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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독교의 기본 진리 (포켓북)
  • 존 R. 스토트
  • 9,000원 (10%500)
  • 2015-11-13
  • : 1,148

 사랑의 하나님을 알기 전까지, 나에게 그분은 '가장 합리적'이라고 납득할 만한 분이었다. 숱한 종교들과 철학에서 기어코 결점을 발견해내는 나의 성정은 기독교를 "밑져야 본전"이라고 여기고 믿게 만들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이 믿음은 보답 받을 것이고, 만약 죽음 너머가 허무에 그친다 해도 그게 살아 있는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라는 질문을 내세우며 나의 얄팍한 믿음을 합리화했다. 그러나 몇 년 전 사랑으로 나를 깨뜨리신 이후, 얼마 전 그분이 나를 끝내 구원하실 것을 확신한 후, 진정한 믿음은 단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나 납득하는 것에서 멈추지 않음을 알았다. 『기독교의 기본 진리』은 내가 도달한 이 지평이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음을,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많은 성도들이 목도한 곳까지 왔음을 알려주는 좋은 지표가 되었다.


 세상은 눈앞에 보이는 결과에만 집중한다. 현재 펼쳐진 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 자들의 끈질긴 사투에서 비롯되었음을 알지 못한다. 또한, 끝내 자기 자신을 극복하지 못한다. 자신을 부인할 수록 참 생명을 얻고, 자신을 드러내려 할 수록 사망에 가까워짐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에 대해서는 존 스토트도 동감한다: "진정한 자기 부인은 진정한 자기 발견이다.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요, 자살 행위나 다름없다." 어떤 이들은 과학 기술과 온갖 사상이 시대를 이끌고, 개인주의와 자본주의가 보편적인 가치가 된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구시대적이고 미련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그분의 이름을 전하는 것에 위축된다. 하지만 지금은 어느 때보다도 참된 복음이 필요한 시기이다. 지식은 넘쳐나도 진리는 제한되어 있다. 모든 것이 영상과 텍스트로 변환되어야 하는 시대에, 언어가 담을 수 없는 사랑의 가치는 너무나 왜곡되고 축소되어 있다.


 이 책을 읽으며,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알지 못하는 나의 친구들을 위해 기도했다. 그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으면, 돈과 사회적 지위가 결코 해결해 주지 못하는 삶의 근본적인 결핍이 보인다. 하루 속에서 즐거움을 찾아 헤매고, 인생의 정답을 찾고 싶어 몸부림치지만, 하루 속의 작은 불친절과 불운에도 절망하고, 확실하지 않은 미래에 체념한다. 이 고통스럽고 위태로운 시대를 통과하고 있는 것은 똑같은데, 분명 그들이 나보다 돈을 많이 벌고,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고 있는데, 왜 나의 마음은 이토록 여유가 넘치고 그들의 마음은 메말라 보이는가? 거기에는 한 가지 정답만 남아 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기 위해 부활하심을 영접하고, 그 사실을 삶으로 전파하려 한다는 것이다. 그 과업을 신실하게 이끄시는 하나님의 손길 아래에서, 어떠한 불안과 위기도 나를 뒤흔들 수 없다.


 비난과 경멸과 원망은 얼마든지 환영한다. 참 배부른 소리를 한다고, 가난과 실패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모르는 주제에 한가한 소리를 한다고, 세상의 경쟁 속에서 낙오한 자의 비겁한 자기 변명이라는 내면의 목소리는 누가 말하지 않아도 불쑥 튀어나오곤 하니까. 그러나 나는 반대로 묻고 싶다. 이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 영원한 가치가 있는가? 돈을 많이 번다고, 불멸의 명예를 얻는다고 해서, 원하는 사랑을 얻는다고 해서, 간절히 염원했던 꿈을 이뤘다고 해서, 그로 인한 기쁨이 무한했다면, 세계는 이렇게 고통 받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성경에 적힌 복음을 더 이상 과소평가하지 않겠다. 그것은 이성과 감정과 논리와 언어를 초월하여 인간의 영혼을 근본적으로 바꿀 힘이 있다. 기독교의 기본 진리는 철저히 말씀 위에 세워져야 한다. 말씀을 삶으로 담아내는 것은 진정 내 힘과 의지로는 불가능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배우지 못하면, 네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용서하는 명령에 도저히 순종하지 못한다. 어쩌다 친절함을 베푸는 것은 가능해도, 마음 속의 우물은 금방 메마르고 만다.


 하나님은 사랑 자체이시며, 죄는 사랑의 반대편에 선 모든 것이다. 이러한 해석에 나 자신도 확신을 못하던 시절이 있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수많은 범죄와 폭력과 증오가 먼저 떠올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사랑을 오해하고, 자신의 이해 범위로 축소시킨 인간의 잘못이다. 사랑은 절대적으로 선하다. 사랑이 아니었으면, 이 놀라운 구속의 역사는 시작되지도 않았다. 창세기에 묘사된 인류의 타락과 뱀의 머리를 밟을 자에 대한 예언, 동정녀에게 나신 메시아와 마침내 십자가에 매달려 언약을 성취하신, 그 영원히 찬양받아 마땅할 이야기는 사랑이라는 이유로만 설명이 가능하다. 사랑은 납득한다고 알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분이 먼저 죄에 가려져 창조주를 알아보지 못한 우리에게 손을 내밀었다. 믿음이 없이는, 이 사실은 읽기에도 거북한 정보에 불과하다.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볼 때에만 자진하여 자기를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따르게 된다. 우리의 작은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비하면 무색할 정도다. 만일 심판받아야 마땅한 우리를 위해 수치와 고통을 당하신 그분의 사랑의 위대함을 한 번만이라도 접하게 된다면, 우리가 행할 길은 오직 하나뿐임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시는 분을 어찌 부인하거나 거절할 수 있겠는가? (p.191)

 

 그러므로 모두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이 전파되어야 한다. 만약 그 사랑의 실마리라도 맛본다면, 그 자의 인생은 근본적으로 변화된다. 이전에 알지 못했던 신비가 이해되고, 전에 누리지 못한 감격이 그 이에게 남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 해도 세상을 더욱 사랑하여 돌아갈 수도 있다. 그러나 상관 없다.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드러나는 결과에 목숨을 걸지 않는다. 남들이 실패했다고 조롱해도, 그의 마음에 그리스도가 계시다면 다시 사랑할 수 있다. 사랑은 결코 손상되지 않는 가치이며, 피조물인 인간과 절대적으로 구별된 존재이신 하나님께 닿을 수 있는 통로이다. 그 사랑을 믿는 자에게 불가능이란 없다. 그렇기에 나는 더 이상 세상의 논리와 그리스도의 복음 사이에서 타협하지 않겠다. 나로부터 나오는 미약한 능력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역사하실 것을 믿으며 나아가겠다.


 이제는 말을 아껴야 한다. 성경을 읽을 때마다 예전에 발견하지 못했던 놀라운 섭리가 커다란 감동으로 다가온다. 그 묵상들을 모두 나누고 싶으나, 진리는 본래 언어를 거치는 순간, 진리가 아니게 된다. 주를 모르는 자들이 기독교를 '역설'적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러한 까닭이다. 도저히 이해하고 싶어도 이해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희생을 감수하는 이들을 미친 사람쯤으로 여기게 된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그러한 시선은 개의치 않는다. 하나님은 바로 그들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으니까. 올바른 복음은 오직 말씀으로만, 그리고 말씀을 드러내는 삶으로만 전해질 수 있음을 신뢰하며, 나는 이제 당당히 이 길을 걸어가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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