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나는 안녕했다. 오늘은 안녕할까? 내일, 모레는? 나이가 들어도 내 불안감은 여전한 것 같다. 어릴 때는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 컸다면 성인이 되는 과정에서는 사회의 일원으로서 내 능력에 자신이 없어서 두려웠고 늙어가는 지금은 노후에 대한 두려움이 상대적으로 크다. 하지만 내용은 변해도 내 두려움은 하나로 정리된다. 과연 나는 잘 살 수 있을까?
내 상상력과 자기 불신은 과해서 살면서 종종 문제를 일으켰다. 그것은 현실의 내 발목을 붙잡아서 바깥세상으로 걸어 나갈 수 없게 했고, 현실의 내 눈을 가려서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보지 못하게 했다. 막상 문을 열고 나서면 세상은 내 생각과 아주 많이 다를 때가 아주 많았는데도 집으로 돌아오면 또다시 상상의 세상을 지어내서 그 안에 틀어박히곤 했다.
어떤 화가 선생님은 독신으로 고양이와 사는 육십 대 중반 여성인데, 젊을 때부터 외지고 거친 곳에서 살았지만 그림만 있으면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고 했다. '그림만 있으면'이라니! 어떤 젊은 여성 소설가도 비슷한 얘기를 했다. 폐교를 고쳐 만든 한 문학관에 입주 작가로 들어갔는데 그 당시 그곳에 입주한 작가가 아무도 없어서 텅 빈 폐교 건물에 달랑 혼자 머물렀던 모양이다. 어떤 미친년이 혼자 거기서 글을 쓴다는 얘길 듣고 그 문학관을 운영하는 선배 소설가가 호기심에 자기를 찾아오기까지 했다나. 그 여성 작가 역시 써야 할 이야기만 있다면 귀신도 강도도 무섭지 않았나 보다.
저 화가와 소설가는 배포가 큰 걸까? 그럴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다. 그들이 그렇게 용감하게 낯선 곳에 머물 수 있었던 건 그들에게 그림과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짐작한다. 그들이라고 나처럼 상상력이 없었겠나. 예술가들이니 상상력은 나보다 더하면 더했지 절대 덜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들에게는 있고 내게는 없는 것, 그걸 찾아야 할 것 같다. 그걸 찾으면 새 집에서의 내 불안과 공포 혹은 자기 의심을 해소할 수 있을지 모른다.
여자아이 아이린이 눈보라 속에서 큰 상자를 들고 간다. 상자 속에는 아이린의 엄마가 만든 공작부인의 무도회 드레스가 들어있는데, 무도회는 바로 오늘 저녁이고 엄마는 병이 나서 아이린이 대신 드레스를 공작부인의 집에 가져가는 중이다. 날씨가 거칠어서 엄마는 아이린을 걱정했지만 아이린은 할 수 있다고 고집을 부렸다. 엄마가 만든 세상에서 제일 예쁜 드레스가 무용지물이 되는 걸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이린은 엄마를 침대에 눕게 하고 누비이불을 두 장이나 꼭꼭 덮어준 뒤에 발치에 담요까지 하나 더 얹어주었다. 그리고 꿀을 넣은 레몬차를 끓여 놓고 난로에 장작도 한가득 집어넣었다. 그러고 나서 옷을 단단히 껴입고 눈발이 휘몰아치는 길로 나섰다. 밖은 아주 추웠고 눈이 쉬지 않고 내렸다. 바람은 얼마나 못되게 구는지, 나뭇가지를 부러뜨려서 내던지고 허공으로 눈을 퍼 올려서 마구 흩뿌렸다. 바람은 아이린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가로막았지만 아이린은 물러서지 않고 뒤로 돌아서서 등으로 바람을 밀면서 계속 걸어갔다. 입술을 꼭 깨물고서 말이다. 아이린은 정말 중요한 심부름을 하는 중이었으니까.
"집으로 가라, 아이린! 집으로 돌아가란 말이다아아아..."
"싫어! 난 절대 돌아가지 않을 거야, 이 못된 바람아!"
"집으로 돌아가라니까아아아아! 어서 집으로 돌아가라니까아아아아. 내 말 안 들었다가는..."
