히 존중 받아야 될 인간의 존엄성을 서아프리카에서 끌려온 흑인들에게 만큼은 인정하지 않은 것은 매우 유명한 일례이기도 한데요. 일전에 우연히 어떤 유튜브 방송에서 접한, 이 찰스 다윈의 이야기들이 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과학적 학문'의 한 맥락으로 명시된 것은 시간상 거의 백년이나 흐른 시점이었다는 분석은 그만큼 '정당하지 못한 사회적 관습'의 깊은 뿌리를 가히 짐작하게 합니다.
마찬가지로 이 장에서. 2017년의 영국의 한 조사는 응답자의 74퍼센트가 자신이 다른 인종에 대해 '아무런 편견도 없다'고 답한 결과를 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많은 영국 시민들 다수는 자신이 인종에 대한 편견이 없다는 것을 거의 자부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이것은 한편으로, 뒤이어 논증되는 정치적 도그휘슬 dog whistle과 관련이 있습니다. 예전에 양치기가 개들을 불러들이기 위해 사용했다는 이 도그휘슬은, 현재에 이르러서는 어떤 정치적 인식에서, 특정 계층의 주의를 불러일으키는 교묘한 장치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열심히 일하는 가정 hardworking families"과 같이 이는 보수 유권자의 마음을 얻고 싶어하는 보수 정치인이 이런 표현을 자주 써먹는다고 분석됩니다. (저자는 이 부분과 관련하여, 세간의 터무니 없는 편견처럼 평범한 백인 가정이 대체로 열심히 일하는 반면, 흑인 가정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식의 이야기는 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특히 지난 시절 로널드 레이건의 심각한 날조이기도 했던, '복지의 여왕'이 미국 내의 인종차별적인 편견 때문에 이 복지 여왕의 인종이 으레 흑인일 것이라고 추정하는 사람들, 심지어 이것을 확신하는 지식인들과 정치평론가들이 이를 더욱 조장해 왔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저자인 아리안 샤비시가 비판적으로 인식한 도그휘슬과 관련해, 누구보다 레오 스트라우스가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소위 네오콘의 대부로 인식되었던 그의 독창적인 학문적 결과물들이, 앞선 신보수주의자들이 조직적으로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간에 교묘하게 차용되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지난날 미국에선 오바마 대통령이 최초의 흑인 연방 대통령으로 당선된 이후, 미국 사회 일각에서 흑인에 대한 인종 차별은 더 이상 없다고 주장했던 '백인 남성들'이 있었습니다. 흑인 대통령의 당선이라는 상징적 사건을 통해, 미국엔 인종 차별이 종식되었다는 식의 안일한 논리를 로빈 디앤젤로 역시, 자신의 논저를 통해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미국의 백인 주류 사회가 흑인에 대한 인종 문제를 어떤 식으로 이해하고 있는지는 최근에 발생한 조지 플로이드의 사망 사건으로 극명하게 드러나기도 했는데요. "왜 흑인의 목숨만 중요하냐?"식의 논리가 BLM Black Lives Matter 운동을 본 일부 백인들에 의해 주장 되기에 이릅니다. 즉, 이는 권력 바깥에 놓여 있는 소수 흑인들에 대한 백인 인종주의자들과 극단주의자들의 터무니 없는 인식으로 사회를 사실상 분열로 내몰고 있는 상황이기도 합니다. 이에 저자는 4장에서,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와 같은 도덕적 진술은 '이것이 유일하게 중요한 문제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문제는, 특히 이러한 맥락에서 도덕적으로 문제가 된다'는 식으로 정리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개념적으로 충분한 저자의 해석은 논증에서 설득력을 얻을 수 있었는데요. 물론 사회에 여러 목소리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나 왜곡된 현실 조건과 여기에 주요 기반에 되는 인종 문제에 대한 사실적 근거 없이, 그저 흑인들이 문제라는 편견과 더 나아가 오히려 백인들이 더 차별을 받고 있다는 식의 과장된 논리는 다수의 공감을 얻기 어려운 점은 명백해 보이는데요. 더욱이 4장의 논증 가운데서, "정치인들은 종종 노동자 계급의 열악함을 빈곤보다는 백인성 whiteness이나 남성성과 연관 시키려는 의도에서 '백인 노동자 계급 사람들' 혹은 '백인 노동자 계급 남성들'을 들먹인다고 저자는 비판하고 있었는데요. 신자유주의 시대의 삶의 불안정성은 백인 노동자들이나 흑인 노동자들에게 마찬가지로 심각한 문제임에도 전자의 백인들에게 '백인성과 같은 인종적 동질성'만 부여하는 같은 엘리트들의 의도는 어처구니가 없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마치, "너희는 다른 유색인종과는 명확히 구별되는 우리와 같은 백인들이다."와 같은 발언들 말입니다. 이렇게 백인은 남들보다 좋은 것을 누릴 자격이 있다는 생각과 같은 노동자 계급이라도 백인 노동자 계급은 그 백인성이 우월하다는 식의 인식은 극단주의 정치의 득세와 맞물려, 사회를 분열로 이끌고 있기도 합니다. 이것은 최신의 정치적 트렌드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우리는 도널드 트럼프의 등장과 최근 트럼프 행정부 2기의 시작, 분명한 여성 차별적 인식과 인종주의적 시각, 그리고 백인이 아닌 다른 인종에 대한 분명한 혐오 의식을 대놓고 표출한 이런 극단적 포퓰리스트가 미국 정치의 아이콘이 된 것은 그저 계급과 정당 정치의 별다른 양태만은 아닐 겁니다. 
