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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프링버드


시각장애가 있는 어린 남학생에게 영어를 가르친 적이 있다. 그 당시 나는 눈이 보이지 않는 세상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눈이 보이든 보이지 않든 우리는 '사람'이라는 공통된 사실 하나만으로 서로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건 대단히 낭만적이고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타인에게 손을 내미는 행위는 선의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사실을 그때 배웠다.    


맹학교에서 처음으로 인사를 나누던 날, 4학년 그 아이는 손에 작은 기계 하나를 들고 왔다. 글을 점자로 변환해 주는 점자단말기였는데, 음성 기능도 있어서 오디오북 역할도 했다. 기계 상단에 달린 작은 화면에는 글자가 떠서 그걸 통해 나는 아이와 글을 공유할 수 있었다.  


나와 아이를 이어주는 건 화면의 글도 있었지만 당연히 서로 주고받는 말, 대화였다. 그리고 그에 못지않게 음성과 느낌으로도 우리는 연결돼 있었다. 서로의 미묘한 감정은 시각 기능과는 별개로 전달된다. 음성의 음조나 속도, 웃음의 다양한 변주들이 대화의 내용과 어떨 때는 합치되고 어떨 때는 부조화를 이뤘다. 마치 다성음악처럼 전혀 화음을 이루지 못한 채 제 본색을 드러내는 것이다. 눈을 감으면 사람의 맨얼굴이 더 잘 보이는 법이어서 눈이 보이지 않은 아이는 내가 어떤 기분인지를 투명하게 들여다보는 것 같아서 무안할 때가 많았다.


아이는 미숙아로 태어난 후유증으로 시력을 잃었는데 그즈음에는 명암을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시력이 약하게 유지되고 있던 상태였다. 그래서 아파트 단지에서 자전거를 타고, 학교 체육관에서도 몸을 구르며 뛰어논다고 했다. 체육시간이 참 좋다고 아이는 말했다. 책 읽기도 좋아해서 미하엘 엔데의 짐 크노프 시리즈를 재밌게 읽었던 참이고 자연스럽게 국어와 영어도 재밌어했다. 수학이 어렵다고 했지만, 활짝 웃는 명랑한 아이의 모습은 몇 가지 힘들고 싫은 것 빼고는 세상 모든 걸 좋아하는 것처럼 보였다. 적어도 나와 만날 때 아이는 싱싱하고 푸릇했다.


그러나 미래의 꿈이 비행사라는 말에 나는 당황했다. 아이와 걸을 때 어떻게 방향을 인도해야 하는지 몰라서 망설였다. 영어로 길 묻기 놀이를 하고 싶은데 어떻게 공간을 이용해야 할지 막막했다. 밥을 먹을 때 반찬을 고를 수 없다는 것도, 학교에서 집까지 너무 먼 거리를 통학해야 한다는 것도 나는 아주 뒤늦게야 알았다. 그리고 우리 집 강아지를 만나게 해주고 싶어서 집에 데려왔을 때 아이가 여기저기 가구에 부딪히는 걸 보고 가슴이 아팠다. 내가 큰 실수를 했구나, 몸 둘 바를 몰랐다. 나중에 성인이 되어 만났을 때, 내가 여전히 진부하디 진부한 조언을 쏟아냈다는 사실이 뒤돌아서니 명료하게 보여서 낯이 뜨거웠다. 한 마디로, 나는 하늘 아래 이렇게 다른 세상을 사는 사람이 있다는 걸 과거에 몰랐고 지금도 여전히 잘 모른다.  















언니가 동생 얘기를 한다. 자기에게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동생이 있고, 그런 동생은 드물고 특별하다고. 이 동생은 피아노를 칠 줄 알고 피아노가 우릉우릉 울리는 느낌을 좋아하지만 노래를 부를 순 없다. 동생은 춤도 추고 뛰고 구르기를 좋아하지만 조심하라는 외침을 듣지는 못한다. 언니와 동생은 사슴을 뒤쫓는 놀이도 하는데, 언니는 사슴의 아주 작은 소리를 듣고 동생은 언니 뒤를 밟으며 풀밭의 아주 작은 움직임을 보면서 사슴 자취를 찾는다. 동생은 입술 읽는 법과 말하는 법을 배웠지만 발음이 분명하지 않아서 학교 선생님과 친구들은 충분히 알아듣지 못하고, 동생은 언니의 마음을 정확히 읽기 위해서 손가락과 입술만이 아니라 언니의 눈빛까지 들여다보길 원한다.    


아이들은 직설적으로 묻는다. "소리를 못 들으면 귀가 아프니?" 그러면 언니는 대답해 준다. "아니, 귀는 안 아파. 하지만 사람들이 이해해 주지 않을 때, 마음이 아프단다." 동생은 귀가 들리는 사람들과 비슷하지만 비슷하지 않기도 하다.  


