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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지이님의 서재
  • 허구의 방황
  • 다자이 오사무
  • 15,120원 (10%840)
  • 2024-12-25
  • : 151
2023년 7월 중순, 나는 교환학생 자격으로 도쿄 미나토구에 있는 게이오기주쿠 대학 문예학과에 머물고 있었다. 여름학기 ‘일본근대문학사 세미나’에서 다나카 나오키 교수님은 늘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적인 면모에 대해 이야기하곤 했다.
그날도 별다를 것 없는 오후였다. 강의가 끝나고 연구실에서 차를 마시던 중, 교수님께서 무심히 이렇게 말씀하셨다.
“다자이의 미발표 원고가 존재할지도 몰라요.”
나는 웃으며 “농담이시죠?”라고 되물었다. 그러나 교수님은 잠시 말없이 서랍을 열더니, 오래된 봉투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빛바랜 일본제 원고지 위에는 또박또박 이렇게 쓰여 있었다.
『虚構の波(허구의 파도)』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나도 모르겠네.”
교수님은 담담하게 웃었다.

그날 밤, 나는 그 원고를 홀로 기숙사 방에서 읽었다. 몇 줄 지나지 않아, 문체의 리듬과 문장의 체취에서 이상할 만큼 다자이의 그림자가 느껴졌다. 한 문장 한 문장이 마치 그가 아직 살아 있는 듯 나를 향해 말을 걸어오는 기분이었다.
자정이 다가올 즈음, 나는 원고를 번역하며 이상한 확신에 사로잡혔다.
미흡한 느낌은 있지만, 이것은 분명 다자이의 목소리다.

이 글을 여기에 올리는 이유는 단 하나다.
진실이든 허구이든, 그가 남겼을지도 모르는 그 파도를, 누군가와 함께 느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고인이 된 작가에게 용서를 구해야만 한다.
죄송합니다. 한 번만 봐주세요.
그럼, 이만.


허구의 파도 (虚構の波)


변명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지금부터 이어지는 이야기를, 어떻게 생각할지는, 물론 각자에게, 달린 것이지만, 나를 손가락질 하며 비웃고, 뻔뻔하다며, 오해받을 생각을 하면, 그만, 몸서리가 쳐진다. 내가 고통스러워, 그런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나의 고통이 아니라, 곧, 너의 고통이 되리라. 나는, 방황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결국, 살아있기 때문이다.
때는, 5월 중순, 한낮의 햇살이, 푹푹 찌는, 여름날이었다. 나는, 도쿄에서 요코스카선을 타고, 가마쿠라에서 기차를 갈아탄 후, 이즈에 도착했다. 바닷바람에 섞인, 소금 냄새를 맡으며, 좁다란 골목길을 걷다보니, 누추한 외관의, 여관이 보였다. 금전이 풍족하지 못한 탓에, 내키지는 않았지만, 들어가 보기로 했다. 안으로 들어가보니, 마흔 정도 되어 보이는, 여주인이 나를 맞아주었다.

"안녕하세요. 묵으시러 오셨나요?"

"네, 가장 저렴한 방으로 부탁합니다.”

나는, 여관 2층으로, 안내받았다. 작은 방 안에는 다다미 4장 크기의 바닥과, 낮은 쇼지 문이 있어, 바람이 부드럽게 들어왔다. 한낮의 열기가, 방안을 가득 메우며, 내 얼굴은, 조금씩 땀방울로, 흥건해졌다. 눈이 따끔거렸다. 여름 햇살에 반짝반짝 빛이 나는, 바다의 물결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이즈로 내려오기 전, 나는 도쿄에서 부모님의 대를 이어, 가업을 이어나가고 있는, 형과 함께 살고 있었다. 얹혀사는 신세였다. 언제나 똑같은 곳, 똑같은 하루, 일생을 살아오면서, 나는 단 한 번도, 삶의 주도권을 쥐고 있다고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말도 없이, 대책도 없이, 이 곳으로 훌쩍 떠나온 것이다.

"무슨 일을 하세요?"

