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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프링버드


그제부터 오늘까지 나는 누군가를 진심으로 미워하고 있다. 화가 났고 화를 터뜨리고 싶었다. 아주 실컷! 그런데 마음이 점점 괴로워졌다. 미워하면서 화를 품을수록 더 심하게 괴로워졌다. 미움의 눈덩이가 경사진 언덕을 굴러내려가며 걷잡을 수 없이 커졌고, 작은 불이 큰 산불로 번지면서 그와 나 사이에 놓인 다리를 활활 불태웠다. 다정한 계곡에 놓인 소박하고 오래된 그 다리를. 이 모든 상황이 내 마음속에서 지금까지 벌어지는 풍경이다.  

 

미워하는 마음은 괴롭다. 누구에게 잘못이 있든 미움은 우선 나 자신을 괴롭히는 일이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미워서 괴로운 게 아닌 것 같다. 실은, 사랑하지 못해서 괴로운 게 아닐까. 오래전부터 막연히 짐작해 왔는데 왠지 그 짐작이 맞을 것 같은 확신이 든다. 나는 진심으로 사랑하고 싶은데 사랑이 잘 안 돼서 괴롭나?

 

우리말에는 화 대신 쓸 수 있는, 왠지 모르게 귀여운 표현이 있다. 삐지다. 이 말은 특히 어린아이를 향해서 잘 쓰인다. "쟤가 화났어."라고 하는 대신 "쟤, 삐졌어." 하고 속삭대며 우리는 응큼하게 웃는다. 장난스럽게 들리는 '삐졌다'는 표현은 '화났다'는 표현과 다르게 상황을 덜 심각하게 만드는 것 같다. 하지만 그럴 리가. 어린아이의 화는 절대 가볍게 취급되어서는 안 될 것이, 아이는 진심으로 속이 상하기 때문이다.

 

 


 

 









풀밭에서 잔뜩 화가 난 저 아이의 이름은 스핑키. 스핑키는 엄마, 아빠, 누나, 형에게 무지막지하게 화가 났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스핑키를 화나게 만든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닌 것 같다. 가족 중의 한 사람에게만 화가 난 것 같지도 않다. 왜냐하면 가족들이 차례로 마당으로 나가 스핑키에게 용서를 구하지만 스핑키는 절대 한 명도 용서해 줄 마음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이건 아주 오래 묵은 화가 틀림없다. 

 

스핑키는 대략 여덟, 아홉 살쯤 돼 보이는데 그 나이에는 별일도 아닌 일에 잘 삐진다. 툭하면 서운해하고 화를 낸다. 아마도 자의식이 싹트는 나이라서 그럴 것이다. 하지만 새싹처럼 돋아나는 이때의 자의식은 아직 연약해서 쉽게 상처를 입는다. 아이는 자기 방어를 위해서 화를 낸다. 화를 '내야만' 하고 '낼 수밖에' 없다. 아이는 자신을 위협하는 유형무형의 적들과 싸우는 고독한 전사 같다.

 

우리의 스핑키는 이 이야기 속에서 실컷 화풀이를 한다. 형과 누나와 엄마가 아무리 빌고 달콤한 말을 속삭여도, 아빠가 설교를 하고 친구들이 놀자고 해도, 그들의 호의를 내팽개친다. 작가 윌리엄 스타이그는 그림책의 거의 전부라 할 수 있을 29쪽에 이를 때까지 스핑키에게 복수할 기회를 무궁무진하게 베풀어주고 나서 단 3쪽으로 상황을 간단히 마무리해 버린다. 스핑키에게 속이 후련해질 만큼 실컷 화를 내게 해준 것이다. 무릇 화풀이는 이렇게 해야 한다. 과하다 싶을 정도로 실컷.