"방 저쪽에 있는 내 동생이 나를 보게 하려면, 발을 쾅쾅 구르거나 손을 흔들어요. 그 애 옆으로 가서 팔에 손을 올리든지요. 내 동생은 발 구르는 걸 느낄 수 있어요. 손 대는 걸 느낄 수 있어요. 내가 손 흔드는 걸 힐끗 볼 수도 있고요. 하지만 내가 등 뒤로 가서 이름을 부르면, 그 애는 내 소리를 들을 수 없어요."
















표지의 저 아이의 이름은 히르벨이다. 히르벨은 시립 아동 보호소에서 살고, 그곳 아이들은 모두들 히르벨을 아주 못됐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아이들은 히르벨을 이해하지 못했을 뿐이다. 히르벨은 병에 걸린 아이였으니까.


아무도 히르벨의 병명을 명확히 알지는 못했다. 히르벨이 태어났을 때 의사 선생님이 히르벨을 엄마 몸에서 꺼내다가 집게로 머리를 잘못 건드렸다고 한다. 그때부터 히르벨은 끔찍한 두통에 시달렸다. 큰 아이들은 히르벨이 머리가 약간 돌았다고 말했다. 히르벨의 엄마는 히르벨을 키우고 싶어 하지 않아서, 가끔씩 사탕과 초콜릿이 가득 든 큰 봉지를 들고 찾아왔을 뿐이다. 그녀는 금방 다시 오겠노라고 히르벨에게 약속했지만 다시 두 손에 사탕과 초콜릿을 잔뜩 들고 찾아온 건 세 달이나 지나서였다. 히르벨은 엄마가 다녀간 다음부터 다시 찾아올 때까지 세 달 동안 내내 안달을 하며 엄마를 기다렸다.


히르벨은 병에 걸렸다는 게 어떤 건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종류의 고통도 알고 있었다. 머리가 깨질 것 같은 두통은 수시로 히르벨을 괴롭혔고 귀도 아팠다. 종종 어지럼증에 시달렸으며 배도 아팠다. 사실 히르벨이 아프지 않은 때는 없었다. 그러나 히르벨은 이리저리 뛰어다닐 수 있는 한, 두통이 너무 심해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지경만 아니라면, 병을 신경 쓰지 않았다. 언젠가 한 번 히르벨은 두통이 너무나 심해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방벽에다 머리를 짓찧었던 적이 있었다. 그때 히르벨을 맡았던 위탁 가정의 양아버지는 그걸 보고는 그 아이가 미쳤다고 생각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겉으로 나타난 행동만 보고 히르벨을 오해했지만 히르벨을 세심히 살펴본 사람이라면 히르벨이 매우 영리하며 선량하고 순수한 아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아이가 소망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았다. 한 번은 보호소에서 소풍을 나갔다가 히르벨이 일행에서 떨어져 양 떼 속에 갇힌 적이 있었다. 히르벨은 양들과 함께 밤을 보냈는데, 양치기가 히르벨을 발견하고 보호소로 데려왔다. 양치기는 말했다. "너무 야단치지 마세요. 귀여운 녀석이에요. 양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는 게 어디 그 애 탓이겠습니까? 도시애들이란 게 다 그런 걸요." 아저씨는 히르벨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아이에게 말했다. "언제라도 놀러 오고 싶으면 와도 된다."


사람들은 히르벨에게 아무것도 배우는 게 없는 아이라고 항상 말했다. 하지만 히르벨은 머리가 아주 나쁜 아이는 아니었다. 단지 배우는 게 힘들었을 뿐이다... 히르벨이 배운 것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먼저 히르벨은 아동 보호소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웠다. 그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리고 의사들이나 심리학자들이 하는 검사에 나오는 그림들도 다 외우고 있었다. 히르벨은 자기가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을 피할 줄도 알았으며, 자기를 괴롭히는 아이들에 맞서 싸우는 법도 알았다. 또 머리가 아파도 아이들과 어울려 놀 수 있는 법도 배웠다... 사실 따지고 보면 히르벨이 배운 것은 자기가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것들이었다. 그건 바로 아동 보호소와 병원을 여기저기 옮겨 다니는 삶 속에서, 사람들에게 가능한 한 많이 혼나거나 매 맞지 않고 지낼 수 있는 방법이었다. 히르벨은 그 방법을 배웠던 것이다. -작품 중에서 인용


히르벨은 글을 읽을 줄도 쓸 줄도 몰랐으며 말을 잘 하지 못했지만 음악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어서 목소리가 맑고 투명했다. 한 번 들은 노래는 절대 잊지 않았다. 교회에서 오르간 반주 없이 부르는 히르벨의 노래가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다. 그 순간에 사람들 안에서 깨어난 건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혹시 사람 마음 깊숙한 곳에 감춰진 보편적 사랑은 아니었을까.    