대뜸 방문을 연, 한 여자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너무 갑작스러워서, 호통을 칠 새도 없었다. 복장을 보아하니, 이 여관의 종업원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나와 같은 여행객인가 싶었다.

"그 쪽은 무슨 일을 하나?"

"저요? 별다른 직업은 아직 없고, 이 여관은 저희 부모님이 하시는 곳이거든요. 지금은 그냥 부모님 일을 도와드리고 있어요."

여관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손님이 들끓는 것 같지는 않았다. 어지간히, 손님이 없어 심심한 탓에, 말동무가 필요했던건가 싶어, 나는 슬그머니 내 이야기를, 조금씩, 풀어놓을까 싶었다. 어차피, 길게 볼 것 같은, 사이도 아니니까, 지금의 내 솔직한 심정을, 조금은, 털어놓아도 될 듯 싶었다.

"철딱서니 없는 손님이셨군요."

여자가, 나의 정곡을 찔렀다. 가슴에, 대못이 박히는 것 같았다. 나는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며, 나지막한 한숨을 내뱉었다.

"그럼 쉬었다 가세요."

나는 바다를 좀 더 가까이 보려, 모래사장이 있는 곳으로 내려갔다. 여름 햇살에, 뜨끈하게 달구워진, 모래자갈의 감촉이 좋았다. 파도치는 소리와 함께, 밀려오는 시원한 바닷바람에, 나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아무런 계획도 없이, 무작정 내려온 이 곳에서, 난생 처음 만난 여자한테, 내 실체가 탄로날 것이라곤, 생각조차 못했다. 다시는, 그 곳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웃옷을 훌러덩 벗어던지고, 바다로 몸을 내던졌다.

"어머, 민망해라."

바다에서 헤엄을 치다 나온 순간, 그 여자를 마주쳤다. 사람이, 지독히도 없는 모래사장이었다.

"수건이라도 가지고 올 걸 그랬나요?"

"금방 마르겠지."

구름이 잔뜩 낀 여름 하늘은, 조금씩 검은 빛깔이, 드리워져 가고 있었다.

"곧 비가 올 모양이에요."

"그럴 모양이군."

"우산이라도 가지고 올 걸 그랬나?"

나는 피식, 웃음 지었다. 머지않아, 하늘은 점점 잿빛 구름으로 뒤덮이더니, 정말로 빗방울이 미세하게 떨어지기 시작했다.

“어, 진짜 비가 오네.”

“그러게요. 얼른 숙소로 돌아가야겠어요.“

이렇게 여자와 나는, 우산도 없이, 모래사장에서 여관까지 뛰어갔다. 여자가 정말 우산이라도 챙겨왔으면, 느긋하게, 비 떨어지는 소리나 들으면서, 운치있게 바닷가 풍경도 내려다보며, 걸어올 수 있었을텐데, 하는 생각이 들자 염치도 없이, 여자가 은근히 원망스러워졌다.

”우리 서로 통성명도 하지 않았네요. 이름 정돈 서로 알아두는 게 어때요?“

”슈지라고 해. 쓰시마 슈지.“

본명을 말했다.

”저는 도모에라고 해요. 오가와 도모에.“

나는 아까부터 느낀, 여자의 관심이, 그리 달갑게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려려니할 뿐이었다. 나는 도모에라고, 자신을 소개한 여자에게, 나도 모르게 털어놓은, 속내 이후에 느꼈던, 나 자신의 한심함을 떨쳐내기 위해, 질리도록 바다 속에서 꽤나 오랫동안 수영을 했던지라, 점점 출출해지기 시작했다.

”저기, 저녁은 어떻게 되는 건가?“

”아, 저녁이요? 저녁은 나가서 사 드셔야되요. 저희는 식사까지 제공하는 여관은 아니거든요.“

곤란하다고, 생각했다. 주변 지리를, 잘 모르는 탓에, 여관에서 제공하는, 음식으로, 대충 때우고, 쉴 생각이었는데, 계획이 완전히, 어긋나게 됐다. 어떡하지. 이럴 줄 알았다면, 이 여관으로 오는 게 아닌데, 결국엔, 가난한 내 탓이라 여겼다. 돈이 없으면, 인간은, 방황하게 되는 것이라 생각했다. 나는 옷을 새로 갈아입고, 밖을 나섰다.