아이린은 바람과 계속 싸우다가 그만 상자를 뺏기고 말았다. 바람은 상자 뚜껑을 홱 열어젖혔고 무도회 드레스는 너풀너풀 일어나 빙글빙글 춤을 추며 날아갔다. 아이린은 눈물이 솟구쳐 속눈썹이 얼어붙어 버렸다.
"엄마가 얼마나 열심히 만들었는데. 겨우 이렇게 날려 보내려고 그렇게 오랫동안 재고, 자르고, 시침질을 하고, 한 땀 한 땀 꿰맸단 말이야? 공작부인은 또 어떻고? 가엾은 공작부인!"
아이린은 빈 상자라도 들고 가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공작부인에게 얘기하기로 결심했다. 집밖으로 나왔을 때부터 아이린의 여정은 이미 험난했지만 공작부인의 집으로 가는 길은 더 험난했다. 눈은 끝도 없이 내려 점점 깊이 쌓였고, 바람은 울부짖었고, 아이린은 구덩이에 발이 빠져서 발목까지 접질렸다. 짧은 겨울 해는 저물어서 이윽고 밤이 되었고 허허벌판 한가운데서 아이린은 길을 잃고 말았다.
작은 꼬마는 마지막 남은 힘을 모아서 산비탈을 내려가다가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져 온몸이 눈 속에 파묻혔다. 살려달라고 해봤자 들을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아이린은 추위에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이가 딱딱 부딪혔다. 그때 아이린은 생각했다.
"그래, 그냥 이대로 얼어 죽자. 그럼 이 고생도 끝이잖아?"
하지만 곧 생각을 고쳐 먹었다. 갓 구운 빵 냄새가 나는 사랑하는 엄마 생각에 아이린은 팔다리를 마구 휘저어서 눈구덩이에서 빠져나왔고 끝내 공작부인의 집에 도착했다. 무도회 드레스는 훨훨 날아서 기적적으로 공작부인의 집 근처 나무를 꼭 끌어안고 있었고, 새 드레스를 입은 공작부인은 밤하늘에 빛나는 별처럼 아름다웠다.
용기가 필요할 때 나는 눈보라를 뚫고 걸어가는 아이린의 모습을 종종 떠올렸고 그러면 아이린의 용기가 내게도 솟는 것 같았다. 아이린은 확실히 용감한 아이다. 그런데 작가는 아이린을 통해서 그 이상의 얘기를 하고 있는 것 같다. 아이린은 거센 눈바람을 맞으며 품에 상자를 꼭 껴안고 걸어가는데, 그 안에는 엄마가 공작부인을 위해 만든 무도회 드레스가 들어있다. 마치 화가의 그림과 소설가의 이야기처럼 아이린에게도 엄마의 드레스가 있고, 그 덕분에 혹은 그 때문에 아이린은 눈보라가 거세게 치는 집밖으로 용감하게 나설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드레스의 진짜 의미는 따로 있다. 그것은 드레스가 바람에 날아간 뒤에 분명해진다. 드레스가 바람에 날아가버려도 상자의 빈자리는 비어있지 않다. 거기에는 아이린의 마음이 있다. 엄마의 수고를 헛되지 않게 하려는 마음, 엄마에 대한 따뜻한 사랑, 공작부인에 대한 존중, 더 나아가 드레스로 상징되는 예술에 대한 추앙이 드레스가 날아가고 나서 비로소 보인다. 아이린이 빈 상자를 버리지 않고 공작부인에게 가는 건 그 안에 소중한 가치가 들어있다는 걸 말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싶다. 그러니까 이 그림책은 단순히 용감한 꼬마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무엇이 사람을 용감하게 만드는가에 대한 철학적 질문이다.
