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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네킹님의 서재
  • 나기빈 단편집
  • 유리 나기빈
  • 11,400원 (5%600)
  • 2009-07-15
  • : 26

 가이는 정신과 의사에게 가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 자신을 치료하기로 결정했다. 무엇보다도 먼저 도대체 사랑이란 무엇인가부터 해명해야만 했다. 자신도, 삶도 잃어버릴 정도로 그렇게도 본질적이고 중요한 것이란 말인가. 기나긴 사색과 비교 후에 그에게는, 사랑을 잃어버린 후에 자신은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세계에 대한 모든 관념을 잃어버렸다는 확신이 생기게 되었다. 이제 그가 보는 집, 나무, 새, 개, 의자, 우체통, 계단, 구름, 별 등 모든 것은 고통의 감춰진 뒷맛을 함유하고 있다. 왜냐하면 가장 복잡하고, 포착하기 어려운 연상 과정을 통해서 레나에게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레나에 이르기까지 주위의 모든 것은 마치 안개에 덮여 있는 것 같고, 모든 것이 존재하지만, 그러나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사물들이 아니고, 존재들도 아닌, 사물들의 그림자이며, 존재들의 그림자이다. 레나가 있을 때는, 그 자신을 포함해서, 세계에 정주한 모든 것이 완전한 존재로 채워졌었다. 색채로, 냄새로, 소리로, 이차적, 또는 최고 의미의 명확성으로. 사랑은 사물을 자기 자신의 등급으로 끌어올린다.-219~220쪽
사랑을 잃는다면 사물은 고통의 형상으로 변화되어 버리고, 사랑이 찾아오지 않는 한, 사물은 단지 자신의 헐벗은 본질의 표시로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우울한 결론에까지 이른 그는, 레나가 있을 때 정말로 나무가-나무, 울타리가-울타리, 벤치가-벤치, 별이-별이었는지를 검토해 보기 시작했다. 그렇다, 지금 생각하기에는 그랬던 것 같다. 그러면 실제로는 어땠을까. 그는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내부에는 이미 다른 피가 흐르기 때문이다. 만약 레나가 돌아온다면, 레나 자신이, 사랑으로 가득 찬, 이전과 똑같이, 나무가 다시 나무가 되고, 울타리는 울타리, 별은 다시 별이 될 수 있을까?-220~221쪽
 가이는 완전히 해부되어 있었다. 병든 조직은 모두 성공적으로 제거되었지만, 침범 면적이 너무나 큰 것으로 드러났다. 그 속에 남겨진 것으로는 어쨌든 살 수가 없었다. 레나는 그에게서 그가 마지막으로 매달렸던 과거를 빼앗아 갔다. 이제야 그는 알았다. 이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다른 좌표 체계에서, 다른 차원에서, 심지어 다른 시간 속에서 존재했었다. 그들은 만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전에 만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과거의 공허함이 혀끝에 닿는 구리의 뒷맛처럼 느껴졌다. 가이는 침을 뱉었고, 눈 속에는 검은 작은 구멍이 생겼다. 바로 이렇게 지나온 평생으로부터 남은 것이라고는 입안에 남은 구리의 뒷맛뿐이었다.-2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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