“저기요!”

그 여자였다.

”잠시 멈춰요! 당신이 너무 보고싶어 견딜수가 없어요. 가지마요. 여기 있어요. 요리는 제가 금방 만들어드릴께요. 아니면 저라는 요리는 어때요? 아, 미쳤나봐, 이게 아닌데. 잠시만, 이리로 오세요.“

정말 어딘가로 도망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빗줄기는 점점 거세졌고, 요릿집을 금방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는 수 없이, 나는 발걸음을 돌려, 다시 여관으로 향했다.

“안주는 아무거나 상관없으니, 일단 술부터 내와주게.”

여자는, 곧바로 술을 내왔다.

“잔이 왜 두잔이지?”

“아, 저도 함께 마시려고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안주는 금방 가져다드릴께요. 뭐가 좋으시려나? 건어물 좋아하세요? 아니면 국물 요리가 좋을까요? 오늘처럼 비가 내리는 날은 국물이 좋아요. 그럼 어묵탕을 내와드릴께요.”

꽤나 들뜬듯 보였다. 안주는 뭐든, 상관없다고 생각하며, 혼자서 술을 마셨다. 밖에서 내리는, 빗소리 덕분에, 운치가 있었다. 창문을 열어놓고, 밖을 내다보며, 멜랑꼴리한 감상에, 젖어있던 참이었다.

“문은 닫아주세요. 방바닥이 다 젖겠어요.“

”뭐 어때. 운치있고 좋기만한걸.”

“정말 철없는 도련님이 따로 없군요. 못 말리겠네 정말. 얼른 닫아요. 남들이 우릴 보는 건 싫어요.”

“우릴 본다니, 누가 우리를 본다고 그래.”

여자는 아무래도, 나와 단둘이, 달콤한 밀회를 즐기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언뜻 보니, 화장도 고친 것 같았다. 갑자기, 여자가 너무나,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바닥이 축축해지면 이따 잠자리가 불편해져요.
얼른 닫으세요.”

순간적으로, 무슨 말인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하염없이 내리는 빗소리가 운치는 커녕, 점차 난폭하게만 들려온 탓에, 급하게 문을 닫을 수 밖에 없었다. 고요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래서, 계속 정처없이 돌아다닐 생각이신가요?”

“글쎄. 여기 눌러앉아 그 쪽 기둥서방이라도 할까?“

”장난치지 말구요.“

”사실은 소설을 쓰고 있어. 슈지는 본명이고 예명이 따로 있지. 오사무라고. 다자이 오사무. 못 들어 봤나? 하긴, 들어봤을리가 없지. 유명하지 않거든. 사람들은 유명한 작가의 작품만 탐독하지, 나처럼 무명의 작가는 거들떠 보지도 않아. 다들 시가 나오야가 뭐가 그리 좋다는건지. 쳇.”

“어머, 소설가셨군요. 아까 그런 얘기는 왜 안하셨어요.”

여자의 눈이, 동그래졌다. 방이 워낙 밝기도 하고, 거리가 가까웠던지라, 동공이 확장되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무명이니까. 얘기해봤자 이름도 모를텐데 뭐하러 얘기하나. 백수라고 떠벌리는게 마음 편하지. 오히려 작가라고 으스대다가 내 이름을 말하는 순간, 상대방의 어정쩡해지는 표정보다는 처음부터 경멸당하는 표정이 좋다구.“

술을 마시다보니, 나도 모르게 취기가 올라, 점점 언성이, 높아지고 있었다. 언성이 높아질뿐만 아니라, 나의 추한 속내까지, 남김없이 토해지고 있었다. 걷잡을 수 없이, 앞으로 달려나가는, 폭주기관차 같았다.

