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제목은 참 중요하다. <예술 음악과 대중음악, 그 허구적 이분법을 넘어서>. 이 제목이 아니었다면, 내가 이 책을 사거나 읽게 될 가능성은 얼마나 희박했을까. 무슨 논문 제목처럼 길긴 하지만 제목이 ‘참, 참, 참’ 마음에 들어서 샀고, 읽었다.
“어째서 특정 음악은 ‘음악’이라는 말을 독점해 쓰고 있는데, 다른 음악들은 스스로 알아서 대중음악이나 국악이라는 말을 쓰고 있는 것일까? 어떤 음악은 ‘음악’이고 어떤 음악은 ‘음악’이 아니라니. (…) 음악을 구분하는 불합리한 구분법이 한 가지 더 있다. 앞의 음악-대중음악-국악의 삼분법보다 더 이상한 모양을 한 이분법이다. 바로 예술 음악-대중음악이라는 이분법이다. 예술 음악이라니? 예술 문학, 예술 미술, 예술 무용, 이런 말들도 있던가? 예술 영화라는 말이 간혹 쓰이지만 그것은 특정한 영화 장르를 지칭하는 말이라기보다는 여러 경우에 탄력적으로 쓰일 수 있는 비평적 용어일 뿐이다. 도대체 예술 음악이란 무엇인가? 속을 들여다보면 예술 음악이란 기실 음악 대학의 학과를 점유한 음악, 제도권 교육 내의 주류 음악을 가리킨다(제도권 음악 대학에 국악과가 있으니 국악도 예술 음악인 셈이다. 믿거나 말거나다.)” (6쪽)
책 맨 앞에 ‘이 책을 쓰게 된 동기’가 나온다. 형식에서 나름 파격이다. 보통은 ‘들어가는 글’부터 나오니까. 시작부터 은근 재미난 책이다, 사람이다.
글쓴이도 말하듯 우리 사회에서 ‘음악’ 또는 ‘예술음악’ 하면 흔히 ‘클래식 음악’을 떠올리게 된다.(국악을 떠올리는 경우는 잘 없는 듯하지?) 나 또한 어느새 그러고 있는 건 아닌지. 음악을 장르로 나누는 것은 상관없겠으나 모든 음악이 예술일진데 어떤 건 예술음악, 대중음악, 또 국악 이렇게 구분하는 것은 사실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우리는 거기에 익숙해졌다. 당연하게 여긴다. 그런 당연함이 이상하지 않느냐는 물음을 이 책은 던지고 있다. 참으로 마땅한 물음표가 아닌가.
자, 그러면 예술 음악과 대중음악 사이에 그어진, 뭔가 잘못된 그 경계선을 어떻게 지울 수 있을까? 글쓴이가 내민 방법은 ‘자율음악론’과 ‘실용음악론’이라는 새로운 대안이다. 음악을 바라보는 관점과 태도의 차이에 바탕을 둔 방법으로 어떤 음악 장르도 편견 없이 적용될 수 있다고 한다. 책 안에 표까지 그려서 새로운 이분법이 어떤 내용인지 밝혀 놓았다. 표를 풀고 몇 가지만 적어 본다. 아래와 같이.
*자율음악론 : ‘진실한 음악(작품)은 무엇인가’/ 개인주의적(자유주의적)/ 음악 내적인 것을 향해 구심적/ 제의, 오락으로부터 거리 유지/ 음악 미학적
*실용음악론 : ‘삶의 의미를 풍부하게 해주는 음악(행위)는 무엇인가’/ 공동체주의적(평등주의적)/ 음악 외적인 것을 향해 원심적/ 제의, 오락과의 연속성 유지/ 음악 인류학적 (155쪽)
눈으로 스스륵 읽을 땐 그런가 보다 싶더니, 옮겨 적으며 다시금 살피니 꽤 말이 된다. 내 식대로 짧게 해석하면, 자율음악론은 음악의 본질을 탐구하는 것이고 실용음악론은 음악이 어떤 몫을 해야 하는지 고민하고 실천하자는 말인 듯.
“맞아, 이거야!” 하고 무릎까지 치기에는 좀 더 고민이 필요하겠지만 예술 음악 대중음악 어쩌고 하는 구분보다는 훨씬 낫다. 뭔가 생각할 거리가 잔뜩 묻어나는 새로운 구분. 이 책이 나온 지 10년도 더 되었던데 글쓴이는 이 새로운 음악 이론을 어떻게 넓혀 나가고 있는지 무척 알고 싶다.
