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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빛을 먹는 존재들
  • 조이 슐랭거
  • 21,420원 (10%1,190)
  • 2025-10-30
  • : 11,305

과학은 생명이나 죽음, 지능, 의식에 대해 모두가 동의하는 정의를 가지고 있지 않다. 단어들은 분명 중요하지만, 그 단어들의 정의는 확정되지 않았고, 따라서 아주 넓게 열려 있다. 지능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머릿속에서 곧장 인간의 지능으로 도약해 버린다. 식물의 지능은 어떨까? 우리의 지능과 상당히 다르게 보이기 때문에 식물에게는 지능이 전혀 없는 것일까? 인간의 인지에 빗대어 식물을 평가하는 건 그저 식물을 모자란 사람, 덜 떨어진 동물로 만들 뿐이다. 이것이 의인화의 위험성이다.

식물학에서는 중요한 무슨 일인가가 벌어지고 있다. 과학은 어쩌면 되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를 낭떠러지로 다가가고 있다. 식물은 말이 없고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존재라는 우리의 믿음은 완전히 잘못된 믿음일지도 모른다. 자연은 결코 매끈한 평면이 아니며, 언제나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수많은 주름과 표면을 품고 있다. 세상은 창이 아니라 프리즘이다. 어디를 보든 우리는 새로운 굴절을 발견한다.

식물은 들을 수 있다. 식물의 환경에서는 어디든 소리로 가득하고, 식물은 자기 몸을 주파수와 진동의 세계에 알맞은 모양으로 만들었다. 현재 '식물음향학'이라는 분야가 태동하고 있다.

식물은 볼 수 있다. 2016년 남세균에서 카메라와 유사한 눈 구조물이 발견됐다. 남세균에게 보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남세균으로부터 진화한 식물계도 사실은 그 능력을 전혀 버리지 않았을 거라는 가능성이 열린다.

식물은 기억할 수 있다. 철새들이 매년 똑같은 도래지로 돌아오는 것 같은 유전적인 종류의 기억 말고, 개별 개체의 기억, 탄력적인 기억. 환경이 바뀌면 따라 바뀌는 기억. 식물은 어디에 기억을 저장할까? 그건 아직도 수수께끼의 영역에 있다.어쩌면 유기체 전체가 뇌일 수도 있다.

식물은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 종들 사이의 대화는 항상 일어나고 있다. 단지 인간의 지각에는 감지되지 않을 뿐이다. '바이오커뮤니케이션'은 식물이 다른 종들과 맺는 관계, 그리고 심지어 동물들과 맺는 관계를 연구하는 분야다. 아름다움은 일종의 의사소통이다. 꽃 자체가 동물에게 아름답게 보이기 위한 진화의 산물이다.

식물은 의태할 수 있다. 보킬라 트리폴리올라타라는 덩굴식물은 자기 옆에서 자라는 거의 모든 식물의 형태로 변신할 수 있다. 호밀과 귀리는 원래 잡초였지만, 농부들에게 뽑히지 않기 위해 밀을 모방하였다. 흉내를 가장 잘 낸 놈들이 살아남았고, 끝내는 작물이 되었다.

식물은 다른 식물과 동물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대단히 복잡한 화학물질을 제 몸에서 합성해 내는 천재적 능력이 있다. 우리가 식물을 먹는 생물로 존재하면서 식물에서 매일 들이마시거나 섭취하는 수천 가지 화합물들이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식물은 가족을 알아본다. 남남 사이인 식물들에 둘러싸여 있을 때는 뿌리를 왕성하게 내리고 공격적으로 확장한다. 그러나 가족 옆에서 자랄 때는 예의 바르게 뿌리 성장을 제한하여 형제자매가 자기 곁에서 살아갈 공간을 남겨둔다. 식물 부모들은 자기 자식의 삶이 조금이라도 더 순조롭게 시작할 수 있도록 힘껏 노력한다.

식물이 인격체라는 개념 자체는 인류 문화만큼이나 오래된 것이다. 지구 방방곡곡 토착민들의 철학에서는 흔히 식물을 친척이나 조상으로, 아니면 어떤 식으로든 자체의 권리를 지닌 인격체로서 이해한다. 식물이 사람이라는 말이 아니라, 사람들도 인격체의 한 부류일 뿐이며, 동물들 역시 그 한 부류라는 것이다. 인격체란 그에게 주도성과 의욕, 그리고 자신을 위해 존재할 권리가 있음을 의미한다.

'빛을 먹는 존재들'은 식물의 지능을 다룬 책이다. 책 표지에는 '온몸으로 경험하고 세상에 파고드는 식물지능의 경이로운 세계'라는 홍보문구가 박혀있다. 그렇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정말로 놀라게 된다. 경이로운 식물의 세계에. 더 나아가 생물 자체에 대한 기존의 생각마저 흔들린다. 우리는 너무 좁고 오만한 시야로 세상과 자연을 바라보았다.

