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깃밥에 갇힌 사회
이철승, 『쌀 재난 국가』, 문학과지성사, 2021
저자는 강연 중 "선생님, 저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요?"(p.369)라는 질문을 던진 비정규직 노동자의 말이 이 책을 쓰게 된 동기가 되었다고 밝힌다. 그 좌절감에 깊이 공감했다. 나 또한 다른 강연에서 '능력주의를 강화하는 제도(시험)를 언제까지 거부하며 살 수 있을지 모르겠다. 시험을 통한 채용과 능력주의가 강화하는 상황에서 나 또한 시스템 속으로 들어가는 방법밖에는 없지 않은가"하는 푸념을 늘어놓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먹고살기 위해서는 시험의 결과에 따른 차별(차이 혹은 차등)을 받아들이고 사회에 적응하고 살아야 하지 않느냐는 스스로에 대한 질문이었다.
나도 안다. 시험을 통해 (정규직으로) 선발되는 과정을 거부하겠다는 선언은 낙오자의 변명으로 들릴 것이라는 걸 말이다. 시험을 없애야 한다는 비현실적인 주장을 하려는 것도 아니다. 다만 나의 노동이 행복으로 이어질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싶을 뿐이다. 나는 내가 정규직이 되어 안정적인 수익을 얻게 된다 하더라도, 우리 사회의 행복으로 곧장 이어지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개인의 행복이 공동체의 행복으로 이어진다기 보단, 공동체의 행복이 개인의 행복으로 이어진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우선순위를 어디에 두느냐의 차이가 있지만, 개인의 행복의 불필요성을 부정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지금 사회는 각자의 행복이 사회 전체의 부와 행복에 기여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듯하다.
우선순위를 어디에 둔다 하더라도 불행한 사회를 만들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본인과 주변 사람들이 모두 행복하고, 우리 사회가 더 나은 방향으로 발전하기를 바랄 것이 분명하다. 실제로 우리는 그런 삶을 위해 끝없이 고민하고 부지런히 삶을 꾸려나가고 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이 행복에서 점점 멀어지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는 우리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를 벼농사 체제의 협업 시스템에서 찾는다. 벼농사는 밀농사와 달리 공동체가 함께 작업하고, 수확은 개별적으로 가져가는 구조다. 다수의 표준화된 숙련 노동을 통해 효율적인 성과를 얻어낸다. 나이(경험)가 많은 사람이 주도해 마을의 벼농사를 효율적으로 관리한다. 이 과정에서 노동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이 없도록 자발적으로 감시한다. 어느 집의 누가 일을 잘하고 못하는지, 누가 아픈지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구조인 것이다. 이는 현재의 노동에도 같은 방식으로 작동한다. 연공제에 따라 더 오래 일한 사람에게 더 많은 임금을 준다. 다른 사람의 사생활에 관심을 보이고, 그가 일을 잘하는지 계속해서 신경 쓴다.
그런 방식이 지금까지는 폭발적인 속도와 효율성으로 선두 그룹을 추적하며 우리 사회의 발전을 가져왔다. 하지만 이 방식은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다. 많은 임금을 가져가는 사람들이 그만큼의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보장하지 않음에도 연공제가 정당화될 수 있었던 것은 '너희들도 시간이 지나면 이만큼의 보상을 받을 수 있다'는 암묵적인 약속을 통해서였다. 하지만 비정규직이 증가하고, 평생직장의 개념이 사라진 시대의 노동은 이러한 룰을 흔들기 시작했다. 연공에 의한 임금보다 능력에 의한 임금을 보장해달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여기서 중첩되는 문제는 시험에 통과했다는 사실 또한 능력으로 간주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같은 일을 하더라도 고생해서 정규직이 된 사람이 더 많은 임금과 복지 혜택을 받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하지만 같은 노동을 한다면 정규직과 비정규직에 상관없이 같은 임금을 받는 게 능력에 대한 정당한 보상이라 할 수 있다. 이를 인정하지 않은 채 연공제의 불합리함을 지적하는 건, 비정규직을 배제한 채 정규직의 노동조건만을 향상하려 했던 (일부) 노동조합에의 문제점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이다. 업무에 있어 시험을 통과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간의 차이가 없다면 그 시험은 업무 능력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는 방식인 것이다.
