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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심문관의 비망록
  • 안토니우 로부 안투네스
  • 16,650원 (10%920)
  • 2016-04-25
  • : 694

 문학은 반드시 시대를 반영한다. 제 아무리 거기서 벗어나려고 해도 작가의 삶에 드리운 시대의 그림자는 그가 창조한 세계에 그대로 투영된다. 주제 사라마구의 소설과 안토니우 로부 안투네스의 비망록을 보고 있자면, 포르투갈이라는 내가 한때 동경했던 나라의 연약한 모습을 그대로 보게 된다. 반도라는 지리적 이점이 있으나, 힘을 갖지 못하면 섬과 같이 고립되어 버리는 나라, 제국주의의 무력으로 시대를 호령한 적 있으나 이제는 과거의 그늘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는 국가, 모든 개혁과 혁명에 대해 유순하게 받아들이는 태도까지, 포르투갈의 지성들이 바라보는 조국의 적나라한 모습은 그들의 적대적인 비평가가 우려했던 사항들 그대로이다. 나는 『대심문관의 비망록』을 통해 길을 잃은 포르투갈의 현실을 엿본다.

 

 제목은 엄밀히 말하면, 대심문관의 매뉴얼이라고 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속 유명한 에피소드 탓인지, 또는 주제 사라마구의 『수도원의 비망록』 때문인지 비망록이라는 무게가 주는 진지함과 엄숙함이 독자를 매혹한다. 그러나 진술을 들어 보면, 종잡을 수 없는 화자들의 회고가 마치 강압과 고문에 의해 강제로 서술된 듯한 인상을 준다. 마침표 없이 끝없이 늘어지는 문장이나 반복해서 등장하는 대사는 화자들의 정신 상태가 하나같이 온전하지 못함을 보여준다. 정신과 의사인 저자가 환자들의 수기를 배껴 쓰는 느낌도 받았다. 작가가 치밀하게 설계한 세계관 속에 인물들의 이야기가 녹아들면서도 복잡하게 얽힌 관계도를 쉽게 정리하기 힘들었다.


 주요 화자로 등장하는 주앙, 티티나, 파울라, 밀라, 그리고 모든 사건의 원흉인 프란시스쿠는 모두 시대에 희생된 이들이다. 파시즘은 사람들의 일상 구석구석을 파괴했다. 시장에 거주하는 여자들을 비참하게 만들었고, 무고한 이들이 학살 당하고, 고문을 겪어야 했다. 올바르지 못한 자들에게 쥐어진 권력은 그토록 잔혹하게 사람들을 무너뜨린다. 인상 깊은 서술자는 호메우인데, 그는 정신지체를 앓는다는 이유로 부당한 대접을 받는다. 그것이 꽤나 담담하게 진술되고 있어서 기괴한 인상을 준다. 이밖에도 자신들이 겪은 끔찍한 학대와 고통을 진술하는 이들의 기저에 있는 고통이 전달된다. 그러면서도 악행을 저질렀던 프란시스쿠 역시 비참한 말로를 보내는 것을 보고 왜곡된 시대 정신이 얼마나 많은 이들의 인생을 흔들어 놓는지 다시 한 번 절감한다.


 각 나라는 저마다의 아픈 역사를 지니고 있다. 포르투갈도 예외는 아니었다. 국가 전역을 휩쓰는 사상의 대립과 증오의 물결을 통과해야 했다. 그 뒤에 남은 것은 상처 받고 결핍이 있는 자들의 처절한 사투였다. 나는 그런 상황일수록 시대에 굴복하지 않는 정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두 가지 의문이 남는다. "과연 정신력만으로 버틸 수 있는 문제인가? 나를 범죄자 취급하고, 폭행하고, 고문하는 상황 속에서 온전함을 유지할 수 있을까?" 그리고 "나는 그러한 상황이 닥쳤을 때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을까?"이다. 시대의 흐름에 타협하는 것이 그토록 나쁜 일인가? 정확한 판단은 역사가 한다고 하지만, 그 말은 당사자들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공산주의자냐 아니냐의 이분법으로 서로를 판결하고 처벌하는 20세기 최대의 사상 전쟁에서 누가 자유로울 수 있었을까? 시간이 꽤 지났음에도 여전히 판단이 어렵다.


 결국 눈앞에 보이는 현실을 넘어선 시각을 가져야 한다. 안투네스는 시대 정신에 굴복한 자들의 비망록을 내놓으면서, 자연스럽게 그에 굴복하지 않는 정신을 지녀야 했다. 그것은 참으로 유지하기 어려운 일이다. 수많은 적대자들을 용납하면서도 자신의 주장을 꺾지 않아야 하니까. 우리가 그토록 고되게 쟁취한 민주주의 본질은 결국 "너와 나의 다름을 인정한다"가 아닌가? 특정한 사상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상대를 통제하고 비난할 권리가 과연 우리에게 있을까? 아무리 터무니없다고 하더라도 상대의 생각을 존중하고 이해하려는 마음이 우리에게는 남아 있을까? 그 정도로 지금의 사회는 성숙한가? 만약 이 대답이 망설여진다면, 여전히 우리는 더 많은 역경을 거쳐야 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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