”이왕 말이 나온 김에 다 말해야겠어. 문단의 노대가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모두 추잡한 노인네들 뿐이야. 직접 겪은 것도 아니면서 남의 이야기를 빌려와 잘도 써제끼지. 그러면서 독자들로부터 어쩜 그렇게 실제 경험처럼 잘 쓰냐고, 인간의 마음을 꿰뚫어보는 신 같다면서, 다들 칭송들을 해대는데 정말 봐줄수가 있어야 말이지. 쳇. 그런건 누가 못하나? 오히려 부끄러워 해야지. 양심이 없는거야 양심이. 진실이란 진실같은 가상속에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허구같은 현실 속에서 드러나야 되는거란 말야. 정말 다들 글러먹었어. 돈 벌 생각뿐이지. 명예에 눈이 먼 장님이나 다름없어. 처자식이 우선이야. 정말 외롭군.“

혼자서, 분통을 터뜨러가며, 계속 술을 들이켰다. 여자는, 말없이 내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럼 저와 있었던 일을 소설로 써주실 수 있나요?“

”뭐라구?“

”저를 당신 소설 속의 주인공으로 만들어줘요.“

”그 쪽하고 오늘 무슨 일이 있었지?“

”그 일이야 앞으로 만들어나가면 되죠. 당신은 허구를 진실로 둔갑시키는 것이 기만이라고 느끼는거죠? 그럼 제가 당신의 희생양이 되어드릴께요.“

그렇게 말하며, 여자는, 옷깃을 풀어헤쳤고, 가느다란 어깨선이, 조금씩 드러났다. 살결이, 정말 뽀얗다고 생각했다.

“아니, 잠깐만, 멈춰. 무슨 짓을 벌이려는지는 알겠는데 이런 식으로 가면 소설이고 나발이고 뭣도 아니에요.“

나는 급하게, 정신을 차리고선, 상황을 통제하려 했다. 여자의, 급작스런 말과 행동 때문에, 술기운이 깨는 것 같았다.

”왜 안된다는거죠?“

”지금 우리가 여기서 일을 벌인다고 생각해봐. 그건 너무 평범해. 뻔하다구. 너무 단조로워서 사람들이 시시하다고 생각할 거야. 그런류의 소설은 욕망에 잠식당한 얼간이들이나 읽는거야.“

“뭐가 평범하다는거죠? 제 마음이, 저의 순정이 평범하다는건가요? 일상의 단조로움을 특별하게 만드는게 작가의 의무 아닌가요? 당신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네요. 그러니까 무명인거지. 이 방에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당신은 앞으로 소설가로 세상에 이름을 떨칠 일은 절대 없을거에요. 뭐야, 알고보니 그냥 시시한 남자였네.”

나는, 분한 마음이 들었다. 여자의 말솜씨가, 너무 좋았던 탓에, 나도 모르게, 넘어갈 뻔 했다.

“아니, 절대 그것만은 하지 않겠어. 당신은 지금 그 얘기를 빌미로 나와 몸을 섞으려고 하는거지? 처음 본 순간부터 눈빛이 수상했어. 보아하니 이 근처에 남자라곤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것 같은데, 마침 내가 먹잇감이 된 거야. 굶주려 있었던거지. 군침을 흘렸을거야. 어떻게 저 남자를 구슬려볼까, 고심했겠지. 알고보니 정말 추악한 여자였군. 심지어 이 여관은 당신네 부모님이 운영한다고 하지 않았나? 겁나지도 않나? 정조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여자잖아. 당신은 나를 너무 우습게 봤어. 나는 유명하지 않다고는 해도 어엿한 작가라고. 소설가가 만만해보이나? 어때. 놀랐지? 들켰지? 사람들이 내 이름 따위 모른다고 해도 좋아. 나는 양심을 지킬거야.“

여자는, 잠시 아무 말 없이,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더니, 금세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정말 너무하시네요. 제 마음을 그렇게 짓밟으시다니. 제가 당신한테 그렇게 추악하게 비추어졌나요? 부모님이 근처에 있건 말건 그건 또 무슨 상관이에요. 정말 고리타분하기까지 한 남자였네. 그런 윤리 의식으로 무슨 소설을 쓰겠다고. 사람 잘못봤네요. 당신은 절대 성공할 수 없을 거에요. 그럼 이만.”

