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어지러울 때는 옛 산사를 찾아간다. 딱히 불자여서 그런 것은 아니다. 귀지가 가득해진 것처럼 갑작스레 일상의 갑갑함이 밀려올 때나 도시의 기운에 짓눌려 삭막해진 마음 가눌 길 없을 때, 옛 산사들은 한 생을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마음가짐을 좀더 명료하게 가다듬도록, 겹겹이 다가오는 희로애락을 차분히 응대하도록 도와준다.
뿐만 아니라 내게 산사는 자연이 선사하는 감각의 ‘소리 없는 아우성’을 온몸으로 지각하게 하는 장소다. 서울 변두리에서 나고 자라 살풍경에 파묻혀 살아왔기에 자연이라는 감각의 대상은 되려 말초적이다. 달달한 봄바람에 잔물결 치는 처마끝 풍경, 한여름 무더위 속 애절하게 피어오른 연꽃들, 가을 절집을 절경으로 만드는 오색의 단풍, 눈꽃으로 병풍을 치고 정적에 휩싸인 겨울의 불당…… 명찰일수록, 어떤 각도의 프레임을 들이대도 자연의 육감적 아름다움을 일부나마 들여다보게 해주는 것 같다.
그렇게 산사를 찾다보니 실은 조금씩 불심도 자라난 모양이다. 절간을 지나는데 우연히 『반야심경』의 한 구절이 귀에 들어와 앉았다. “(…) 마음에 걸림이 없고 걸림이 없으므로 두려움이 없어서, 뒤바뀐 헛된 생각을 멀리 떠나 완전한 열반에 들어가며, (…) 최상의 깨달음을 얻느니라.” 무슨 의미인지 정확히 알 길 없었으나 웬일인지 무작정 심금에 와 닿았다. 붓다와의 인연이 생겨난 것이리라. 그로부터 불교를 조금이나마 공부해봐야겠다 마음먹게 됐다. 아마 많은 불자들이 나처럼 불교에 입문하게 되는 것 아닐까 싶다. 한형조 선생님의 『붓다의 치명적 농담』과 만난 것도, 어찌됐든 이렇게 붓다와 나의 인연이 실낱처럼 이어져왔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은 부제에서 밝히고 있듯이, 『금강경』의 별기別記다. 즉 본격적인 『금강경』 공부에 앞서 “오해와 헛디딤의 위험”을 무릅쓰고 초심자들이 쉽게 불교에 다가갈 수 있도록 힘껏 돕는 책이다. 친절한 안내는 물론이거니와 한형조 선생님의 깊은 공부와 통찰을 절로 느끼게 해주는 은은한 문장은 초심자의 불안을 한결 차분히 가라앉혀준다. 『금강경』을 중심에 두고 불교에 관한 전반적인 이해를 돕는다는 것은 전혀 수월한 작업이 아니다. 내공이 깊고 깊어야 겨우 가능한 일일 텐데, 이 책은 그런 내색을 하지 않는다. 또한 모든 문장이 하나같이 섬세하게 직조되어 있어 책장을 넘길 때마다 그 치밀함에 탄복하게 되는데, 인문학의 어떤 경지 같은 게 있다면 한형조 선생님의 문장이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한다.
책을 다 읽고 덮은 뒤, 희망과 절망을 가르는 내 욕망의 그림자가 깊다 못해 원망 속에서 곤경에 처하게 되어버렸음을 가까스로 조금 인정하게 되었다. 그러나 내 안의 불쾌와 불만족 또한 완전히 해소되기 어려울 것 역시 인정해야 할 것이다. 훌륭한 가르침 덕에, 평안을 얻기는커녕 이런저런 생각으로 머리와 마음이 온통 엉켜버린 것 같다. 초심자들이 거치는 과정이겠거니.
우리 각자는 크고 작은 삶의 굴곡을 거치며 때로 절망적 고통과 부당한 악의를 거쳐 나갑니다. 그러나 인간의 위대한 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에 있지 않을까요. 이런 불리한 역경과 시련 속에서도 인간은 늘 자신의 본래 힘과 존엄을 ‘회복’해나가는 ‘기적’을 연출합니다. 나아가, 시련을 거치면서 그는 오히려 더 깊고 형형한 안목을 지니며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의 공동 운명으로 돌아보게 되지요. 불성이란 다름 아니라, 이렇게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그 수많은 적들과 역경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가치와 존엄을 ‘회복’하며, 동시에 ‘성장’하는 그 불가사의한 힘을 단적으로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힘은 우리 모두가, 누구나 예외 없이, 평등하게 가지고 있습니다. _본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