7장에서 소개된 바와 같이, 트럼프는 정치적 올바름에 대해 아주 직접적인 거부감을 보인 인물입니다. 그는 "이 나라의 커다란 문제가 정치적 올바름이라 생각합니다"라고 밝히기까지 했습니다. 이미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소신 발언을 하고 있는 지식인들은 물론, 최근에 일반인들까지 그것의 오용과 경직성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이에 샤비시는 그간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부정적 여파를 재생산하는 보수 우파의 목소리와 많은 담론에서, 우리는 표현의 자유와 비방 slur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정치적으로 올바른 언어'는 뒤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은연중에 사회적 화자에게 차별과 배제를 조장하는 언어의 매커니즘 자체를 자제시키는 기능도 갖고 있습니다. 저는 이번 장의 논증 가운데서, 가장 공감했던 점은 인종 차별을 포함하는 이런 비방 표현들의 위력이 충분히 모욕적이기 때문에 이것이 더 이상 환기되지 않도록 대비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중요한 분석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후반부에 정치적 올바름이 단순한 미덕 과시 virtue signaling가 아니라, 표현의 자유라는 미명하에, 온-오프라인에서 발생되는 '무차별적인 모욕 표현'을 정치적 올바름이 도덕적으로 제어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엿보고 있었습니다. 이는 혐오 금지법이 아니라, 혐오 표현 자체를 무시와 비꼬기와 같은 표현의 자유로 제어하자는 네이딘 스트로슨의 제안과는 사뭇 다른 대안이기도 했는데요. 제 개인적인 의견 역시,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무조건적인 적대와 왜곡에 대해서는 반대하는 입장을 갖고 있습니다. 이에 좀 더 첨언하자면,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7장의 논증 가운데, 특정 인종에 대한 혐오와 멸시, 아직도 팽배한 여성에 대한 도구적 시각 등은 뿌리 깊은 고정관념이라는 측면에서 단순한 언어 활동 이상의 왜곡된 이미지를 재생산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 논의된 많은 보수주의자들이 "표면적으로 정치가 자유와 개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항변"하지만 이런 이상을 겉으로 내세우며 차별과 억압을 강조하는 행태는 그리 장려 될 만한 일은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이렇게 혐오에 가까운 인종 차별적 의식, 여성을 사실상 도구로 생각하는 인식, 요즘 자주 회자되고 있는 성소수자에 대한 증오가 우리 정치의 건전성이라는 요구에 얼마나 기여하고 있는지는 거의 명백하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더욱이 민주주의 국가의 모범이라고 볼 수 있는 미국에서 이를 떠받치는 시민 계층의 심각한 분열과 건전한 토론의 파행으로 이어지는 이런 근본적 문제들에 있어, 여전히 실효적 대안이 시민 사회에 제시되지 않는다면 이 상황은 그저 '정치의 붕괴' 정도로 끝나지는 않을 겁니다.