 

살아보니, 마음의 앙금을 풀어내려면 실제 경험했던 부당함에 대해 딱 그만큼만 되갚아주는 것으로는 모자라는 것 같다. 반갑게도 스타이그 역시 그렇게 생각했나 보다. 밉살스러운 누나가 꽃을-팽개쳐버릴 꽃을-따주고  거만한 형이 무릎을 꿇고-백번을 꿇어도 용서 못할 테지만-사랑하는 엄마-가장 사랑하기 때문에 더 서운한 엄마-가 맛있는 음식을 아무리 멋지게 차려줘도 끝장을 보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이다. 복수는 유혹적이다.  

 

윌리엄 스타이그는 스핑키를 심하게 편애해서 아이가 원하는 만큼 복수하게 해 준다. 그런데 이건 그림책의 세계에서나 가능하다. 현실의 가족은 스핑키의 가족처럼 다정하지 않은 경우가 훨씬 많다. 설사 이상적인 가정이라고 해도 가족 가운데 한두 명쯤은 쌀쌀맞거나 인색하거나 무심하다. 아이에게 와서 무릎을 꿇고 사랑의 말을 해주는 가족과 친구는 아주 드물지 싶다. 그래서 작가는 그림책 속에서나마 후련하게 화풀이를 할 수 있게 아이에게 멍석을 펼쳐준다. 연약한 아이들에게. 바깥세상에서는 이렇게까지 못하지. 아무렴. 여기서나 실컷 화풀이해. 난 네 편이야 하면서. 누구는 그랬다, 편애란 편을 들어주는 것이라고. 난 이 말이 진실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에 화난 아이가 또 한 명 있다. 맥스다. 맥스는 늑대 옷을 입고 벽에 못을 박고 포크를 휘두르며 개를 위협하며 놀다가 엄마한테 이 괴물딱지 같은 녀석이란 말을 듣는다. 맥스는 엄마한테 맞받아쳤다. 그럼, 내가 엄마를 잡아먹어버릴 거야. 엄마는 저녁밥도 안 주고 맥스를 방에 가둬버렸다. 바로 그날 밤 맥스의 방에서는 풀과 나무가 자라고 큰 바다가 열려서 아이는 배를 타고 항해를 한다. 괴물들이 사는 나라로 간다.

 

 


 

 








맥스는 이 나라에서 괴물들의 왕이 되어 마음껏 놀았다. 스핑키가 실컷 화를 터뜨렸던 것처럼 맥스도 괴물들의 나라에서 실컷 못되게 놀았다. 부정적 감정을 풀어놓고 야생적인 본능을 마음껏 발산하면서. 지칠 때까지 놀고 나자 맥스는 문득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그래서 가지 말라고 말리는 괴물들을 뿌리치고 다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자기 방으로 돌아와 보니, 엄마가 가만히 놓고 간 저녁밥이 있었다. 밥은 아직 따뜻했다.

 

작가 모리스 샌닥도 아이에게 무척 너그럽다. 엄마에게 괴물딱지 같은 녀석이란 말을 들은 아이 마음은 무사할 수 없다. 괴물딱지라니! 그래서 맥스에게 용기를 듬뿍 불어넣어서 엄마한테 지지 않고 소리치게 해 줬다. 내가 엄마를 잡아먹어버릴 거야. 스핑키의 아빠는 스핑키가 나잇값을 못 하고 어린애처럼 군다고 설교를 했는데 윌리엄 스타이그는 그걸 허튼소리라고 명명했다. 그리고 스핑키를 이렇게 변호해 준다.  

 

사실, 아빠가 이 사실을 모르는 것 같은데, 스핑키는 여느 아이들과 다를 바 없는 아주 정상적인 아이랍니다.