그렇게, 여자는 내게서 떠나갔고, 나는 방안에 홀로, 덩그러니 남겨졌다. 너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상황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어찌됐든 간에, 나는 술을 왕창 마셨음에도 불구하고, 정신을 간신히 붙들어 맨 채, 여자의 꾀에 넘어가지 않았다며, 스스로에게 감탄했다. 이튿날이었다. 비가 그치고, 화창하게 개인 날이었다. 날씨가 너무 좋은 탓에, 오히려 계속, 방안에 머물고 싶은, 청개구리 기질이, 발동하던 참이었다. 여자가 대뜸, 방문을 열며, 아침식사를 가지고 왔다.

“잘 주무셨나요.”

“뭐야, 식사는 제공하지 않는다 하지 않았나?”

나는 여전히, 여자를 경계하고 있었다.

“차리는 김에 그쪽 몫까지 한 것 뿐이에요. 돈은 요구하지는 않을테니까 양껏 드세요.”

어제 있었던, 불미스런 일 때문인지, 여자가 내게 베푸는 선행이, 괜히 나를, 어떻게든 꼬드길려는, 속셈처럼 보였다. 그렇지만 허기 앞에서는, 별 수 없었다. 숟가락을 들었다. 여자는, 아침상만 내게 갖다준 채, 그대로 방을 빠져나갔다. 이 또한, 고도의 심리전 같다는 생각에, 입 속으로 밥을 우겨넣으며, 혼자서 코웃음을 쳤다. 오후에는, 동네를 산책하다, 우연히, 주점을 발견하고, 그 곳에서 밤이 되도록, 술을 퍼마셨다. 고주망태가 된 채로, 나는 흐느적흐느적, 비틀대며, 거리를 걸었다. 여관 앞까지, 당도하게 됐다.

“술을 많이 마셨나봐요. 취하신 것 같은데.”

“그 쪽 걱정 따윈 필요없어. 또 날 꼬실 작정이지? 저리 비켜. 오늘 밤도 혼자 보낼꺼니까. 자상한 척 하긴.”

그때였다. 어디선가, 장지문이 스르륵,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연배가 있어 보이는, 여인이었다.

“저 사람인가?”

“어머니!”

그 여자의, 모친되는 사람같았다. 아무래도, 어르신이었기에, 그 사람에게 마저, 실례되는 말을, 지껄일 수는 없었다. 하지만 공손하게, 예의를 갖추며 한다는 말이, 도리어 실례가 되는 것 같았다.

“아, 어머니신가? 안녕하세요. 다자이, 아니 슈지. 그래, 슈지라고 합니다. 여관이 소박하긴 하지만, 오히려 그래서, 정말 좋네요. 잘 묵고 있습니다. 따님은 걱정하지 마세요. 털끝하나 건드릴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까요. 그나저나, 따님이 누굴 닮아 이렇게 곱나 싶었는데, 역시, 어머니였군요. 하하. 누가 더 고운지는, 물어보지 마세요. 그건 곤란합니다. 두 사람이, 함께 있잖아요. 도리가 있죠. 자존심 앞에서는, 아무리 자식이라 해도, 부모라 해도, 양보할 수 없는 거에요. 특히 여자라면, 더욱 그렇지. 얼굴에 주름만 져도, 난리들을 쳐대니. 그러면 문제가 너무 쉬워지는데? 아닌가? 딸국.“

다시 생각해봐도, 정말, 소름이 끼치는, 말들이었다. 확실히 술은, 죄악을 부르는 요물이지만, 당시에는 너무 취해있던지라, 정신이 없었다.

“듣던대로 재미있는 청년이네. 반가워요. 제가 괜히 두 사람 사이를 방해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 제 눈치는 보지 말고 편하게 지내다가요.”

그렇게 말하며, 여자의 어머니가 된다는 사람은, 어딘가로, 사라졌다. 오가와 도모에. 어차피 이 여자와는, 아무런 일도 없을테니, 첫인상이 어떻게 보였을지는, 크게 상관하지 않았다. 나로서는 단지, 어르신에 대한, 예우만을 갖췄을 뿐이었다. 아무리 소설가라고 해도, 현실 속에서는, 도덕을 고수할 수 밖에 없다. 그렇게 방으로 들어가는, 나를, 도모에는 다시 유혹하려는 듯, 살금살금 뒤따라왔다.

