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에 읽었는데 이제야 갈무리해둔다. 올해 읽은 책 중 가장 좋았다. 출근길 버스에서 읽다가 내릴 정류장에 도착하면 끊기 싫어서 회사 건물까지 걸어가면서 읽고 사무실이 있는 6층까지 계단으로 올라가면서 읽었다. 그러고 나서도 한 달 내내 마음속 한편에 이 책의 자리를 두고 있는 듯했다. 알라딘 100자평 중 "남의 일기 몇 장 읽고 그의 됨됨이나 성정을 미루어 짐작하는 것이 저의 구린 면들 중 하나이지만 이분의 일기를 읽으면 존엄한 인간이 무언지 알 것만 같아집니다."가 곧 내 마음이다. 그리고 내가 쓰고 싶은 일기 또한 이런 것이었음을 뒤늦게 깨닫는다.
노조를 설립하고, 지부장 자리를 맡기로 하고, 일기를 쓰고, 그것을 책으로 내기까지 개입된 모든 결정에 감사하게 된다.
나를 진심으로 위해서 하신 말씀이라고 믿지만 귀담아듣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지부장 임기 후에 나는 사람들에게서 버림받았다고 느낄지도 모를 일이다. 슬프다.- P36
나는 P의 제안이 타당하다고 여긴다. 하지만 동시에, 무언가 타당하다는 감각이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도 여긴다. 사울 알린스키는 "사안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일수록 당위를 논한다."라고 지적했다. 무엇이 옳은지를 말하는 것은 쉽지만 실제로 그 길을 걸어가고 그 일을 되게 하는 사람은 당위를 넘어선 결단을 내리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노동조합 지부장으로서 나는 조합원들의 노동 조건을 개선할 수도, 악화시킬 수도 있는 당사자다. 당위도 중요하지만, 전부는 아니다.- P64
아, 저렇게 생각하는구나. 하지만 당신은 저희가 미워하고 자시고 할 만한 상대가 못 됩니다, 피해 의식은 스스로 해결하세요. 못되게 말하고 싶다가 참는다. 그럴 리가요, 미워하지 않습니다. 사실이 그렇다.- P82
점점 쇠약해 가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볼 때, 성장해 가는 아이의 모습을 바라보지 못하고 지내는 부모처럼, 두 분의 소중한 시기를 놓치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더구나 나는 이 소중한 시기에 엉뚱하게 노동조합 같은 것에 마음이 팔려 있다. 불안하고 부끄럽다.- P114
협상 과정에서 나 자신이 떳떳한 위치에 있다는 느낌, 누구에게든 당당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다는 느낌이 나에게는 우월감을 준다. 하지만 현실은 그에 걸맞게 개선되지 않을 것이고, 나의 노동 가치를 깎아내리려 애쓰는 사람들을 앞으로 오래 만나게 될 것이라 이 우월감이 힘이 될지 짐이 될지 모르겠다.- P137
조직의 대표자로서 이처럼 나와 다른 입장을 묵살하고 나의 의견을 명문화하는 것에 대해 죄책감과 통쾌함을 동시에 느낀다. 죄책감을 덜기 위해서는 해당 사안에 대해 조합원 투표를 거칠 수도 있지만 나는 그러지 않기로 한다. 내가 결정을 하고, 사후에 비난을 받기로 한다.- P158
그러니 이 결과는 승리라고 선제적으로 선언하고 자축하며 서로를 칭찬하고, 아쉬운 점은 앞으로의 투쟁에 맡기며 그때의 진전을 위해 계속 단결하자고 설득해야 한다. 이번 교섭은 너무 길었고, 어느새 다음 교섭을 준비할 때다.- P200
분회장님은 유난히 환멸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한다. 환멸은 그저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꿈이나 기대가 꺾여 괴롭고 만사를 등지고 싶어지는 마음‘을 가리킨다. 노동조합 일을 하는 동안 숱하게 환멸을 느끼셨으리라. 그 마음을 어떻게 감당하고들 사시는지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P203
나는 사무실에 혼자 앉아 다시 한번 협약서를 검토한다. 조항 하나하나가 영광이기도 하고 실패이기도 해서 읽어 가는 마음이 복잡했다.- P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