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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카탈로니아 찬가
  • 조지 오웰
  • 9,000원 (10%500)
  • 2001-05-15
  • : 7,621

"대략적으로 말해서, 폭발 한가운데 서 있는 느낌이었다. 크게 꽝 하는 소리와 함께 사방에서 빛이 번쩍거려 앞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엄청난 충격을 느꼈다. 통증은 없었다. 아주 격렬한 충격만 느꼈을 뿐이다. 전극에 몸이 닿았을 때의 느낌과 동시에 완전한 무력감을 느꼈다. 짓눌리고 움츠러들어 무(無)로 변해버리는 느낌이었다. 앞에 있던 모래주머니들이 엄청난 거리로 멀어졌다. 아마 번개에 맞았을 때도 이런 느낌이 아닐까. 나는 즉시 총에 맞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굉음과 섬광 때문에 바로 옆의 소총이 오발되어 맞은 줄 알았다. 이 모든 일이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났다. 다음 순간 나는 무릎이 꺾이면서 쓰러졌다. 머리가 땅에 부딪히면서 꽝 하는 소리가 크게 났다. 그러나 다행히도 다치지 않았다. 멍하고 어찔어찔한 느낌이었다. 매우 심하게 다쳤다는 의식은 있었으나,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통증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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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알이 목을 관통했다는 것을 안 순간 나는 이제 끝장이라고 생각했다. 총알이 목 한가운데를 관통하고도 살아남은 사람이나 짐승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입 가장자리에서는 피가 뚝뚝 떨어졌다. '동맥이 날아갔구나' 나는 생각했다. 경동맥이 잘렸을 때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는지 궁금했다. 내가 죽음을 예상한 시간이 2분은 되었을 것이다. 그것도 재미있었다. 그런 시간에 어떤 생각을 하게 되는지 아는 것도 재미있다는 뜻이다. 처음 떠올린 것은, 다분히 관습적이게도, 아내였다. 두 번째 떠오른 것은 세상 - 생각해 보면 결국 무척이나 마음에 드는 세상이었다 - 을 떠나야만 한다는 사실에 대한 격렬한 분노였다. 나는 이 터무니없는 불운에 격분했다. 얼마나 의미 없는 일이냐! 전투도 아니고 이 염병할 참호 한 귀퉁이에서 순간의 부주의 때문에 죽게 되다니!"
(238쪽 부터~)

1936년 잉글랜드 작가 조지 오웰은 '신문 기사를 쓸까 하는 생각으로' 스페인에 갔지만, 가자마자 의용군이 되었다. '그 시기, 그 분위기에서는 그것이 해볼만한 가치가 있는 유일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카탈로니아 찬가'는 조지 오웰이 스페인 내전에 참전한 기록을 적은 참전기이다. 그리고 동시에 전장의 초연하면서도 달아오른 열기를 보여주는 기록물이다. 그리고 동시에 파시스트 반란군 앞에서 연합 세력인 노동 계급에 대한 탄압에 골몰한 좌파 권력에 대한 고발문이다. 그리고 동시에 인간의 품위에 대한 믿음과 실천의 고백록이다.

나는 스폐인 내전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다. 1930년대 후반 스페인에서 파시스트 군인 프랑코가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것. 이에 대항하여 헤밍웨이 등 수많은 외국의 지식인들이 공화정부를 지키기 의해 목숨을 걸고 참전했다는 것. 그럼에도 프랑코는 승리하여 끝내 수십 년간 계속될 파시스트 정권을 세웠다는 것 정도?

마찬가지로 나는 조지 오월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거의 없다. 그럼에도 조지 오월의 책을 읽은 것이 없다는 것에 부담감을 가끔 느끼곤 했는데, 그것은 내가 수년 전에 우연히 보았던, 읽었다기 보다는 보았던 그의 짧은 인용문 때문이었다. 정확한 내용이 기억나지는 않지만 사회주의에 대한 글이었던 것 같다. 그는 사회주의를 얘기하면서도 이념보다는 인간애를 우선하였고, 나는 그 짧은 글로 그에게 호감을 품게 되었다.

