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들아. 이 세상에 네가 없다니 그게 정말이냐. 창창한 나이에 죽임을 당하는 건 가장 잔인한 최악의 벌이거늘 그 애가 무슨 죄가 있다고 그런 벌을 받는단 말인가.
이 어미에게 죽음보다 무서운 벌을 주는데 이용하려고 그 아이를 그토록 준수하고 사랑 깊은 아이로 점지 하셨더란 말인가.
하느님이란 그럴 수도 있는 분인가. 사랑 그 자체라는 하느님이 그것밖에 안 되는 분이라니. 차라리 없는 게 낫다. 아니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내 아들은 지금 어떤 모습으로 땅속에 누워 있는 것일까? 내 아들이 어두운 땅속에 누워 있다는 걸 내가 믿어야 한다니. 발작적인 설움이 복받쳤다. 나는 내 정신이 미치기 직전까지 곧장 돌진해 들어갔다가 어떤 강인한 저지선에 부딪혀 몸부림치는 걸 여실하게 느낀다. 그 저지선을 느낄 수 없어야 미칠 수 있는 건데 그게 안된다. 인간의 삶과 죽음을 관장하는 초월적인 존재가 정말 있다면 내 아들의 생명도 내가 봉숭아를 뽑았듯이 실수도 못되는 순간적인 호기심으로 장난처럼 거두어간 게 아니었을까? 하느님 당신의 장난이 인간에겐 얼마나 무서운 운명의 손길이 된다는 걸 왜 모르십니까. 당신의 거룩한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을 이렇게 막가지고 장난을 쳐도 되는 겁니까. 주여, 그렇게 하찮은 존재에다 왜 이렇게 진한 사랑을 불어 넣으셨습니까.
내 아들이 죽었는데도 기차가 달리고 계절이 바뀌고 아이들이 유치원을 가려고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까지는 참아주었지만 88올림픽이 그대로 열린다는 것은 도저히 참을 수 없을 것 같다. 내 자식이 죽었는데도 고을마다 성화가 도착했다고 잔치를 벌이고 춤들을 추는 것을 어찌 견디랴.
아아 내가 독재자라면 1988년 내내 아무도 웃지 못하게 하련만. 미친년 같은 생각을 열정적으로 해본다.
나는 신이 생사를 관장하는 방법에 도저히 동의할 수가 없고, 특히 그 종잡을 수 없음과 순서 없음에 대해선 아무리 분노하고 비웃어도 성이 차지 않지만 또한 그런고로 그분을 덧들이고 싶지 않았다.
문득 내가 아들 대신 딸 중의 하나를 잃었더라면 이보다는 조금 덜 애통하고,
덜 억울했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처음 해보는 생각이었다. 그런 생각이 떠오른 것 자체가 두려워 나는 황급히 성호를 그었다. 행여 또 그런 생각이 떠오를까봐 속으로 주모경을 외웠다. 그래도 두려워 화장실에 가서 울며 용서를 비는 기도를 했다. 오랜만에 해보는 기도였다. 그래도 두려움과 가슴의 울렁거림은 가라앉지 않았다.
내가 만약 ‘왜 하필 내 아들을 데려갔을까?‘ 라는 집요한 질문과 원한을 ‘내 아들이라고 해서 데려가지 말란 법이 어디있나‘로 고쳐먹을 수만 있다면, 아아 그럴 수만 있다면. 구원의 실마리가 바로 거기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이에 대해 과연 무엇을 알고 있다고 할 수 있는가?
아들이 인턴 과정을 끝마치고 전문의는 무슨 과를 택 할까 의논해왔을 때 생각이 났다.
그애는 나만 반대하지 않는다면 마취과를 하고 싶다고 했다. 뜻밖이었다. 나는 아들로 인하여 자랑스럽고 우쭐해하는 데 익숙해 져 있었다. 누가 시키거나 애써서가 아니라 그애 스스로가 선택한 학교나 학과가 에미의 자긍심을 충분히 채워주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으레 그러려니 했다. 내 무지의 탓도 있었지만 마취과는 어째 내 허영심에 흡족치가 못했다. 나는 왜 하필 마취과냐고 물었다. 그애는 그 과의 중요성을 자세히 설명했다. 그때 아들의 대답은 이러했다. ˝어머니, 마취과 의사는 주로 수술장에서 환자의 의식과 감각이 없는 동안 환자의 생명줄을 쥐고 있다가 무사히 수술이 끝나고 의식이 돌아오면 별볼일이 없어지기 때문에 환자나 환자 가족으로부터 고맙다든가 애썼다는 치하를 받는 일이 거의 없지요.
자기가 애를 태우며 생명줄을 붙들어준 환자가 살아나서 자기를 전혀 기억해주지 않는다는 건 얼마나 쓸쓸한 일이겠어요. 전 그 쓸쓸함에 왠지 마음이 끌려요.˝ 그 아들에 그 에미랄까, 나 또한 아들의 마음이 끌린 쓸쓸함에 무조건 마음이 끌려 그애가 원하는 것을 쾌히 승낙했다. 늘 사랑과 칭찬만 받으면서 자라 명랑하고 거침이 없고 남을 웃기기 잘하고 농담 따먹기에 능하던 아들의 전혀 새로운 면이었다.
이 글의 마무리는 단순히 비통하고 절망적인 언어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삶과 죽음에 대한 깊은 성찰로 나아간다. ˝내 아들이 없는 세상도 사랑할 수가 있다니, 부끄럽지만 구태여 숨기지는 않겠다.˝ ˝주여, 저에게 다시 세상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나 주여 너무 집착하게는 마옵소서˝
산 자는 반드시 죽게 되어 있고, 만나면 반드시 이별하게 되어 있는 존재가 우리 인간이다. 생명이 끝나는 것은 모든 생명체에게 일어나는 일이지만, 죽음을 이해하고 죽을 수 있는것은 오직 인간뿐이다.
우리가 남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은 언젠가 나도 그 길을 가야하기 때문이다. 머잖아 내가 죽으면, 다른 사람들이 내 빈소에 와서 처연한 눈으로 내 영정 사진을 바라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