사회의 변화에 따라 사라질 수밖에 없는 노동이 존재한다. 그들이 그 일자리를 잃게 되었을 때 재교육을 통해 다른 일자리를 얻을 수 있는 시간과, 최소한의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안전망을 만들자는 것이다. 이를 위해 보편적인 복지의 확장이 필요하다. 새로운 일자리로의 진입이 어려울수록 해고에 대한 불안과 거부감은 커질 수밖에 없다. 노동시장이 유연성을 주장하려면 실업 상태에서도 최소한의 생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제도를 만드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 우리나라의 높은 자영업자 비율을 보자. 각자 알아서 잘 살면 되는 세상이라면 우리나라 자영업자는 다 잘 살아야 한다. 폐업하는 자영업자는 노력이 부족한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걸 우리는 안다.
우리는 세계적으로도 더 많이 일하고 더 힘들게 일하면서도 행복하지 못할까. 왜 본인의 노력 부족을 탓하게 되는 걸까. 처음으로 "저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요?"라는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비정규직으로 계속해서 노동하는 사람의 노력과, 정규직이 되기 위해 시험을 본 사람의 노력의 경중을 따질 수 있는가? 누가 더 노력했고, 누구의 노력이 부족했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럴 수 없음에도 왜 우리는 정규직이 되지 못한 스스로를 비판하고, 노력이 부족했다며 탓하게 되는 걸까. 그건 우리 사회가 부의 축적과 가족주의를 통해 재난을 대비했기 때문이다. 부동산과 소득을 통해 부를 축적한 사람들은 더 높은 세금을 내려는 유인이 사라진다. 복지는 점점 멀어진다. 국가는 세금을 더 걷어 재분배를 실현하는 데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의지도 능력도 없다.
이런 사회에서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당신이 노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다.라고 말해봐야 행복해지지 않는다. 아무리 스스로 내편이 되어 열심히 노력했다고 다독여봐야 주변의 시선은 정규직이 되지 못한 사람을 탓하고, 부를 축적하지 못해 사회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비난하기 때문이다. 서로를 비교하고 사랑하며 동시에 질시하고 질투하는 이 사회는 우울을 지닐 수밖에 없다. 이런 사회에서 공동의 부와 행복의 증가를 기대하는 건 순진한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를 상품화하는 데 힘을 쏟는다. 나의 가치를 올리려 힘쓴다. 능력주의로의 환원이다. 능력에 따라 보상하라. 다만 그 능력을 측정할 수 있는 방식이 합의되지 못했으며, 노동으로 인한 소득은 제자리걸음인데도 자산이 스스로 부를 축적하는 속도가 급속도로 빨라지고 있다는 게 문제다. 성별, 세대, 직무, 직급, 노동의 형태에 관계없이 모두가 공정의 화신이 되어 각자에게 불공정한 사회에 각자의 방식으로 분노한다.
오해하지 말고 들어, 다 네가 사회생활 잘하기 위해서 하는 말이야.로 시작하는 이야기를 듣곤 한다. 그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나, 그 이야기들은 결국 체제를 인정하고 수호하는 방식일 수밖에 없다. 불합리한 일이 있더라도 이 조직에 적응하고 버텨야 너도 보상을 받지 않겠냐는 것이다. 그런 방식으로는 사회가 절대 변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입사 이후에도 정기적으로 업무 능력을 평가할 수 있는 시스템이 있어야 하고, 이 차이에 따라 비정규직이 정규직보다 높은 임금을 받는 게 가능해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에 적극 동의한다. 또한 재난이 일상화된 사회에서 적극적인 복지 또한 필요하다고 본다. 하지만 이런 주장이 현실화될 수 없을 거라는 무력감은 쉬이 사라지지 않는다. 먹고살기 위해 체제의 수호자가 될 수밖에 없는 사회에서 하루를 살아가기 위해 꾸역꾸역 밥을 먹지만 공깃밥 속엔 우울이 가득하다.
* 본 리뷰는 문학과지성사의 도서지원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