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독립운동은 암기였다. 독립 운동은 비슷한 이름들을 외어야 했던 근현대사 한 대목이 떠오르게 하는 단어다. 지청천, 홍범도, 김좌진, 이동휘 등등. 조선혁명군, 조선혁명당, 한국 광복군, 대한 독립군 등등. 물론 따지자면 안중근은 언급한 운동가들과 달리 1910년 이전 운동가이고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이유는 동양평화에 적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지, 일본 제국주의를 없애려는 시도는 아니기에 좀 다르다고 보지만 어쨌든 영화 〈하얼빈〉을 보았다.
영화를 보며 김연수의 《밤은 노래한다》도 떠올랐다. 시대는 많이 다르지만 1930년대 북간도 풍경과 민간인 학살을 그린 소설인데 마적과 연길 그리고 만주의 분위기가 느껴지는 소설이기 때문이다. 소설도 영화도 역시 드라마인데 나는 친일 행위나 반역 행위도 생각해보았다. 누구나 그러면 안 된다는 건 알지만 내 몸에 고통스러움을 면할 방법이 협조라면 나였다면 몸의 고통을 면하고 싶어 하지 않았을까? 영화 〈남한산성〉에서도 〈하얼빈〉의 감독 우민호의 전작 〈남산의 부장들〉에서도 느낀 바지만 인물에게 실존은 정말 중요한 문제다. 단순히 부역자, 협조자, 협력자라고 비난할 수만은 없는 생존의 길이 있고 타인은 그 삶의 길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고 쓰면 너무 부역자 논리일까.
실존적으로 개인이 저항하는 일은 숭고한 행위이나 실제로 독립과 자주 국가 형성에 얼마나 영향을 미쳤지는 본인도 모른다. 모르면서 했다. 그간 조선 독립에 애쓴 무수한 인물들과 무명인의 죽음이 있어 우리는 민주국가를 만들 수 있었다고 여전히 생각한다. 다만 나는 결과라는 미래를 알 수 없는 사람들은 당시 어떤 마음이었지 궁금했다. 2024년 겨울, 여의도와 남태령에 나와 응원봉을 흔드는 사람들은 어떤 결과를 만들어 냈는가. 이 결과는 또 어떤 결과를 불러올 것인가. 나는 여전히 가늠할 수 없다. 자신들도 모를테다.자신의 인식이 바뀌었고 사람들이 인식이 바뀌었다고 말하는 것 이상은 나는 아직 모른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미래는 모르지만 그 미래라고 생각하는 모습을 미리 상상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점이고 이 사람들의 행동을 성공과 실패로는 판단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리고 행동을 하는 사람과 그 주변에 맥락은 여전히 넓고 깊다는 것만 어느정도 이해할 수 있다.
이 영화의 제목이 영웅이 아니라 좋았다. 나는 영웅 서사를 좋아하지 않는데 안중근의 행위는 영웅이라서 기억되어야 하는 게 아니라 신념에 따라 저항권을 사용한 시민이라 기억해야 한다고 본다. 위대한 인물이 아니라 고민점을 남기는 인물이라는 의미에서 기억하고 싶다. 독립 운동가들은 춥고 주렸을 것이다. 개죽음은 일상이고 고통 속에서 살았을 것이다. 그들에게 나라란 무엇이었을까? 나는 지금도 내게 나라가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한다. 이 빌어먹을 국가. 제대로된 통치차 한 번 뽑기 어려운 나라로만 생각한다. 〈하얼빈〉은 이런 나의 안전함과 다른 맥락에서 나라를 위한다는 사람들의 마음을 조금은 가늠해볼 수 있게 하는 영화였다. 안중근이 그토록 믿었던 동양평화는 아직도 요원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