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골 의사가 이상주의자는 아니다. 불평등과 슬픔으로 가득 찬 세상에 거창한 만병통치약이 없다는 것을 안다. 그런데도 의사는 지역 사회를 이해하고 환자를 이해했을 때, 그리고 힘닿는 한 이 둘을 이어주었을 때 찬란한 빛의 순간이 찾아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의사들은 이런 방식으로 환자가 맡겨둔 믿음을 활용할 수 있다.- P35
자신처럼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의사라는 직업에 대해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그런 사람들이라면 이해할 수 있는 비유일 테니까 말이다.) 의사는 모든 책꽂이에 매우 특별한 이야기들이 꽂혀 있는 아주 멋진 도서관을 뒤지는 사람이라고. 환자를 그 환자의 질병으로 축소해서 보는 행위, 가령 유선의 종양, 제 기능을 못 하는 심장 판막. 게으른 췌장 등으로 축소하는 행위는 책을 단지 종이와 잉크로 보는 태도와 같다.- P47
그 순간만큼 두 사람은 의사와 환자가 아니라 함께 겁에 질린 채 간절히 소망하는 두 여자였다.- P66
선생님은 사람들을 돌보는 행위, 그리고 의술이라는 것이 앉아서 약을 나눠주거나 배를 가르고 다시 꿰매는 입에 국한되지 않는다고 가르치셨어요. 그야말로 예술이죠. 인간이라는 존재로 사는 것에 대해 훨씬 더 폭넓은 관념을 요구하는 기술입니다. 벽에 학위증을 걸어놓고 알약이나 나눠주는 일이 아닙니다.- P94
격렬한 감정은 여전히 남아 동력이 되어주었지만 의사는 어느새 위기 상황에서 필요한 행동과 감정 사이의 간극을 이용할 줄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우연한 발견이었다. 엄마의 신중하고 침착한 상태를 즉흥적이고 직관적으로 흉내 내보았는데 효과가 있었고 일하는 데 도움이 됐기에 이후 의사는 그 능력을 갈고닦았다.- P105
하지만 이제 일과 삶을 합칠 기회가 생긴 것이다. 많은 일반의는 일부러 이렇게 살지 않는 쪽을 택한다. 자기 마을 사람들을 보살피면서 어항 속 금붕어같이 고립되어 사는 편보다 상당한 거리를 통근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경계"에 대한 우려 때문이다. 의사는 어떻게 친구이자 이웃인 동시에 의사가 될 수 있을까? 동시에 다수의 역할을 하는 것이 가능하다고는 해도 그것이 과연 바람직할까?- P116
하지만 걺은 의사에게는 그동안 갈구했던 것이기에 어딘가 뿌리내렸다는 감각을 느낄 수만 있다면 그 정도 대가는 치를 각오가 되어 있었다. 긴밀한 공동체 안에 자리를 잡을 기회였다. 그곳응ㄹ 마음의 고향으로 삼는 동시에 의미 있는 일을 할 기회였다. 게다가 젊은 의사는 직업상의 이유로도 지속성을 간절히 원했다. 환자들을 더 잘 알수록 좀 더 온정적이고 인간적인 의료 행위를 제공할 수 있고, 이를 통해 환자들을 더 효과적으로 보살필 수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P117
의사는 이 직업이 주는 보람이 무탈한 순간에만 있지는 않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일에 대한 사랑이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P122
의사는 단지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 환자는 그 서비스를 받는 사람에 그치지 않는다. 둘 사이의 관계는 거래 관계가 아니다. 의사는 그들의 일부이다.
이 또한 의사를 행복하고 온전하며, 회복력이 강한 사람으로 만들어준다.- P156
의사가 슬퍼할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골짜기 의사로 지낸 세월 동안 의사가 깨달은 것이 있다면 환자의 광범위한 삶에 어느 정도 정서적으로 공감하는 일은 피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좋은 의사가 되기 위해 필수적인 사실이다.- P167
한편 표준화된 지침에 따라 위험을 관리하는 천편일률적인 방식은 의사 개인의 판단에 우선한다. 그로써 중점은 서서히 환자에게서 질병으로, 소통에서 거래로 옮겨간다. 게다가 환자의 숫자가 치솟으면서 어떤 의사라도 일단 만나는 것이 최우선이 되고 개인적인 관계는 변두리로 밀려난다. 의료의 지속성에 대해서 말은 많지만 실제로 달성되는 경우는 훨씬 적고, 측정이 매우 까다롭기 때문에 일반의들에게 주는 특별 수당 체계에 포함되지 안흔다. 어느 잣대로 보나 의사와 환자 간의 관계는 연이은 칼질을 당하며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P187
모든 질병은 그 나름대로 잔인하다. 알츠하이머병이 잔인한 이유는 사람과 관계를 해체하기 때문이다. 마치 작은 톱처럼 인간의 영혼을 한 조각씩 잘라낸다.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가족을 돌보다가 한계에 부딪힌 남편이나 아내, 자식들에게 사람들은 환자가 그러는 게 아니라 병이 그러는 거라고 말한다. 하지만 별다른 위로가 되지 못한다. 바로 그 사실이 가족이 느끼는 상실감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P221
의사는 자신이 환자에게 제공할 수 있는 것 중 하나가 시간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알고보면 우리에게는 시간밖에 없다. 여기서 시간은 효과적으로 관리해야 하는 그런 시간이 아니다. 회의 시간을 잘 지켜야 한다고 할 때 말하는 그 시간이 아니다. 삶을 연장하고 죽음을 지연시켜 확보다흔 시간과도 다르다. 의사는 시간이 우리 인생에서 유한한 축을 구성하며 우리가 그것을 경험하는 방식이 중요하다는 깨달음을 갖고 일에 임한다. 생의 모든 순간이 동일한 무게를 가진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때로는 몇 주, 몇 달, 몇 년이 거미줄처럼 가볍게 지나간다. 하지만 고통이나 두려움, 불안 속에서는 10분도 1년처럼 무거울 수 있다. 그 순간 사람을 대하는 방식에 많은 것이 달려 있다는 사실을 의사는 안다. 의사는 무거운 시간을 맞들어 주기 위해 있다. 환자들이 다시금 가벼운 날들을 맞이할 수 있게 돕기 위해서 있다.- P265
의사와 환자 간의 관계가 단지 있으면 좋고 애틋한 어떤 것이 아니라 효과적인 의료 서비스의 핵심에 있는 것이며, 영국에서 NHS가 오래 생존하기 위해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최종적으로 입증할 증거가 필요하다.- P283
가정의학 현장에서 개인의 생리biology와 개인의 일대기biography는 서로 얽혀 있고 이에 대해서는 많은 저술이 남아 있다. 만약 이것을 정책 형성과 맞물리게 정량화, 체계화할 수 있다면 마침내 과학과 이야기는 힘을 합칠 수 있을 것이다.- P286
주어진 것과 의도한 것이 적절히 어우러졌다고 할 수도 있다. 이것이, 어떤 의미에서 본인을 행운아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대한 의사의 대답이다.- P2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