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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왕국
  • 엠마뉘엘 카레르
  • 16,920원 (10%940)
  • 2018-03-10
  • : 1,582

 교수님의 추천으로 알게 되어 읽게 된 책이다. 자클린 고모의 영향으로 믿음을 갖게 되었던 작가가 훗날 회의에 직면하여 불가지론자(신에 대해 인간은 절대 이해에 도달할 수 없다)로 돌아서고, 그러한 시선으로 기독교의 역사를 재구성하는 내용이다. 실제 이야기와 역사적 사실, 그리고 작가의 상념과 추측이 자유롭게 혼재되어 있어서, 어느 정도의 분별력이 요구된다. 성경을 잘 알고 있는 독자라면, "이것은 모두 헛소리야!"라고 치부할 수도 있고, 그 반대의 경우라면 "이 사람의 말이 사실이야. 신약 성경의 내용은 그럴듯한 허구에 불과해"라고 고개를 끄덕일 수도 있다. 


 사실 엠마뉘엘 카레르는 기독교를 전면으로 부정하려는 의도가 아니다. 구약 성경에 대한 언급은 일절 없고, 하나님의 존재를 모독하지도 않는다. 그저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과 맥락 속에서, 지극히 인간적인 시선으로 바울, 누가, 베드로 등의 행적을 평가하고 마침내 예수께 질문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분명히 선언한다. 자신은 부활을 믿지 않는다고. 자신이 가진 의심은 더 큰 믿음을 가지기 위한 발판보다는, 불가지론에 확신을 더하기 위한 과정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즉, 그는 작중에서 계속해서 자신의 믿음 없음을 설득하려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나는 그를 어떠한 태도로 대해야 할까? 먼저 해주고 싶은 말은, '당신이 겪었던 모든 의심을 나도 통과했다'는 것이다. 의심 많은 제자였던 도마와 같은 나는 눈에 보여야만, 또는 분명히 증명되어야만 그것을 믿는 사람이었다. 따라서 창세기에 적힌 말씀들이 매번 나에게 도전이었다. 또한, 오늘날의 가치관과 다소 동떨어져 보이는 구절들을 발견할 때마다 괴리감을 느꼈고, 이해되지 않는 구절들에 대해 좌절했다. 그러나 믿음은 논리와 이성을 초월한 것이다. 믿음은 언제나 나의 이해를 앞서 간다. 그러므로 아직 밝혀지지 않은 것들에 대해 따지기보다, 주어진 말씀에 대한 순종을 우선하기로 했다.


 또한 엠마뉘엘 카레르, 당신의 적대와 의심은 결코 기독교에 있어서 중대한 위기가 아니다. 중세 시대나 기독교 문화권에서 이 소설을, 또 당신을 적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당신의 생각을 용납한다. 니체를 비롯한, 신을 부정하는 철학자들의 의견도 존중한다. 왜냐하면 믿음에 있어서 가장 큰 위기는 그러한 적대와 의심이 아니라, 거짓된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그럴 듯한 진리로 포장하여 우리의 마음을 미혹하는 자들이 나는 더 무섭다. 시대를 지배하는 개인주의와 비관론, 그리고 이단이야말로 우리가 맞서야 할 적이다. 기독교를 논리로, 이성으로 격파하려는 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무너뜨릴 수 있었다면야, 기독교는 얼마든지 꺾였을 것이다. 어떤 잔혹한 수법으로 억압해도, 아무리 과학이 발전하고, 인간의 사고가 복잡해져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 무엇인가가 있다면, 그것이 바로 진리가 아닐까? 그럴 때마다 나는 오히려 그들의 비판 덕분에 예수의 진리가 선포되는 것 같아서 기쁘다.


 혹시라도 당신이 가진 의심 때문에 주님께 돌아가기 두려운가? 괜찮다. 당신이 품고 있는 모든 의심에도 불구하고 나는 당신이 믿음을 가지길 원한다. 베드로는 주님께서 붙잡히시던 날, 세 번이나 그를 부인하고 저주했다. 예수께서는 부활하시고 그를 만났을 때, 세 번이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묻는다. 즉, 베드로가 열 번 부인했으면 주는 열 번 그렇게 물었을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예수를 부인하고 외면해도, 그는 하염없이 우리를 사랑하신다. 그 끈질긴 사랑에 굴복하지 않을 자가 없다. 당신이 어떤 방식으로 그분을 비난하고 모욕해도, 그분이 가지신 존귀함과 거룩함은 전혀 손상되지 않는다. 그러니 "내가 예수를 못박았습니다. 나는 그분께 돌아갈 자격이 없습니다"라는 탕자의 마음가짐을 품고 있다면, 걱정하지 않기를. 그분은 당신이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계시니까. 당신이 찰나에 맛보았던 그 왕국을 온전히 누리기를 바라고 계시니까. 당신의 겨자씨 같은 믿음으로도 충분하다고 말씀하고 계시니까.


 나 역시 지나온 삶을 돌이켜 본다. 어렸을 적부터 교회를 다니며 성경을 읽었고, 하나님과 예수님, 성령님의 존재를 인정했다. 왜냐하면 진리라고는 하나도 없어 보이던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납득할 수 있는 가치였으니까. 하지만 여전히 나의 마음은 의심으로 가득했고, 신앙 생활을 열심히 하는 한편으로는 "나의 이 열심과 믿음이 언제라도 의심에 의해 뒤집힐 수 있다"는 불안에 시달렸다. 그러나 일단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게 되었을 때, 나는 예전과 같이 살아갈 수 없음을 알았다. 정말 실낱 같은 파편임에도 말이다. 그분이 가진 사랑의 총량을 내가 헤아릴 수 없고, 언어로도 표현할 수도 없으나, 주님께서는 실로 내 인생의 궤적에 관여하지 않는 부분이 없었다. 구원의 확신과 주의 임재에 잠겨 있는 지금, 이들이 지닌 의심은 더 이상 위협이 되지 않는다. 대신, 나는 그 생각을 용납한다. 언젠가 그 의심들이 걷히고, 순수한 빛이신 예수를 바라볼 수 있기를 기도한다. 예수가 내 안에 들어올 때, 모든 비난과 상처와 적대는 포용될 수 있다. 그러니 얼마든지 욕해도 좋다. 의심해도 좋다. 그럴수록 그리스도는 당신을 끈질기게 붙잡을 테니.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이밖에도 많이 있다. 바로 그분이 우리의 삶 가운데서,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매일 하고 계시는 일들이다. 이 일들 가운데 어떤 것들을 증언하고, 나의 참된 증언을 기록하는 것, 이게 바로 나의 소명이라고 생각한다. 주여, 앞으로 내게 함정들과 침체된 날들과 어쩔 수 없이 당신에게서 멀어지는 날들이 있다 할지라도, 내가 이 소명에 충실할 수 있도록 해주옵소서. 이 열여덟 권짜리 노트들의 마지막에 이르러 당신께 간구하는 것은 바로 이것, 충실함입니다.- P6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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