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도 안 되지만, 사실이다. 카프카 문학을 한 문장으로 설명하자면 이렇다. 단순히 마술적 리얼리즘 기법을 구사했기 때문에 이렇게 평가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묘사하는 인물들(또는 생물체들)의 내면은 우리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또는 인정하기 싫은 부분이다. 자신의 나약함이 공개되는 것은 견딜 수 없으니까. 그러나 카프카는 단단히 얼어붙은 우리의 내면을 활자라는 도끼로 산산조각내려고 한다. 경계심이 가득한 독자는 그가 지나치게 자기 안에 갇혀 있거나 현학적이라고 비판할 수 있겠다. 나 역시 예전에 비해 프란츠 카프카를 위대한 작가로 분류하는 것이 내키지 않는다. 그러나 파묻히기에는 아까운 작가이며, 그의 작품들은 여전히 유효한 메시지를 지니고 있다.
단편 소설 중에서 가장 유명하고 뛰어난 작품은 「변신」이겠지만, 내 이목을 사로잡은 작품은 「유형지에서」였다. 내가 카프카를 처음 접하게 된 『심판』이나 「변신」, 그리고 이 작품의 공통점은 현대인이 겪는 부조리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자신이 왜 처벌을 받는지도 모른다. 단지 주어진 부조리를 감당하고 무너질 뿐이다. 인간은 그토록 연약한 존재이다. 아무리 노력을 하고 열심히 살아도 이유 없는 고통과 고난에, 억울한 일에 인생이 어려워진다. 그제야 자신의 삶이 고통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애써왔다는 것을 이해한다.
"그가 자신의 판결조차 모른다는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장교는 재차 말하고 나서 마치 탐험가에게 질문에 대해 자세한 이유를 덧붙이려는 듯이 잠시 동안 말이 없더니 이윽고 말을 꺼냈다. "그에게까지 알릴 필요는 없습니다. 판결 내용을 직접 체험하게 될 테니까요." (p.218~219)
시베리아 유형지에서 방문한 탐험가는 비인간적인 방식으로 죄수를 고문하고 처형하는 기구를 개발한 사령관을 만난다. 그리고 그의 억압 아래 수없이 희생 당한 죄수들을 본다. 마지막 순간에는 장교 본인이 그 기구의 희생자가 된다. 찝찝함이 잔뜩 남는 이 결말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누군가는 그가 죄책감 때문에 자결했다고 볼 수 있겠지만, 어쩌면 사령관은 자신이 그 안에 들어가야 진정으로 기구가 완성된다고 보았기 때문이 아닐까? 또한, 판결 내용을 모른다고 해도 분명히 죄수인 것은 맞다. 누구나 그 끔찍한 기구 안에 놓일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독자가 느낄 수 있는 공포가 아닐까?
이는 「변신」에서도 마찬가지다. 성실한 세일즈맨인 그레고리가 어느 날 아침에 벌레로 변했던 것처럼, 나 역시 그렇게 될 수 있지 않을까? 직장 상사는 물론, 가족에게까지 버림 받고 점점 쓸모없어지다가, 마침내는 자신의 죽음을 모두가 반기는 그런 존재가 되지는 않을까? 그리고 작가는 후반부의 서술을 통해 그러한 인간 실격이 반복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현대인은 남들에게 인정받아야 한다는 불안에 시달린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 안에 스스로 갇히기를 선택한다. 마지막 작품인 「굴」은 동굴 안에 은둔을 선택한 자의 시점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는데, 외부의 침입과 개입을 극도로 경계하고 거부하는 신경질적인 모습은 '사생활'을 목숨과도 같이 여기는 우리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만약 사정이 그렇다면, 왜 나는 망설이고 있으며, 왜 나는 그 침입자를, 어쩌면 나의 굴을 결코 다시 보지 못할 수도 있는 가능성보다 더 많이 두려워한단 말인가. 그런데 나의 굴을 못 본다는 것은 다행스럽게도 불가능한 일이니, 성찰을 통해 비로소 그 굴이 나에게 무슨 의미를 지니는가를 분명히 할 필요도 전혀 없을 것이다. 나와 굴은, 내가 아무리 불안하더라도 고요하게, 고요하게 이곳에 정착할 수 있을 테고, 자제하려고 애쓸 필요도, 온갖 의심에 맞서 입구를 열려고 애쓸 필요도 전혀 없을 정도로, 서로 매우 긴밀하게 하나로 결합되어 있고, 그 어떤 것도 우리를 지속적으로 갈라놓을 수는 없으며 어떻게든 나는 결국은 아주 분명히 아래로 내려갈 것이기 때문에, 나는 아무 짓도 않고 가만히 기다리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p.771)
카프카나 도스토예프스키처럼 인간 밑바닥에 깔린 내면을 정교한 언어로 포착하는 작가들을 보면 참 신비하다. 일반적인 사람은 편린처럼 지나가는 찰나의 느낌을 집요하게 추적하여, 때로는 광기처럼 보이는 인간의 근본적인 결핍과 불안을 보고한다. 물론 그것이 정신이상자의 수기처럼 보인다면, 모든 이에게 기본적으로 광기가 내재되어 있다는 말이기도 하리라. 그럴 수 있다. 누구나 아플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 결핍을 인지하고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평생에 걸쳐 치유가 안 될 수도 있는 병이지만, 그래도 더 나은 하루를 살기 위해 애써야 한다. 그 끝이 비루한 죽음일지라도, 그 과정에서 수많은 상처와 낙심을 겪을지라도 존재의 최선을 보일 필요가 있다. 그렇다, 카프카가 내리는 결론과는 양상이 많이 다르다. 그는 인간에 내재한 갈망과 슬픔을 파악하는 데에 능통했지만, 정작 우울을 해결할 해답까지 제시하지는 못했다. 그렇다고 그를 비난하거나 폄하하지는 않겠다. 그 정도만 해도 잘한 거야, 카프카. 그가 쓴 작품들이 대부분 죽음으로 귀결되거나 비인간의 시점으로 쓰인 이유는 언제나 그가 인간의 존재와 정체성에 대해 고민했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대, 멋진 삶을 살았다. 생전에 빛을 못 보아도, 꾸준히 그 길을 걸어준 것이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