“음악은 그 어떤 예술보다 감각적으로, 그리고 물질적으로 우리 삶의 환경을 둘러싸고 있다. 우리는 엄마의 뱃속에 있을 때부터 음악을 들어왔다. 어린 시절 우리는 음악을 통해 말을 배우고 생활 습관을 익혔다. 어른이 되어서도 음악적 환경에서 빠져나올 길은 없다. (…) 음악은 그렇게 우리 삶의 떼어낼 수 없는 한 부분이 되어 있다. 세상이 어떻게 변해가든 음악은 마치 공기처럼 우리의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것이다. 음악에 대한 우리의 담론이 생태론과 닮아 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가령 우리 삶에서 민요가 사라진다는 것은 때가 되면 찾아오던 철새 한 마리가 자취를 감추는 것과 같다. 음악에 대한 담론은 우리 삶을 둘러싼 이러한 음악 환경에 대한 진지한 생태론적 시선에서 출발한다.”(163쪽)
음악 담론이 생태론과 닮아 있다는 말이 눈에 쏘옥 들어온다. 음악은 공기처럼 늘 그렇게 내 곁에 있어왔지. 너무 흔해서 소중함을 잊을 때도 많지만. 그러니 음악을 좋아하느냐는 물음은 사실 쓸데없는 말이지. 공기를 좋아하느냐고 묻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그런데도 나는 자꾸 말하고만 싶으니 어쩐다? 음악을 좋아한다고. 가슴을 답답하게 하는 아스팔트 위 탁한 공기가 아니라, 마음 깊은 곳까지 맑게 해주는 산 속 깨끗한 공기를 좋아한다는 말이랑 비슷하게 여기면 그나마 말이 되려나.
““어떤 음악을 좋아하세요?”라는 물음은 ‘모 아니면 도’ 식의 위험한 물음이 된다. 같은 취향임이 확인되면 둘 사이의 동질감이 크게 늘어나지만, 취향이 다르면(특히 클래식 음악 취향과 대중 음악 취향으로 나뉘면) 둘 사이의 이질감은 수습하기 힘든 지경으로까지 깊어지기 때문이다.
일상적인 대화 속에서 사람들의 취향을 확인하는 것이 이처럼 위험을 동반한다는 사실은, 우리의 취향이 사회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화해하기 힘든 위계적 질서 속에 위치해 있다는 것을 함축한다. 물론 이 점은 취향의 사회학을 구성하는 어느 정도 일반적인 현상이지만, 음악의 경우 그 양상이 극단적인 것으로 보인다. 요컨대 음악에 관한 한 우리의 취향은 민주화되어 있지 않다. 무엇보다 서로 다른 취향 사이에 소통과 대화가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그렇다.” (29~30쪽)
그러고 보니, 어떤 음악을 좋아하느냐고 물어본 적도, 그런 물음을 받아본 적도 잘 없는 거 같다. 윗글대로라면, 위험한 물음이어서 그랬을 수 있다는 말인데. 이제라도 누군가 내게 ‘어떤 음악을 좋아하느냐’고 물으면 난 뭐라고 대답할까? 여전히 나는 흔히 ‘민중가요’라고 말하는 노래들이 가장 좋은데. 그렇게 대답하면, “그건 무슨 노랜데요?” 하고 되묻거나, ‘운동권이었나 보네’ 하는 선입견이나 주기 십상일 테고. 그러니 아마도, 머뭇거리다가 ‘그냥 이거저거 들리는 거 다 좋아해요.’ 적당히 말하고 말 것도 같다. 팝송도 재즈도 판소리도 클래식도 내 귀와 마음에 와 닿는 건 다 좋아하지만, 어설피 말했다가는 본전도 뽑지 못할 가능성, 여전히 클 테니. 물어 온 상대방이 저 가운데 어느 한 쪽에 깊숙한 관심이 있다면, 좀 더 자세히 묻고 싶어지겠지. 그러면 난 ‘좋아한다’는 말 말고는, 더 구체로 들려줄 이야기가 잘 없을 테니 말이다. 그러면서 ‘괜히 이거저거 다 좋다고 말했네’ 하면서 자괴감에 빠져들 테고.
공기처럼 늘 우리 곁에 늘 있던 음악인데, 어쩌다가 우리는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할라치면 뭔가 많이 알아야 된다고 생각하게 되었을까.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올 때, 그 음악의 제목을 선뜻 말하지 못하면 왜 저절로 부끄러운 기운에 빠져들어야만 했을까. ‘음악에 관한 우리의 취향이 민주화되어 있지 않다’는 말보다 좀 더 쉽고 자세한 설명이 있어야 할 것 같다.
“다종다양한 음악적 현상들에 대한 편견 없는 시선과 음악 공동체의 미래에 대한 폭넓은 전망, 이 두 가지는 대중적이며 민주적인 음악 담론을 만들어가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전제가 된다. 혹 음악 담론이 왜 필요한 것인지 아직도 모르겠다고 한다면, 나는 록 음악 동아리의 후배를 다시 만난 듯이 이렇게 말하고 싶다. 음악 담론은 우리 삶의 ‘낙(樂)’을 찾는 한 가지 방식이라고 말이다.” (164쪽)
다양한 음악과 음악 현상들에 대한 편견 없는 시선! 나부터 그러자고 다짐해 본다. 왠지 나부터 음악 민주주의에 걸림돌 노릇을 하고 있던 것도 같으니. 음악은, 나에게는, 살아가는 낙을 찾는 한 가지 방식을 넘어, 살아가는 까닭이자 살고 싶게 만드는 가장 큰 힘이기도 하니까. 갑자기 내 삶에서 자꾸 희미해져 가려는 음악을 되찾고 싶어졌다. 그래야 사는 낙도 되찾을 수 있을 것만 같다. 여러 모로 잘 만난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