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에 참고하기 위해 펴든 책은 대개 숙제처럼 읽게 된다. 장단점, 배울 점, 반면교사로 삼을 점을 생각하느라 깊숙이 들어가기가 쉽지 않은데 이 책은 첫 페이지만 보고도 이미 알았다. 이건 자연인의 내가 나올 수밖에 없는 이야기다, 그 독서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는 참고든 뭐든 다음 단계로 나갈 수 없다.
*
보통은 책을 다 읽은 뒤 좋은 문장들을 갈무리하기 위해 그때그때 페이지를 기록해두지만, 이번에는 그러기 위해 잠깐 멈출 수도 없이 빠져들어 페이지를 넘겼다. 끝에서 두 번째 꼭지, 그러니까 <흑갱> 꼭지를 읽으며 어, 어, 어, 하던 것이 <세 번째 여행의 끝>에서 확인되었을 때는 대책 없이 울고 있었고 그제야 이 문장들을 남겨둬야 한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그것들을 옮겨 적으며 또 울고 만다.
*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까지 아름다운 이야기였고, 책과 함께한 그 시간이 이토록 소중하게 느껴지는 경험은 정말 오랜만이다. 어디서 이런 분을 알게 되었을까. 담당자가 어디든 꼭 후기를 써주시면 좋겠다.
*
이 책을 추천하기 위해서라도 누군가 요새 잘 읽은 책 없는지 물어봐주길 기다리게 된다.
온통 쌀이었다. 내 20여 년 인생에서 쌀과 관련되지 않는 건 없었다. 실험실 동료는 모두 쌀을 연구했다. 여기저기 놓인 논문, 책, 실험 기기 모두 쌀이 주인공이었다. 실험실 주변이나 밖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실험실에 속한 논과 온실과 창고와 배양기에, 벼로건 쌀로건 여러 모습으로 내 주변에 있었다. 하루 24시간, 1년 내내, 어느 때라도 나를 반겼다. 가족이나 친구보다도 훨씬 더 자주 그리고 오래 나는 쌀과 만났다.
실험실에서 쌀은 주인공이고 나는 쌀의 팬이었다.- P142
그렇다면 세 번째 여행이 무슨 소용인가. 벼를 연구하지 않는 벼 연구자의 실험실 이야기가 무슨 의미인가. 나와 달리 여전히 벼를 연구하고 있는 동료들에게 경외감을 가지고 그들의 건투를 빌면서도 속으로는 질투하고 있는 내가 벼에 대해 글을 쓰는 게 옳은가. 여행은 거기서 멈췄다.- P157
제법 긴 시간을 보낸 뒤에야 다시 글을 썼다. 고민은 글을 쓰고 일을 하며 해결됐다. 내 인생의 시간의 주인은 벼인 줄 알았는데. 바로 나였다. 새로운 분야를 배우고 연구하는 게 쉽진 않았다. 그래도 생각보단 훨씬 재미났다. 벼 실험실에서 쌓은 지식과 경험이 미생물, 동물 연구에 아이디어를 주기도 했다. 누군가에게 당장 필요한 연구를 하는, 기업이라는 곳의 속성도 잘 맞았다. 도움이 되고 싶었던 마음. 처음 실험실을 동경했을 때의 마음이다. 그제야 세 번째 여행을 다시 출발할 수 있었다.- P158
5년 만에 다시 만난 지도교수님께 현재 어떤 연구를 하고 있는지 설명할 때 다시 심란해지긴 했다. 혹시 나에게 실망하시진 않을까. 그러나 교수님은 재미나 보인다고, 내가 자랑스럽다고, 나를 격려해주셨다. 무력감에 허우적대며 울던 학생 시절의 나에게 그러셨듯이.
세 번째 여행으로 확실해졌다. 지금의 나는 대전과 수원, 이타카와 데이비스의 실험실을 거쳐 만들어졌다. 내 과거에는 힘이 있다. 그 힘으로 나는 또 다른 실험실 여행을 시작해보려 한다.- P1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