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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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님의 서재
  • 레지스탕스
  • 이우
  • 17,100원 (10%950)
  • 2024-08-13
  • : 760

처음 저자의 이름에서 조선의 왕자를 생각했다. 본명일까?

좀 놀라운 건 이 책이 이번에 처음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지난 2018년에 초판이 나왔고, 지금까지 3쇄가 나왔다. 조금 더 놀라운 건, 그렇게 쇄를 거듭할 때마다 다듬고 살을 붙여 개정판을 냈다는 것. 물론 쇄를 거듭하는 책들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리커버로는 나와도 여간해서 개정판을 내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미 작가의 손을 떠난 책에 애정이 남아 있을까? 책을 쓸 때 별의별 고생을 다해 썼다면 다시 쳐다보고 싶지 않을 것 같다. 설혹 어느 날 문득 자신의 책을 보고 대대적으로 손을 보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힐 수도 있겠지만, 예전에 개고생했던 것을 생각하면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을 것 같다. 개정판을 냈다고 책이 잘 팔릴 거란 보장도 못 하고. 그러니 애써 외면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는 쇄를 거듭할 때마다 그 수고로움을 기꺼이 감수하고, 지금까지 세 번의 작가의 말을 썼다. (모르긴 해도 근성 있는 작가인 것 같다.)


그런데 정말 놀라운 건, 이 작품이 지난 초판이 나온 이래 서서히 알려지기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어느 누구의 문학 권력자 내지는 유수한 문학상을 주관하는 어느 출판사나 기관으로부터 아무런 주목도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니 이렇게 빼어나고 훌륭한 작품이 어떻게 그들의 눈에 띄지 않을 수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나라는 신인문학상을 비롯한 여타의 문학상은 출판된 지 1년 안의 작품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 줄로 안다. 그것도 장편이 아닌 단편에. 그것이 맞는다면 이 작품이 무슨 무슨 문학상을 받을 일은 과거에도 없지만 앞으로도 없을 것 같다. 나는 이 사실을 알았을 때 안타까운 마음이 컸다. 하지만 반면 뭔가 모를 쾌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이 작품은 소위 말하는 제도권을 벗어나 성공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 이 얼마나 레지스탕스적 아닌가?


세상의 모든 작가들 대부분은 문청의 시절을 지난다. 그도 그럴 것이 문학에 대한 관심과 열망은 보통은 그 시기 전후로 갖게 되니까. 그러므로 대부분의 작가들은 이름하여 성장 문학 한 둘은 쓰기 마련이다. 이 작품의 저자도 예외는 아니다.


그런데 젊은 날에 젊음을 모른다고 노래했던 지금은 중년이 되어버린 어느 가수의 노래처럼, 젊었을 때 나는 막상 이런 장르의 작품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동의할지 모르지만, 이런 작품은 하나같이 우울한 방황과 허무, 섹스, 일탈 뭐 이런 것들로 대표되기도 하니까. 내 삶 자체가 꿀꿀하고 허무한데 굳이 이런 책을 읽어 더 꿀꿀하게 만들 필요가 있겠는가. 성장 문학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데미안'도 나는 지금까지 두 번쯤 읽었지만 왜 이 작품에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머리를 조아리는 것인지 잘 이해하지 못했다. 물론 수긍은 할 수 있지만 강한 이펙트 같은 건 없지 않나.


이 작품 역시 '데미안'의 그림자가 짙다. 실제로 '데미안'을 다시 한번 읽어보고 싶기도 했다. 좁은 소견이지만 이문열의 일련의 작품도 생각이 났다. (이를테면 '젊은 날의 초상'이나 '사람의 아들' 같은.) 하긴 이쪽 장르의 작품들은 데미안의 사생아들 아닌가. 그러니 이 작품을 젊었을 때 읽었다면 비웃었을지 모른다. 왜 그 시절엔 조금만 뭐가 보여도 모방이니, 아류니 하면서 아는 척 조소하기 좋아하지 않는가. 문학의 'ㅁ'도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머리만 커져 모든 게 시큰둥하고 만만하게 보였던 게지. 마치 이 작품의 화자 기윤처럼.


그런데 이 나이 되어 이 작품을 읽으니 오히려 좋았다. 작가가 철학과 역사와 문학을 기반으로 얼마나 심혈을 기울여 작품을 썼을지 알 것 같다. 이 작품의 밑 작업만 4년이 걸렸다니 알만하지 않은가. 그런 의미에서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난 이 작품을 다 읽었을 때 뭔가 모를 허전함과 숙연함마저 느꼈다. 왜 가끔 좋은 작품을 읽으면 이 작품 이후에 무슨 책을 읽을지 막막함이 느껴질 때가 있지 않은가. 그건 여간해서 잘 체험되지 않는데 아주 오랜만에 그런 느낌을 갖기도 했다. 바꿔 말하면, 난 어쩌면 이 작품 이후에 다른 책들이 나의 의식에 틈입해 오는 것을 쉽게 허락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단 생각도 든다.


