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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아호 야아호 야아호오
  • 짐승일기
  • 김지승
  • 14,400원 (10%800)
  • 2022-09-06
  • : 1,109

내 이름이 붙은 문제가 제일 많긴 한데 그게 내가 해결해야 할 문제란 뜻은 아니다. 그렇게 믿고 싶을 때 타인의 문제를 잔인하게 되새긴다. 내가 그렇듯이 남도 그럴 것이다. 쟤는 혼자 너무 오래 산 게 문제일까? 죽음에 너무 천착하는 게 문제 안? 파괴적인 관계가 남긴 분노를 못 이기는 거 아냐? 자기를 지키지 못한 긴 시간이 기어코 대가를 요구하고 있는 게 문제인 듯? 어떤 물음표는 더 꾹 눌러 찍으려다 미끄러진 마침표나 다름없고 타인의 문제에 대해서는 더 자주 물음표가 이미 마침표이다.- P27
혼자일 때만 나는 수월하게 사람인 것 같다.- P58
이런 사람들이 당신 곁에 있다는 사실에. 어떤 시간은 소수의 사람들과만 건널 수 있으며 당신 역시 누군가의 소수로서 언젠가 힘을 내야 한다는 걸 모를 수 없게 되어서. 새 지도와 언어를 감사히 받아들고 소수의 힘으로 당신은 괜찮을 것이다. 오늘도 관계는 관계의 선택을 할 뿐이다.- P77
나는 내 방향으로 움직였을 뿐인데 그 결과 누군가와는 멀어지고 누군가와는 가까워진다. 너도 그랬을 것이다. 우연과 의지와 기호와 욕망이 추동하는 움직임이므로 그 멀어지고 가까워짐에 내 책임이 아예 없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관계 변화의 책임을 추궁당하면 좀 억울해진다. 그 정도로 명백한 의도는 없었다 느끼고 그게 사실일 테니까. 내가 움직이고 네가 움직여서 일어난 관계의 변화는 필연적일 뿐 책임을 물을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P108
좋아하는 마음이 관계를 지탱하는 골격이라 했을 때 그 마음이 서서히 빠져나가면서 무너져내리는 관계의 빈껍데기를 보는 건 어쨌거나 고통스러운 일이다. 여전히 너를 좋아하지만 그 마음에는 이제 힘이 없을 때. 왜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싶을 때. 아니 너무 잘 알고 있을 때. 우리는 그냥 매일 조금씩 움직이며 잃고, 매일 무언가를 잃고 마는 자신을 외면한다. - P108
매년 조금씩 더 안팎으로 성채를 공고히 쌓아두고 듣고 싶은 말만 들으며 완강해질수록 불안해지는 삶. 나를 지키는 것이 나를 가두기도 하여서, 나라고 여기는 것이 나일 수 있는 가능성을 차단하기도 해서 어쩌면 일생 쌓고 허물고 쌓고 허물고일 수밖에 없을 텐데. 내가 아무것도 아니어도 괜찮아지고 싶다. 낯선 골목에서 자아 밖으로 탈주를 시도하며 문득 내게도 돌아가고 싶은 사람이 이싸 자문한다. 돌아가도 나는 아름답지 못하겠지만. - P128
누군가와 가까워진다는 건 내가 인간이란 종의 어떤 점을 제일 못 견디는지 알게 하는 경험이다. 나는 내게 제일 불편한 존재이고, 내가 제일 싫어하는 누구도 내가 나를 싫어하는 만큼은 아니다. 그래서 어떤 미움은 쉽게 포기된다. 버겁다. 다른 사람까지 미워하는 건. 그래서 돌아올 수 있었다. 이제 나는 그를 미워하지 않는다. 다만 궁금해진다.- P144
약속이 취소되면 안심이 된다. 약속 상대를 좋아하지 않아서도 아니고(그런 경우도 있다) 외출 준비가 귀찮아서도 아니다(그럴 때도 있다). 그건 전적으로 내 문제다. 약속이 상대방의 사정으로 취소되는 순간 긴장이 풀리면서 나른해진다. 거절에 언제나 실패하는 이들이 기댈 데라고는 비자발적 ‘취소‘밖에 없으니까. 타인과는 어느 정도 긴장이 수반되기 마련이지만 그 정도가 유난히 심한 편이다. 타인 앞에서 늘 과정되어 있고 과도한 에너지를 쓰며 과사회화된다. 통화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누구와 함께든 살아 있는 동안은 그럴 것이라는 예감.- P147
예민한 기질의 사람들은 감각한 대부분을 감각 못한 척하는 데 능하다. 그걸 그냥 안다고 해야 할지 느낀다고 해야 할지 감지한다고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조금씩 다른 주파수로 내게 닿는 어떤 사실, 마음, 욕망들을 거의 외면하며 살고 있다. 나는 솔직하지 못하고 내 평생의 불안은 그 사실을 불시에 들키는 상상에 기인한다. - P162
종종 가차없는 마음이 누군가를 너무 세게 찌르지 않았을 거라고 믿고 싶다. 또…… 우리는, 나와 너는 믿고 싶은 것 안에서 오래 각자를 지켜왔다고도 믿고 싶다.- P175
오래전 본가를 떠날 때 아버지가 그랬다.