“바로 주무실건가요?”

“응. 너무 취했어. 바로 자버릴거야.”

“씻지도 않으시고 주무시면 안되죠. 많이 취하셨으면 제가 대신 씻겨드릴까요?”

“뭐야, 응큼하긴. 필요없어.”

“응큼한 건 그쪽 같은데요. 얼굴만 씻겨드리는건데. 무슨 생각을 하신거죠?”

당한건가, 싶었다. 어쩌면 도모에의 말대로, 정말, 내가 더, 응큼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본능의 유혹이란, 역시 인간이라면, 쉽게 뿌리칠 수 없는 모양이다. 취한 탓이었는지, 도모에의 뽀얀 얼굴이, 더욱 아름답게만 보였다.

“오늘 좀 예뻐보이는데?”

“갑자기 무슨 소리에요? 취해서 그런가. 어울리지 않게 헛소리를 다 하시네.”

“아니, 정말 예뻐보여. 아니, 예쁘다. 정말 예뻐. 취해서 그런 게 아니야. 오늘 같이 자버릴까? 당신도 원했잖아. 그냥 같이 자버리자.”

“슈지씨. 지금 당신은 취했어요. 취한 남자하고 자는 건 싫어. 맨정신이 아니잖아요. 그래놓고 아침에 깨면 저를 또 멀리할거죠? 내 얼굴을 보고선 경멸을 느낄게 뻔해. 그렇게 이용당하는 건 싫어요.”

“아니, 그런 게 아니야. 어차피 인간은 망상 속에 살든, 현실 속에서 살든, 그게 그거야. 우리는 취해야 돼. 그래야만 이 시궁창같은 세상 속에서, 잠시나마 해방감을 맛볼 수 있는거라고. 보들레르가 그러지 않았나? 취해라! 그래, 그거야. 그냥 나랑 같이 취해버리자. 그게 좋겠어. 진실이건 허구건 집어치우자. 그냥 취해버릴란다. 오늘 나는 당신에게 취해버릴거야. 이리와!”

그 뒤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도통 기억이 없다. 술을, 너무 많이 마신 탓이라, 여겼다. 아침이 되어, 눈을 뜨고 보니, 도모에는 내 곁에 누워 있었다. 아무래도, 일을 저질러 버린 것 같았다.

“일어났어요?”

“어? 어.. 잘잤나?”

“어색하게 왜 그래요. 역시 취한 거 였어. 제가 지금 꼴보기 싫은거죠?”

“아니야. 그게 아니야. 정말 좋았어. 너무 좋아서 어쩔 줄 모르겠는 마음 때문에 어색한 것 뿐이야. 아유, 머리가 깨질듯이 아프다. 이제는 소설 따위 쓰고 싶지 않아졌어. 당신과 함께한 밤이 너무 좋았거든. 사실 기억도 잘 안나지만, 뭐 어때? 어쩌면 이렇게 사는 게 맞는걸지도 모르겠어. 소설 따위, 때려치워야지. 당신 덕분이야.”

“무슨 소리에요 그게. 때려치겠다니. 정말 좋았으면 저를 소재 삼아 로맨틱한 소설을 한 편 써줘요.”

“아니, 나도 이젠 정말 모르겠어.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야. 그냥 이 곳을 떠나야겠어.”

그렇게 말하고, 나는, 곧바로 얼마 되지 않는, 짐을 챙기고선, 그 여관을 떠났다. 나를 붙잡으려는, 도모에의 손길 때문에, 꽤나 애를 먹었지만, 결국, 그 곳에서 간신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혹여나, 마음이 약해질까봐, 뒤도 안돌아보고, 질주했다. 무사히, 역에 도착하여, 기차를 타고나니, 홀가분한 마음이었다. 도쿄로 돌아온 나는, 형의 일을 도와가며 살고 있다. 어쩌면 앞으로, 소설을 쓸 일은, 없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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