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는 시간이 없었다. 병원에서는 10여 년 정도 시력이 남아있을 거라고 진단했다. 나는 마음이 급해졌다. 손에 닿는 대로 책을 꺼내 활자를 눈에 담았다. 당시 나는 무지했다.
책은 눈으로만 읽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세계문학전집을 모두 읽고 싶었다.그래야만 내 현실을 견딜 수가 있었다
p16
열다섯 살의 내가 가장 두려웠던 사실은 앞으로 세상을 못 볼 거라는 선고보다 당장
이 사실을 어떻게 엄마에게 말해야 할지였다
며칠을 끙끙 앓다가 엄마에게 몽땅 털어놓았을 때 엄마는 질 나쁜 농담을 들은 것처럼 믿지 않으려 했다. 엄마를 대동해 다른 병원에 가서 처음부터 검사를 다시 했다. 결과는 같았다. 엄마는 나보다 더 절망에 빠졌다. 내 담담한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내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너는 뭐가 이렇게 아무렇지 않아! 이 철딱서니야! 너 이제 장님 된다잖아!” p 22
극복‘이라는 말처럼 오만한 단어가 있을까?
장애를 극복하고, 가난을 극복하고, 불합리한 사회를 극복했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생각한다. 나는 영원히 내 장애를 극복하지 못할 거라고. 나는 단지 자주 내 장애를 잊고 산다. 잊어야지만 살 수가 있다. 그래서 누구보다 빨리 체념한다. 그것이 나를 지키는 방법이다
각자의 삶에서 ‘참 지랄맞다‘ 싶은 날들이 존재한다. 삶을 버티고 나아가는 모두에게
이 지랄맞음이 쌓여 축제가 되는 날이 오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