 

  












스즈는 자폐증이 있다. 스즈의 어머니는 딸이 유치원을 졸업하는 날, 유치원 친구들에게 감사인사를 전하고 싶어서 종이 연극 그림책을 자비로 만들어 아이들 앞에서 낭독했는데, 그 작품이 출판사를 통해 그림책이 되어 나왔다.


어머니는 자폐를 앓는 사람이 어떤 상황에 놓여있는지를 스즈의 예를 들어 쉽게 설명해 준다. 말을 못 하는 경우가 있고 운동이나 동작이 느리다는 것, 기억과 정보처리 구조가 달라서 뇌의 정보들이 시간 순서 없이 생생하게 떠오르기도 한다는 것, 그래서 갑자기 울거나 웃을 수 있다는 것, 마음의 안정을 취하거나 즐기려고 하는 반복적 행동을 한다는 것 등을 알려준다. 특히 자폐증이 있는 사람은 소리와 빛, 냄새, 맛, 피부 자극으로 들어오는 감각에 과민하다는 부분도 유념할 만하다. 그래서 귀를 막거나 이어폰을 끼기도 하고, 감각 과민과 체온 조절을 못하는 불쾌감 때문에 소리를 지르거나 자해나 가해 행위를 하고 패닉에 빠지고 발작을 일으키기도 한다. 이 모든 게 뇌의 문제이다.


"스즈의 뇌는 한가운데 부분이 태어날 때부터 조금 다르게 작동해서 "삐잇삐, 삐이이이이"하고 여러분과 다른 명령을 내릴 때가 있대요."


스즈의 어머니는 스즈를 대신해서 아이들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헤어져도 스즈의 뇌에는 그들과의 추억이 가득하다고. 갑자기 그 기억이 표면으로 떠오르면 스즈가 기분이 좋아져서 웃을 거라고. 우연히 만나면 몰라볼지 모르지만 함께 했던 시간들을 뇌의 어딘가에 분명히 저장되어 있을 거라고. 말을 할 수만 있다면 이렇게 얘기할 거라고 말이다. "고마워! 너희들과 지낼 수 있어서 좋았어. 너희들을 만날 수 있어서 좋았어."


스즈의 어머니는 유치원의 친구들을 '어린 이해자'로 호칭했다. 그림책 후반부에 덧붙인 설명글에서 들려주는 일화는 아이들이 그렇게 불릴 자격이 있다는 걸 보여준다. 어느 날 유치원에 등원해서 어머니가 사물함에 스즈의 짐을 넣고 있는데 스즈가 화내는 소리가 들렸고 그런데 그 소리가 금방 그치기에 어린이집 마당을 내다보니 친구들이 스즈를 세발자전거에 태우고 달리고 있었다. 선생님이 시킨 것도 아닌데 말이다. 스즈는 무표정해 보였지만 눈에는 웃음꽃이 피었고 친구들도 활짝 웃고 있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아이들은 어른보다 훨씬 너그럽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의 규범에 대한 지식과 가치관, 자아 개념은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수적이지만 그것은 동시에 자신을 보호하는 두터운 벽을 세우는 일이기도 해서 너그러움은 절대 들이지 않는 우물처럼 편협하고 좁은 세상을 만들기도 한다.   


내가 사는 하늘 아래 참으로 많은 다른 세상들이 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하늘을 하나씩 이고 있다. 내 하늘이 무너질 때 다른 사람들의 하늘이 멀쩡한 걸 보고 충격을 받아본 사람이라면, 내 머리 위의 저 하늘이 내가 이고 있던 하늘이었을 뿐 사람들도 저마다 자기 하늘을 이고 있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닫는다. 단지 장애만 아니라 세상사 모든 고통과 불행이 각자의 하늘 날씨를 바꾼다. 그렇게 해서 흐린 하늘이 있고, 무너지는 하늘이 있고, 천둥과 번개와 폭우가 치는 하늘이 생긴다. 이것이 모두에게 적용되는 보편적인 진리 같다.


그러나 유난히 더 요동치는 하늘이 있다. 그런 하늘이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대체로 잘 모르며, 모르고 싶어 한다. 그래서 오해하고, 불편해하며, 종종 무례를 범한다. 우리는 비슷하며 또한 비슷하지 않아서, 어떤 삶의 양태는 특별히 더 배우고 이해해야 한다. 나의 하늘 옆에 다른 하늘들이 있다는 사실을 인지할 수 있다면, 스즈 어머니가 말하는 어린 이해자처럼 너그러운 이해자가 되려고 애써 본다면, 나의 하늘이 맑고 투명해도 누군가의 하늘에서는 비바람이 치고 있다는 사실을 외면하지 않는다면, 우리 각자가 이고 있는 하늘이 더 가벼워지고 우리 모두를 두르고 있는 하늘이 경계 없이 무한하게 확장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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