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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lmate님의 서재
언론인 손석희는 서른여덟이 되는 해에 책을 한 권 썼다. 1993년 가을이었다

언론. 정의. 그리고 손석희에 끌렸던 30년 전의 나는 [풀종다리의 노래] 를 구입했고 버리기 좋아하는 나는 절판된 이 책을 지금도 가지고 있다. 칭찬한다


방송 시작 삼분 전, 스튜디오의 내 자리에 앉아 주머니 속의 리본을 만지작거리는 사이 뉴스 타이틀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광고 방송 몇 개가 나가고 나면 내 얼굴이 잡힐 것이다. 적어도 문화방송의 모든 사람들이 그 시간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다. 그 순간 나는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순간 나는 리본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내가 기억하는 한 최대의 수치스럽고 기회주의적인 행동을 저지르고 말았다. 나는 그 리본을 양복 깃에 달지 않고 옷 안쪽 와이셔츠 주머니 위에 달았던 것이다. 나는 뉴스를 시작하는 게 아니라 내 자신과의 싸움을 시작하고 있었다. 그것은 참으로 괴로운 자기합리화의 싸움이었다. 화면 밖의 사람들은 모두가 내게 손가락질을 하는 것 같았고 나는 붉어지는 내 얼굴을 느낄수록 더한 당혹감에 빠졌다. 뉴스시간 내내 양복 깃에 가려 반쯤 보일락 말락했던 리본은 그대로 썩어빠진 내 양심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었다

그날 밤 나는 거의 한 잠도 이루지 못하였다 아마도 그 때까지의 내 삶에 있어서 그날 밤만큼 괴로웠던 적은 없었을 것이었다

- p179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리본

서른을 넘긴 나이에 아내와 아이가 있는 직장인. 그가 거기에서 번뇌를 멈췄다면 지금의 손석희 앵커는 없었을 것이다.
그는 다음 방송에서 리본을 바로 달고 나왔다
인간 손석희가 언론인 손석희로 거듭나는
순간 이었다


수의를 입고도 웃던 환한 모습. 4.16 세월호 침몰 사건때 팽목항을 지키던 모습. 단원고 아버지와 전화 연결하려는데 따님이 시신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비통해하며 울음을 참는 모습. 앵커 브리핑 ‘L의 운동화‘를 읽던 모습. 동갑내기 노회찬을 추모하며 목이 메던 모습... 내 기억속의 손석희 앵커다


그가 생각하는 ‘좋은 방송’이 얼마만큼 이뤄진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그가 ‘좋은 방송’을 위해 노력하는 동안, 우리는 주류 언론 속에서 양심을 거스르지 않고, 대중의 신뢰와 지지를 받으며 성공까지 한 언론인을 얻었다. 손석희가 정말로 해낸 변화는, 우리 사회를 그런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을 수 있는 곳으로 바꿔 놨다는데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사회가 더 많은 손석희를 가질 수 있느냐는 것은 지금부터 우리의 몫일 것이다


손석희 앵커와 한 시대를 살았다는 것에 감사하고 그의 진실된 뉴스를 들으며 같이 슬퍼하고 분노하고 웃었던 시절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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