무서움을 잊게 만들 정도로 소중한 것이 있다면 참 좋겠다. 화가의 그림, 소설가의 이야기, 아이의 엄마 사랑 같이 소중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비싸고 화려한 게 아니어도 보물 같을 것이다. 맛있는 케이크 한 조각, 한 송이 꽃, 사랑스러운 반려동물의 반짝이는 두 눈동자와 코, 내 옆의 식구나 친구, 조용히 차를 마시는 순간 같은 것. 용감해지는 건 먼저 소중한 걸 찾는 데서부터 시작되는 일이다. 용기란 그걸 지키고 싶어서 나도 모르게 솟는 것이니까. 옷이 날아간 빈 옷상자 속에 있는 눈에는 보이지 않는 그 마음을 지키고 싶어서 말이다.
한편으로, 아이린이 공작부인의 집으로 가는 험난한 여정을 미리 세세히 알았더라면 집밖으로 나설 수 있었을까도 생각해 본다. 바람한테 드레스를 빼앗기고, 눈구덩이 속에 빠져서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할 지경까지 가리란 걸 미리 알았더라면 아이린은 대담하게 현관문을 열고 나갈 수 있었을까? 이 이야기의 결말은 해피엔딩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을 때가 더 많아서 어쩌면 아이린은 집안에서 난롯불을 더 피우고 "어차피 옷은 못 전해드려요. 공작부인도 이해하실 거예요" 하고 엄마를 위로하고 보살피는 쪽을 택했을지도 모른다.
미래의 일은 아무리 철저하게 준비해도 견고하게 내 마음대로 끌고 갈 수 없다.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일은 일어나는 법이다. 화가가 아무리 용감해도 외진 작업실로 가는 길이 때로는 무섭고 외로울 때가 있었을 테고, 소설가가 아무리 굉장한 이야기를 머릿속에 가득 담고 있어도 큰 폐교 건물의 검은 공간에 압도될 때가 있었을 것이다. 그림만 있으면, 이야기만 있으면, 드레스만 있으면 하나도 무섭지 않아서 용감하게 길을 나섰지만 여정이 너무 험난할 때가 있을 텐데 그땐 어쩌나. 이렇게 앞일을 미리부터 걱정하는 나에게 누가 얘기해 주었다. "무슨 일이 닥치면 닥치는 대로 하는 거지 뭐.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
표지의 저 곰은 어느 날 문득 그냥 궁금해서 강을 따라가 봤다. 그러다가 그만 강에 빠졌다!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일이었다. 곰은 어떻게 했을까? 강물을 따라 떠내려가는 수밖에. 그러다가 우연히 통나무 위에 올라탔고 그다음에는 개구리와 거북이와 비버와 너구리 같은 여러 친구들이 합류했다. 그들은 강에 빠지기 전까지는 몰랐다. 외로웠지만 실은 친구가 많은 줄, 통나무배 타기가 위험하지만 재밌는 줄, 강이 일직선이 아니라 구불구불 꺾이는 줄.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들 모두 몰랐다, 강줄기가 끊기며 강이 느닷없이 폭포로 바뀌는 줄을.
지나간 과거의 일들이 쇳덩이 같은 손아귀로 내 발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다. 후회할 일 천지고 내가 실패자 같아서 마음이 처지는 날들이 있다. 앞으로 올 시간은 어디로 나를 이끌고 갈지 몰라서 두렵다. 곰처럼 호기심에서 강물에 살짝 발을 담가봤다가 예상치 못하게 빠진 일이 수없이 많아서 새로운 일을 기획하고 실행할 때면 이번에도 내가 허튼짓을 했나 의심하곤 한다. 하지만 그림책의 저 곰처럼 강물에 몸을 맡기고 떠내려가기로 했다. 닥치면 닥치는 대로. 이건 매우 수동적이지만 한편으로는 아주 적극적이기도 한 삶의 역설적 태도가 아닐까 싶다.
흘러가다 보면, 걸어가다 보면 끝에 이르겠지. 이 길과 강은 숨기고 있던 새로운 만남과 풍경을 펼쳐주겠지. 나서지 않고 빠지지 않으면 볼 수 없는, 내가 모르던 세상을 보여주겠지. 눈구덩이에도 빠지겠지만 아이린처럼 팔다리를 휘휘 저어 빠져나올 수 있겠지. 아무튼 닥치면 닥치는 대로,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도 되겠지. 용감해지고 싶어서 이렇게 용기를 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