끝으로 그동안 신자유주의가 유인한 세계는 무엇보다 세계의 최빈층에게 극심한 피해를 끼쳤고, 이러한 자본주의적 논리가 사회의 주류가 됨으로써, 누구나 사회 밑바닥으로 떨어질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이런 불평등 구조와 이것을 떠받치는 구조적 불의의 사례는 전세계에 차고 넘친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앞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 하류 계층에 속한 백인 노동자 계층이 그저 자신이 백인이라는 인종적 정체성을 제외한다면, 현실에서 삶의 온존은 백인이라는 이유 만으로 누구나 성취할 수 없는 사활적 문제가 되었습니다. 바로 이런 측면에서 실효성에 기반한 민주주의와 좀 더 환경을 개선 시킬 수 있는 정치가 필요하지만 아리안 샤비시의 논증대로 극단적 정치인의 손짓으로 말미암아 우리들은 '시민'이 아니라 흡사 춤추는 인형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미국 사회가 대를 이어온 인종주의와 여전히 조장된 남녀 문제, 특히 백인 남성에 대한 우월적인 권리와 같은 사회적 차별이 과연 무엇을 가리고 있는지는 명확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동안 공화당 정치인들이 여성의 낙태 권리를 무산시키는 과정에서 획득한 쏠쏠한 정치적 이익과 같이, 우리가 알고 있는 미국의 보수 정치는 신자유주의의 냉혹한 방향성과 함께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런 이해에서 저자가 글의 대미에 인용한 테오도어 W. 아도르노의 "잘못된 삶을 올바르게 살 수 없다"는 공언은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분명한 교훈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표현의 자유라는 명목하에 인종주의와 타인에 대한 비방을 서슴치 않고 이런 맥락의 주장들이 옹호받는 사회 자체는 은연중에 사회적 억압이 조장되는 모습으로 비화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의 언급처럼, 이 정치적으로 올바른 언어가 대다수 평범한 사람들의 보편적 도덕적 기준의 한 요소로 발휘뒬 수 있다는 가능성을 다시 한번 고심해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극단주의자들이 이 정치적 올바름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하는 그 이면의 본질을 시민들이 탐구할 필요가 있다고 여겨지는데요. 인간은 본디 자신에게 주어졌다고 믿는 (불확실해 보이기도 한) 알량한 이익에 흔들리기 마련이고, 이러한 매커니즘을 아주 본능적으로 조장하는 정치인들이 존재한다는 것도 현실에선 분명히 가능한 일입니다.    
- 8장의 '캔슬 컬처'와 관련된 논증에서 저자는 이 캔슬 컬처가 표현의 자유를 위협하는 좌파 권위주의의 한 형태로 제시된다고 평가하고 있었는데요. 이것은 단순한 거부감의 표현 정도가 아니라 사회가 얼마나 극단주의적 양상으로 흘러가고 있는지 이를 명백히 드러내는 사례라고 생각됩니다.                
             






인종차별과 성차별은 동성애 혐오, 트랜스젠더 혐오, 장애인 차별, 계급주의 등과 마찬가지로 억압 oppression의 한 형태다.
따라서 억압은 그것에 영향받는 사람들이 대체로 피할 수 없다는 뚜렷한 특징이 있다.
원할한 노동 공급을 위해서는 눈에 보이는 노동력을 충전해주는 그림자 노동이 필요하다.
균형만 잘 맞는다면, 손바닥만 한 권력과 자유라도 조금 더 누리는 사람들이 자기가 당하는 착취를 더 잘 감내하고 그만큼이라도 조금 더 누리게 해주는 체제를 옹호한다.
여성들이 거리에서 성적 괴롭힘을 당하지 않으려고 일부러 길을 돌아가는 것이 당연시되는 것만 봐도 구조적 억압의 영향은 명백하다.
사회적 정체성들이 상호작용하여 억압과 특권의 혼합물을 생산하는 방식을 지칭하는 용어가 바로 ‘교차성‘이다.
현재 미국과 영국에는 인종 간 평등은 이미 이루어졌고 대부분의 사람이 인종차별적 믿음을 버린 지 오래라는 생각이 팽배해 있다.
도널드 트럼프는 "많은 이가 말하고 있듯이......","모두가 그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내가 듣기로는......","사람들이 나에게 말해줬는데......" 같은 표현을 써서 자신의 인종차별을 불특정 다수에게 전가하는 경향이 있다.
일례로 남성의 성폭력이 그토록 쉽게 일어나는 이유는 대부분의 사회가 여성을 애초에 신뢰하지 않고 남성은 이의 제기나 책임 추궁을 좀체 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는 발언을 들은 사람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생각해봐야 한다. ‘나는 이 사회를 살아가는 흑인에 대해서, 흑인의 생명이 소중하게 여겨지는 정도에 대해서 무엇을 아는가?‘ ‘왜 하필이면 흑인의 생명을 콕 집어 말하는가?‘ 나아가‘내가 지금 모든 생명을 소중히 생각한다고 피력한다면 어떻게 여겨질까?‘
보수주의자들이 자기네가 알던 세상의 아주 작은 변화에도 흥분하고 발작하는 사례들을 보건대, 사회 정의를 지향하는 젊은이들이 지나치게 예민하다는 주장은 어불성설이다.

  • 댓글쓰기
  • 좋아요
  • 공유하기
  • 찜하기
로그인 l PC버전 l 전체 메뉴 l 나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