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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방의 빛
  • 에코페미니즘
  • 마리아 미스
  • 22,500원 (10%1,250)
  • 2020-02-14
  • : 1,456

제한된 지구 안에서 필요로부터의 탈출이란 있을 수 없다. 자유란 '필요의 영역'을 정복하거나 초월함으로써가 아니라 필요의 제약, 즉 자연의 제약 안에서 자유, 행복, '좋은 삶(good life)에 대한 비전을 발전시켜나가는데 초점을 맞춤으로써 찾을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비전을 자급적 관점이라 부른다. 자연을 '초월'한다는 것은 더이상 정당화될 수 없으며 대신 자연의 생존잠재력이 모든 차원과 모든 발현양태에서 가꿔지고 보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필요의 영역 내에서의 자유는 모든 이에게 보편화될 수 있지만 필요로부터의 자유는 소수에게만 돌아갈 수 있다. p58


[자본은 자본을 벌어들이기 위해 비강제적으로 욕망을 재배치하여 필요로부터의 자유를 추구하여 한계를 넘어선 파괴가 가능하게 했던 것은 아닌가? 근대서양철학은 그에 정신적 기반을 제공한 것은 아닌지? (아렌트는 필요의 영역 내에서의 자유를 책 인간의 조건에서 언급하고 있긴 하다.)

자연의 제약안에서의 자유, 좋은 삶에 관한 비전을 갖고 있던 사람들로부터 배우고, 자신의 몸이라는 제약에 맞는, 그로서 자신의 몸과 삶을 가장 사랑할 수 있는 '좋은 삶'이라는 비전을 '자급적 관점'에서 고민하려면 어떤 것들이 필요한가?]


대개의 개발담론에서 이들 욕구는 이른바 '기본욕구'(의식주 등)와 자유나 지식의 추구 같은 이른바 '고상한 욕구'로 나뉜다. 여성활동가들이 표현하듯, 에코페미니즘의 관점은 그러한 구분을 인정하지 않는다. 문화는 생계유지와 생명을 위한 그들의 투쟁에서 큰 부분이다. 그들에게 자유란 어머니 대지와의 애정어린 상호관계와 협조적인 생산활동을 뜻하며 지식은 삶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생존지식을 말한다. 부유한 북의 여성들이나 남의 부유층에 속한 여성들이 이러한 보편주의 개념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생존은 삶의 궁극적인 목표가 아니라 진부한 것으로, 당연히 주어지는 사실로 여겨진다. 생존-생명을 위한 일상의 노동의 가치, 바로 그것이 소위 '고상한' 가치라는 미명하에 침식당해온 것이다.p66


[좋은 문학의 조건은 무엇인가? 우리 존재, 우리를 둘러싼 존재를 존중하면서,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매개가 될 때 좋은 문학이라고 하지 않나? 그것이 고통스럽다고 해서 좋은 문학이 아니라 하지 않으며, 그렇다고 고통스럽기만 하면 또 그를 좋은 문학이라고 하지 않는다. 소위 '고상한'욕구 조차도, 우리 생존에 기여하고 있어야, '좋은'이라는 수식어를 붙인다는 사실은 왜 종종 잊혀지는가 싶었다. 생존은 늘 삶의 궁극적인 목표였으며, 문학의 목표도 그랬다. 생존이 목표가 아니게 될 때, 문학에 어떤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가?]


우리가 전쟁을 반대하는 것은 곧 해방을 위해 투쟁하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 핵확산과 호전적 남성문화 사이의 연관, 전쟁의 폭력과 강간의 폭력 간의 연관을 뚜렷이 알아본다. 실상 이런 것들이 여성들이 전쟁에 갖는 역사적 기억이다. 하지만 그것은 '평화시' 우리의 일상적 경험이기도 하다. 남성들 대다수가 즐기는 것 같은 전쟁이라는 무시무시한 놀이가 공격-정복-소유-통제라는 남녀관계의 전통적 경로와 동일한 단계를 거치는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대상이 땅이건 여성이건 다를 바 없는 것이다. p70


'영적'이라는 용어는 기성 종교인 기독교-유대교-이슬람교 같은 가부장적이고 일신론적인 종교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영은 여성적인 것이지만 물질세계와 분리되어 있지 않고 모든 사물과 모든 인간에 내재되어 있는 생명력으로 간주되며, 따라서 사실상 연결원리이다. 이처럼 물질적인 의미에서의 영성은 흔히 생각하는 종교라기보다는 주술에 더 가깝다. 인간이 다시금 모든 생명체를 신성한 것으로 여기고 존중할 때에만 지구상의 생명은 보존될 수 있다. 이러한 자질은 내세의 신이나 초월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에, 우리의 노동에,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에, 우리의 내재성에 있다. 그리고 때로 제례의식으로, 춤과 노래로 이 신성함을 찬양해야 한다.p72-74


이어지는 장들은 에코페미니즘을 삶의 기본욕구로부터 출발한 시각이라 보는 우리의 기본적인 견해를 담고 있으며 우리는 이를 자급적 관점이라 부른다. 우리는 여성이 남성보다 이 시각에 더 근접해 있으며, 남에서 자신들의 직접적인 생존을 위해 싸우고 노동하며 살아가는 여성들이 북의 도시 중산층 남성과 여성보다 여기에 더 근접해 있다고 본다. 하지만 모든 여성과 모든 남성들이 산업체제의 파괴에 직접 영향을 받는 육체를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모든 여성 그리고 결국에는 모든 남성 또한 이 과정을 분석하고 변화시킬 '물적 토대'를 지닌다. p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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