문장이 좋다. 그렇다고 뼈를 때리고, 가슴을 후비는 뭐 그런 문장이어서 좋았다는 게 아니다. 그런 문장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뭔가 쉽게 잊히면 안 될 것 같은 문장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밑줄이라도 거야 할 것 같은데 그러면 어디서 멈춰야 할지 모르겠다. 한마디로 따라 해 보고 싶은 문장이었다. 그리고 인물이다. 공감이 간다.


사춘기가 되면 부모나 형제보단 친구가 더 중요해진다. 특히 상급학교 진학을 두고 부모와 갈등을 겪으면 더 그렇다. 부모는 가급적 자식이 배경이 되어줄 만한 학교를 진학해 주길 바라지만 기윤은 그런 것에 관심이 없다. 철이 없어서 이 세상이 학연, 지연 등으로 엮여져 있다는 걸 모르거나 알려고 하지 않는다. 더구나 대입도 아니고 고입을 재수한다고? 그건 기윤에겐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지방의 이류쯤 되는 학교에 지원해 다니게 된다. 어떤 학교가 되든 어차피 한 시절 대충 때우다 가는 곳이다.


하지만 학교가 그렇게 만만한 곳이 아니라는 걸 곧 알게 된다. 흔히 일진이란 불리는 불량서클에 발을 들여놓은 건 새로운 경험이었다. 거기서 일진의 수장인 상민와 친해진 건 따분한 학교생활에 활력이 되고 권력에 눈을 뜨는 계기가 된다. 하지만 이를 경계하게 만드는 건 이인자인 관석이다. 그는 알게 모르게 기윤이 상민과 친해지는 것을 방해한다. 상민은 이런 권력의 역학을 적절히 활용할 줄 아는 영리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러다 결국 기윤이 일진에서 떨려 나가는 사건을 맞이하는데, 그건 어처구니없게도 상민이 보다 좋은 신발을 신었다는 것에서 발생한다. 한마디로 기윤은 거기에도 엄연한 질서와 조직이 있다는 걸 인식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즈음 <데미안>에서 화자인 싱클레어가 데미안을 소개를 하듯, 기윤은 민재를 소개한다. 민재는 기윤이 다니는 고등학교에 전학생으로 오면서 이들의 만남은 시작된다. 하지만 기윤에게 민재는 처음부터 그다지 좋은 인상은 아니었다. 부잣집 도련님에, 공부도 잘하고, 모범생인 한마디로 재수 없는 타입이었다. (사춘기는 열등감을 이런 식으로 표출할 줄 아는 탁월한 시기이도 하다.)


그런데 그렇게 잘나가는 아이가 왜 이런 지방 소도시 그것도 일류도 아닌 이류 학교에 전학을 왔을까? 특이한 건, 민재는 특별히 친구를 사귀려고도 하지 않는다는 것. 늘 책을 가까이하며 홀로의 자유를 고독과 맞바꾼 아이였다. 민재와 가까워지게 된 건, 기윤이 상민이 패거리에서 쫓겨나자 점심시간이면 급식실에서 만나는 것이 불편해서다. 상민을 피해 도서실에 가면 늘 민재는 혼자 책을 읽고 있다.


그렇게 가까워진 민재는 알면 알수록 새로웠고 여느 아이와 달랐다. 이미 그 나이에 깊은 사랑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고 있었고, 독서 편력을 쌓기도 했다. 덕분에 기윤은 덩달아 책을 읽고 민재와 가까워지게 된다.


사실 민재를 가장 적확하게 보여준 사건이 몇 개가 있는데, 하나는 학교에 학생과 교사 간의 어떤 소요 사태가 일어났을 때 그가 보여준 행동이었다. 그럴 경우 일반 아이들이라면 세를 결집해서 데모를 하거나 업무를 마비시키고, 고작 기물을 파손하는 정도겠지만 그것이 자신에게 결코 유리하지 않다는 건 그들 자신이 잘 알고 있다. 그때 민재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방법으로 학생들 편에 서는데 이른바 프랑스 대혁명 때를 모방하여 학교 측에 몇 개의 반박문을 써서 대자보를 붙이는 대담함을 보인다. 그것이 레지스탕스를 연상케 해 한동안 회자가 되기도 한다.


