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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프리트의 서재입니다
  • 초판본 벤허 (1900년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디자인)
  • 루 월리스
  • 19,800원 (10%1,100)
  • 2020-03-20
  • : 226

 친한 지인이 선물해 주어서 읽게 된 책이다. 소설로 읽으면서 나의 몇 가지 오해가 깨졌다. 아주 어렸을 적에 『벤허』를 만화책으로 보았을 때, 벤허와 메살라의 대립과 전차 대결이 주로 강조되었고, 결말은 벤허의 어머니와 여동생 티르자의 문둥병을 나사렛 예수가 치유한 후 가족이 감동적인 재회를 맞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리고 실사화 영화가 1959년인 것을 감안해도, 적어도 20세기에 출판된 줄 알았는데 1880년 작품인 것도 놀라웠다. 주요 영문학 작품의 목록과 출판 시기를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미국 대중문화사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던 이 소설을 몰랐던 것도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들었다.


 외적인 분석은 이 정도면 충분하다. 『벤허』의 큰 줄기는 유다(벤허)가 억울한 누명을 쓰고 그것을 극복하는 여정이지만, 또 다른 줄기가 뻗어나가고 이것은 결말에 지대한 영향을 준다. 이 책의 부제인 '그리스도 이야기'가 그렇다. 작품 초반부터 작가는 나사렛 예수에 대한 예언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장치를 마련한다. 벤허의 통쾌한 복수를 바라는 이들은 답답함을 느낄 것이다. 대체 언제 메살라를 만나서, 그에게 이 치욕과 분노를 돌려줄 것인가? 동시에 독자는 로마의 압제하에 놓인 이스라엘의 비참한 현실을 보며, 이 부당한 상황을 타개할 존재를 간구하게 된다.


 바라는 대로 벤허는 메살라와의 대결에 승리한다. 그러나 그 사이에 청년의 생각은 많이 달라져 있다. 자신을 노예로 만들고, 가족과 뿔뿔이 흩어지게 만든 로마였으나, 그는 더 이상 로마로부터 이스라엘을 해방시킬 메시아를 바라지 않는다. 유대인으로 태어나 평생 예언을 믿어 왔던 그는 자신의 영혼을 구제할 그리스도를 믿게 된다. 그리고 작품의 결말은 벤허가 십자가에 매달리는 예수를 바라봄으로써, 그리고 그가 흘린 피를 이어가겠다고 다짐함으로써 끝난다. 그리하여 이야기의 마무리는 통쾌한 복수도, 감동적인 가족의 재회도, 인물들의 완벽한 치유와 성장도 아니다. 오히려 이 다사다난한 인간사의 주인공은 한 분임을 선언하는 듯하다.


 미국의 독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온 이유와 십자가에 매달리심으로 죄를 대속하시는 것, 그리고 이후의 여정들에 대해 익히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성경이 아닌 다른 이의 눈으로 본 십자가 사건이 조금 더 색다르고 특별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요지는, 예수 그리스도는 로마의 압제를 받는 이스라엘 백성만 구원하기 위해 이땅에 오신 것이 아니다. 끝없이 자신을 내세우는, 자신의 힘과 지혜로는 십계명의 한 구절도 지키지 못하고, 성경의 첫 줄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다. 그 놀라운 사랑만이 등장인물들을 감도는 복수의 사슬을 끊을 수 있다.


 세상은 여전히 인과율의 노예다. 자신이 노력한 만큼 보상 받아야 하고, 잘못을 한 사람은 처벌을 받아야 한다. 지극히 당연한 말이다. 그러나 때로는 노력한 만큼 보상을 받는 행위가 타인의 권리를 빼앗을 수도 있음을 망각한다. 나에게 해악을 끼친 자를 용서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한다. 억울한 일을 당하면 똑같이 보복해야 한다는 집념에 스스로를 파괴한다. 그 끝없는 복수와 증오의 고리가 각 개인을 구속한다. 그러면서 그들은 "나는 자유롭다"고 선언한다. 만약 벤허가 메살라를 향해, 그리고 로마를 향해 불 같은 증오로 맞섰다면, 무슨 유익이 있었을까? 체제에 순응한 것이 옳다는 의미가 아니다. 아닌 것에 대해서는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자신을 파괴하는 행위는 결국 전이되기 마련이다. 복수에는 관용이 없다. 증오에는 자비가 없다. 나는 그저 모두 안에 잠재된 사랑을 발견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아무리 기술과 지식이 늘어나도 개선될 수 없는 이기심이 사랑으로 치유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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