책을 읽다 보면 수많은 식물들의 다채롭고 다양한 생존 방법 앞에서 식물지능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과학은 보수적이고 엄정하다. 속속 밝혀지는 경이로운 식물의 모습에도 불구하고 식물의 지능은 아직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식물의 뇌는 발견되지 않았다. 어쩌면 식물은 그 몸 전체를 뇌로 사용하는 유기체인지도 모른다. 마치 다리에 뇌가 분포된 문어처럼. 그러나 그 가정은 '어쩌면'이다. 밝혀진 것은 아직 없다.

저자는 인간이 지능이라는 단어를 인간의 속성으로 '오염'시켜 놓았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지능이라고 하면 학문적인 지성을 떠올린다. 그러나 생물의 지능은 학문적 지능이 아니라 생물학적 지능이다. 모든 유기체는 지능적으로 행동한다. 살아갈 방법을 찾는 것, 그것이 지능이다. 인간의 지능을 식물지능의 척도로 삼는 것은 지나친 의인화이고, 결국 상상력의 실패다. 과학은 끝내 식물에 지능이 있다는 결론에는 도달하지 않을 수도 있다.

식물은 지능이 있을까 없을까?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진리일까? 우리는 무엇이 진리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학문은 학자들의 다수결이다. 패러다임이 바뀌면 우리가 알고 믿던 진리가 하루 아침에 뒤집어질 수도 있다. 우리는 무엇을 믿을 수 있을까? 우리는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우리는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직접 확인한 적도 없이 그저 남이 하는 얘기만 듣고서.

헌법재판소의 내란수괴 윤석열 탄핵 판결날 나는 윤석열의 사저 앞으로 가기 위해 한남동으로 향했다. 그러나 길을 잘못 들어 수많은 태극기 부대의 행렬에 파묻히고 말았다. 탄핵 인용 선언이 나오는 순간 수 많은 사람들이 분노의 욕설을 퍼뜨렸다. 수 만 명의 사람중에 윤석열이 반란수괴이고 탄핵되어야 한다고 믿은 사람은 어쩌면 나 혼자였는지도 모른다. 내가 틀린 것일까? 혼자서 옆의 수만 명 사람들과 다른 생각을 하는 내가 틀린 것일까?

얼마 전 독서 모임을 같이했던 지인에게서 '꼰대'라는 소리를 들었다. 남의 말을 안 듣고 자기 생각을 강요한다는 지적이었다. 그 말을 듣고 많은 생각을 했다. 난 내 의견을 강요할 생각이 없었다. 그저 내 생각을 말했을 뿐이다. 그리고 나는 내가 옳다고 믿었다. 그 사람은 나를 꼰대로 여겼지만, 나는 그 사람의 태도가 닫혀 있다고 느꼈다. 기존의 인식에 갇혀 있다고 느꼈다.

며칠 계속 생각을 했다. 그리고 나 자신을 믿을 수 밖에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물론 남들에게 압박감을 주는 듯한 내 말이나 태도에 대해서는 많은 고민과 반성과 변화가 필요하다. 나는 남을 바꿀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만이다. 나는 내 지식과 내 믿음에 대해서 나를 믿을 뿐이다. 물론 나는 틀릴 수 있다. 내가 아는 것은 티끌에 불과하고, 그것 또한 거의 대부분 남의 말을 주워들은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진실을 누가 판단할 수 있을까? 인간은 모두 주관적이다. 저마다 자신 만의 진실과 진리를 갖고 있다. 신이 판단할 수 있을까? 설사 신이 있다고 하더라도 신의 뜻을 말하는 것은 사람들이다. 그것이 진짜 신의 말이라고 누가 증명할 것인가? 신이 직접 나타난다고 한들 그 신을 누가 인증할 것인가? 모든 존재는 자신의 환경에서 자신의 삶을 살아가며 자신의 믿음을 믿는다.

결국 최종적인 판단은 나 자신이 할 수 밖에 없다. 나를 믿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대신 내가 무지함을, 내가 어리석음을, 내가 틀릴 수 있음을 끊임없이 자각해야 한다. 나 자신을 늘 비판하고 의심하고 검증해야 한다. 모를 때는 배우고, 틀렸을 때는 고쳐야 한다. 그래도 결국에는 나 자신을 믿을 수 밖에 없다. 그러다가 그 믿음이 맹목이 되고, 맹신이 되어 버리면 어떡할 것인가? ?

사실 정답은 없다. 그런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할 뿐이다. 계속해서 배우고 공부하고 귀 기울이고 고민하고 성찰해야 한다. 결국 최종적으로 내가 믿어야 할 것은 하나 밖에 없다. 바로 나의 이성(理性)이다. 그리고 그 이성은 인간과 생명과 자연에 대한 연민과 공감을 기반으로 성립되어야 한다.

그 이성을 튼튼하게 다지기 위해서 나는 계속 나의 세계를 확장해야 한다. 그럼에도 결국 내 지식과 믿음이 망상과 맹목일 가능성은 언제나 있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 늘 열려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 열려 있음이 오류와 거짓과 왜곡을 받아들이는 것이 될 수는 없다. 그래서 어려운 것이고, 늘 회의하고 고민할 수 밖에 없다. 그런 불안속에서도 최종적으로는 나를 믿고 살아가야 한다. 그리고 그 믿음에 대한 책임과 결과는 내 삶 자체가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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