또 하나는, 그는 문학을 사랑해 시인이 되기를 바랐지만 좌절하고 부모가 바라는 대로 의대에 어렵지 않게 합격한다. 하지만 부모가 바라는 자신은 거기 까지라며 등록을 하지 않은 채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 몸을 실을 계획을 세운다. 그는 떠나기 전 기윤에게 선물처럼 자신이 타던 오토바이와 쓴 많은 시중 100편을 추려 기윤에게 맡긴다. 너무 큰 선물을 받은 것 같아 어리둥절하고 있는데 시에 큰 제목이 없다. 나중에 혹시 시집을 낸다면 제목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없는 것이다.


그렇게 기윤이 민재가 잘 떠나려니 했는데 뜻밖에도 여행을 떠나기로 한 날 민재는 불의의 교통사고로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만다. 슬펐지만 기윤은 민재의 장례가 끝난 후 그를 위해 시집을 출판하기로 한다. 결국 이 책의 제목 레지스탕스는 민재의 시집의 제목인 동시에 그 자신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 책을 다 읽었을 때 나는 한동안 기운이 빠지는 느낌을 받았다. 기윤에게 그토록 울림을 줬던 민재가 이렇게 허무하게 죽는 것으로 끝이 난다고? 아무리 소설이라지만 충격적이면서 동시에 허망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난 이내 그를 인정하기로 했다. 민재는 민재로서 민재답게 살다 갔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서 스무 살도 채 살지 않은 민재에게 함부로 연민을 갖는 건 오히려 그를 욕되게 하는 거란 생각이 들었다. 삶이란 얼마나 오래 살았는가보단 얼마나 자기답게 값지게 살았냐가 아닌가. 그는 짧은 생애를 사는 동안 자신이 해 볼 수 있는 것은 다 해 봤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희곡도 써서 자신의 작품이 무대에 올려지는 과정을 지켜보기도 했다.) 그래서 신은 그렇게 민재를 일찍 데려갔나 보다. 결국 신도 인정한 삶 아닌가.


그런데 이 책은 기윤이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10년이 지나 동창회에 참석했다 우연히 잊고 있었던 민재를 회상하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다. 물론 작가의 그런 설정에 이의를 제기하지는 않겠지만, 나라면 민재 같은 친구는 결코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나보다 몇 보는 앞서 가 삶이란 이런 것이라고 말해 주는 친구를 어떻게 잊을 수 있단 말인가. 무엇보다 외톨이가 될 위기에서 자신의 빈자리를 채워준 친구다. 그런데 기윤은 지난 10년 동안 민재를 잊고 남과 다르지 않는 삶을 살았다는 걸 그때야 비로소 자각했던 것이다. 왜 그런 설정이 필요했을까?


우리의 삶은 기윤과 얼마나 다른가? 나이 들수록 몇 살에 죽더라도 사는 동안 아프지 말고 살았으면 좋겠다는 게 대부분의 바람 아닌가? 우리도 기윤이 같이 느끼고 생각하며 나이 들지 않았나? 상민이의 세계를 누구는 동경하기도 하고 누구는 비판하기도 하지만, 우린 어느덧 남들만큼 살자는 게 삶의 모토가 되어 살아오지 않았는가? 그렇게 살지 않으면 이상한 사람이 되고, 뒤처지고 소외당하는 걸 못 견뎌하지 않았는가? 우린 그런 삶에 마땅히 저항할 필요가 있는데도 오히려 끌어안고 살고 있다. 기윤이 민재를 떠올리는 순간 가슴을 쥐어짜듯 괴로워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하는 건 어쩌면 독자에게도 기윤이처럼 깨어날 시간이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더불어 소설은 어때야 하는가를 생각해 본다. 여러 의견이 많을 수 있겠지. 그것은 옳고 그름으로 얘기되어 지지 않는다. 이런 소설이 있는가 하면, 저런 소설이 있다. 한동안 치유와 위로를 주는 소설이 유행이었고, 지금도 여전히 강세다. 하지만 역시 궁극의 소설은 이렇게 잠자고 있는 영혼을 흔들어 깨우고, 당신은 지금 잘 살고 있느냐고 물어봐 주는 소설이 정말 좋은 소설 아닐까?


이우 작가는 이 책에서 그런 말을 한다. 소설가는 발표한 작품과 무관하게, 처음 문학도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을 때의 순수함으로 사유하고, 탐구하고, 집필하는 존재라고. 작품을 출간해서 소설가가 아니라, 문학에 헌신하여 살아가고 있기에 소설가라고 했다.


올해도 어느덧 한 달여 밖에 남지 않았다. 올해가 마감될 때까지 몇 권의 책을 더 읽을 수 있을까? 작년엔 천명관의 발견이 좋았는데, 올해는 이 책이다 싶다. 나중에 다시 읽어보고 싶은 책이 될 것 같다. 또한 작가의 다른 작품도 읽어봐야겠다.

남은 한 달도 잘 마무리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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