"힘들 때는 너를 잘 먹이고, 입히고, 재우는 일을 최우선으로 둴. 이제 네가 네 보호자다."
아버지의 편지에도 비슷한 글이 남아 있다. 잘 먹이고 입히고 재우고 있어요, 아버지. 내가 내 보호자라는 게 가끔 쓸쓸하지만, 뭘 잃는지도 모르면서 재차 잃어가고 있지만, 이제 잠결에 돌아누우며 웃기도 하니까요.- P198
사별은 계속계속 잃어가는 일이었다. 살아 있다면 육십대일 아버지를, 칠십대의 아버지를 지속적으로 잃게 되는 것.- P208
아니 에르노의 『한 여자』를 다시 읽다가 공포감에 휩싸여 운다. 엄마의 죽음에 대한 잠재된 공포라는 걸 한참 후에 안다. 달리 말하면 고아가 되는 공포. 모든 부모는 죽고 우리는 결국 고아가 된다. 세상의 유일한 탯줄인 엄마가 살아 있어서 내가 이렇게 혼자일 수 있는 것 같다고 한 사람에게 말하면서 처음 알게 된다. 그랬던 모양이다.- P233
혼자 살지만 고립되지 않기가 몇 년째 비혼 친구들의 화두이다. 너무 고립되어 자아상이 틀어졌거나 더는 연결하기 힘든 세계로 간 이들과의 절연 경험이 고민으로 이어져온 셈이다. 우리는 다를 수 있을까? 혼자 살면 어떤 면에서 보수성이 강화되는 지점이 있다는 얘기를 나누다가 그런 걱정 묻은 자문을 한다. 글쎄. 거의 낙관하지 않는 것도 이십 년 비혼 삶들의 특징 중 하나일까. 우리는 조금씩 우리가 이상해지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실은 그걸 아는 사람들과만 친구로 지내고 있다.- P241
비혼이라도 삶의 양상이 다르다. 친구들도 그렇다. 십 년, 이십 년 살다보면 삶의 우선순위가 바뀌기도 하고. 차이를 만드는 중요한 요소인 계급은 드러내 말하진 않지만 언제나 우리가 ‘너와 나는 다르지‘ 하고 등을 돌릴 수 있는 이유로 관계 틈에 도사리고 있다.- P242
비혼은 결혼하지 않음의 상태 외에도 어떤 세계로부터 배제되어 친구 없이, 가족 없이 혼자가 될 가능성이 높은 선택이다. 내 선택이 나에게 가장 큰 위협이 되는 삶.- P242
아플 때, 힘들 때 여자들은 곧잘 자기 저울 위에 다른 여자들을 올린다. 혹독하고 사나운 마음이 된다. - P243
핵심은 최초의 기억, 최초의 조건들을 무너뜨리라는 그 주문에 있었다. 그 자체만으로는 매혹적이었다. 나와는 사완없이 주어진 것, 내가 어쩔 수 없이 수용할 수밖에 없는 그 최초의 서사를 바꾸는 일. 그건 결국 이야기와 관련된 비유가 아닌가.- P294
신기하다. 최초로부터 이만큼, 한참 왔는데도 그 상처의 자리로 어떤 이질감 없이 이동한다는 것이. 그 자리와 비슷한 상황, 사람들의 친숙한 악의, 돌연한 두근거림이 갖춰지는 순간 주먹을 쥐는 것만도 힘에 부치는 그 시절의 아이가 된다. 번번이 그렇다. 이대로 끝나도 괜찮아.잠이 들 때에야 솔직할 수 있었던 자리로.이해하시겠죠? 하지만 동쪽이는 그 자리를 허물고 싶지 않다. 나의 불완전한 낙원은 그 자리를 뼈대로 지어졌다. 좀 거추장스럽고 불편하지만 그게 내 이야기다. 이야기 안에 자신을 기입하려는 자가 무너뜨려야 하는 건 과거가 아니라 과거를 교정하려는 지금, 주변의 억압이다. 이해해?- P2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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