 

 

맥스의 세계도 역시 그림책이니까 가능하다. 괴물딱지 같은 녀석과 잡아먹어버릴 거야라는 말싸움은 현실 속에서 잘 벌어지지 않는다. 화난 감정을 거리낌없이 말로 내뱉거나 행동으로 옮기는 현실 엄마는 충분히 있을 것 같은데, 아이가 엄마한테 잡아먹어버린다고 말하는 상황은 잘 상상이 가지 않는다. 그렇게 말하는 순간 더 큰 반격을 불러올 걸 알기에 아이들은 겁이 나서 그런 말을 쉽사리 밖으로 꺼내놓지 못한다. 대신 속에 담아둔다. 언어화되지 못한 채 어떤 검은 감정의 덩어리로. 어린 독자들이 스핑키와 맥스의 이야기를 좋아한다면 그건 두 아이가 자기 대신 어른들에게 실컷 화를 내고 복수를 해주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아무튼 이제 스핑키와 맥스는 속이 후련해졌다. 마음이 누그러졌다. 스핑키의 가족은 인내심이 바닥나서 슬슬 약이 오를 참인데 이 절묘한 순간에 스핑키는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어쩌면 식구들이 잘 몰라서 그랬는지도 몰라. 지금은 잘하려고 노력하고 있잖아. 식구들이 나한테 그렇게 군 게 꼭 식구들만의 잘못일까? 화를 풀면서도 우스운 꼴이 되지 않으려고 스핑키는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 가족을 위해서 밥상을 근사하게 차렸다. 맥스 또한 괴물들이 사는 나라에 가서 진짜 괴물이 될 뻔했는데 다행히 엄마가 따뜻한 저녁밥으로 맥스를 무사히 그 나라로부터 데려왔다.

 

이 두 작가의 그림책 세계 속에는 기본적으로 사랑이 있다. 사랑이 핵심이다. 사랑이 아이의 화난 마음을 부드럽게 녹여주고 원초적인 괴물들의 세계로부터 불러들인다.     

 

특히 윌리엄 스타이그는 우리가 언제 너그러워지는지를 잘 아는 것 같다. 아이들은-사람은-사랑을 받으면 너그러워진다. 하루 삼시세끼 밥을 먹어야 몸에 활기가 있듯이 사람은 사랑을 받아야 마음에 힘이 생기고 넉넉해진다. 삼시세끼 밥이 굳이 진수성찬일 필요가 없듯이 사랑도 대단하고 위대한 어떤 것일 필요는 없을지 모른다. 한없이 자비로운 사랑, 얼음산을 넘어 눈바람을 뚫고 약초를 구해오는 효심 같은 어마어마한 사랑은 받기도 힘들고 주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하니까. 산다는 일이 배가 고프고 부르고의 연속이듯이 마음의 일도 고프고 부르고의 연속이어서 소소한 사랑으로 매일 우리를 먹여줘야 하는 걸지 모른다.  

 

그런데 진짜 그럴까? 혹시 우리의 무의식은 무한히 깊고 큰 사랑을 원하고 있진 않을까? 그래서 내가 가진 사랑이, 내가 줄 수 있는 사랑과 상대가 나에게 줄 수 있는 사랑이, 너무 초라하고 너무 섭섭한 건 아닐까? 내가 지금 이렇게 화가 나서 속을 끓이는 까닭, 미움과 분노로 내 자신을 괴롭히는 상황, 소중한 관계의 다리를 불태우고 끊어버리려고 하는 어리석음이 혹시 그래서는 아닐까? 불경에서는 만족할 줄 알라고 했는데.

 

미움과 분노와 화라는 표현을 삐졌다, 부루퉁해졌다, 골을 낸다는 말로 바꿔보면 좀 나아지려나 하는 유치한 꿍꿍이도 해보면서, 이 두 그림책에 환호하는 어린 독자들처럼 나도 그림책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부드럽게 녹으며 좀 너그러워지는 것 같다. 용서로 가는 길은 이렇게 이해하고 화해하는 과정인가도 싶다. 상대에 대해서도 그렇지만 내 자신을 이해하고 내 마음과 화해가 이루어질 때 나는 마침내 용서라는 문을 열고 자유로워지리라 기대한다. 문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문 자체가 사라지는 걸 경험하게 될 거라고. 그런 경험을 하길 희망한다. 내 생각은 아직 내가 못 이른 그곳에 이미 가 있다. 이제 나의 마음이 생각을 따라 가는 일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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