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곡하라! 통곡하라!" 물가에서 두꺼비가 외친다. 나는 통곡한다. 슬픔이 사랑으로 통하는 입구가 될 수 있다면 우리 모두로 하여금 우리가 부수고 있는 세상을 위해 통곡하도록 하라. 세상을 다시 온전히 사랑할 수 있도록.p524
재난에 대한 자연적 반응을 억압하는 것은 우리 시대가 앓고 있는 질병의 일부다. 이 반응을 인정하지 않으려 드는데서 위험한 분열이 생긴다. 삶의 토대에 직관적이고 정서적이고 생물학적으로 뿌리 내리지 못하고, 이와 동떨어진 정신적 계산에 몰두한다. 이런 분열 때문에 우리는 스스로의 사멸이 준비되는 것을 묵묵히 받아들인다.”p476
이런 광경이 비탄과 눈물 말고 무엇을 자아낼 수 있을까? 조애너 메이시는 우리가 지구를 위해 슬퍼하기 전에는 지구를 사랑할 수 없다고 썼다. 슬퍼하는 것은 영적 건강의 징표다. 하지만 잃어버린 풍경을 생각하며 슬퍼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대지에 손을 얹고 우리 자신을 다시 한번 온전하게 만들어야 한다. 상처 입은 세상조차도 우리를 먹여 살리고 있다. 상처 입은 세상조차도 우리를 떠받치고 우리에게 놀라움과 기쁨의 순간을 선사한다. 나는 절망이 아니라 기쁨을 선택한다. 그것은 내가 현실을 외면해서가 아니라 기쁨이야말로 대지가 매일같이 내게 주는 것이며 나는 그 선물을 돌려줘야 하기 때문이다. P478
자신의 책임이 무엇인지 묻는 것은 어쩌면 이렇게 묻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의 선물은 무엇일까? 그 선물을 어떻게 써야 할까? 옥수수 사람 이야기와 같은 이야기들은 세상을 선물로 인식하고 우리가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생각하는 지침이 된다. 진흙 사람과 나무 사람과 빛 사람에게는 감사하는 마음이 없었으며 그로부터 흘러나오는 호혜성의 감각이 결여되었다. 대지의 떠받침을 받은 사람은 옥수수 사람, 자신의 선물과 책임을 깨달아 변화된 사람뿐이었따. 감사가 우선이지만 감사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날개나 잎은 없을 지 몰라도 우리 인간에게는 말이 있다. 언어는 우리의 선물이자 책임이다. 나는 글쓰기야말로 우리가 생명 세계와 나누는 호혜적 행위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 말은 옛 이야기를 기억하는 말이요, 새로운 이야기 --과학과 정신을 다시 합쳐 우리를 옥수수로 만든 사람으로 길러내는 이야기 -- 를 만들어내는 말이다. p5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