그후 그를 잊어버렸다가 올해 초 '조지 오웰 사후 75년 이벤트'로 그의 책 몇 권이 재출간 되면서, 그의 책을 뭐라도 읽어야 한다는 강박감이 살짝 들었다. 그래서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을 도서관에서 빌렸다가 중간까지 읽고는 만기일이 되는 바람에 반납하였다. 그러다가 밴드에서 독서 토론으로 '1984'를 하면서 처음으로 그의 책을 제대로 읽게 되었다. 그리고 며칠 전 도서관에서 제목에 끌려서 이 책 '카탈로니아 찬가'를 빌려 읽게 되었다.

조지 오웰의 글을 읽을 때 마다 느끼는 건데, 그는 글을 쉽고 평이하게 쓴다. 화려한 수식이나 과장된 치장 없이 담담하게 글을 써 내려간다. 그러면서도 명료하고 진솔하다. 이 책 또한 마찬가지였다. 참혹한 전쟁터의 경험을 기록한 글임에도 그 섬뜩하고 치열하고 험악했을 경험을 진솔하고 담담하게 써내려간다. 심지어 앞에서 인용한 것처럼, 자기 자신의 목을 관통하는 총상조차 관찰자처럼 차분하게 써내려 간다. 덕분에 나 또한 궁핍하고 참혹한 전쟁터의 현실에서, 엄혹한 파시스트의 공격 앞에서 분열하는 이념 속에서, 웃기기도 하고, 저열하기도 하고, 치열하기도 하고, 숭고하기도 한 인간 군상의 다양한 모습을 차분하고 냉정하게 바라보게 된다.

조지 오웰은 의용군에 자원한 후 부대와 함께 제대로 된 소총조차 없이 전선으로 배치된다. 총알이 머리 위를 날라다니고, 고양이만한 쥐가 몸을 넘어 다니고, 진창이 된 참호 속에서 포개어서 잠이 들고, 몇 날 며칠을 씻지 못하고, 언제 터질 지 모르는 조악한 수류탄을 품고 다니고, 먹을 음식이 부족한 상황에서도 그들은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않는다. 그 궁핍하고 곤란한 상황에 적응해 살아가고, 그 누추하고 옹색한 생활은 그들의 일상이 된다. 그러다가도 어느 순간 때가 오면 그들은 그 궁상스러운 일상을 떨치며 용기있고 숭고한 모습으로 일어선다. 그럴 때 그들은 목숨조차 초개같은 치열한 전사가 된다.

그 '일상성'을 보면서 나는 깨닫는다. 지금의 내 모습 또한 내 본질의 모습이 아니라 내 일상의 모습이라는 것을. 살아오면서 변해온 것은 내가 아니라 나의 일상일 뿐이었다. 언제인가 때가 오면 나도 일상을 떨치고 내가 바라고 꿈꾸는 삶의 모습으로 용기 있게 일어설 수 있을까? 지금은 그럴 수 있다고 그저 스스로를 믿어야 할 뿐이다.

우리는 보통 스페인 내전하면 조지 오웰, 헤밍웨이, 앙드레 말로를 얘기하지만, 파시스트에 맞서 제대로 된 무기 조차 없이 제일 먼저 전장으로 달려간 사람들은 수많은 이름 없는 노동자들이었다. 비록 피고 지는 꽃봉우리처럼 짪은 시간이었지만 그들은 카탈로니아에서 차별 없고 평등한 세상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그들은 주저없이 전장으로 달려가 목숨을 던졌다. 그것이 바로 혁명과 해방의 뜨거운 열기였고, 조지 오웰은 그 열기속에 스스로를 던졌다.

근데 어떻게 그들은 패배했을까? 왜 공화주의자들은 패배했을까? 수 많은 사람들이 몸을 던져 싸웠던 스페인 내전은 왜 파시스트들의 승리로 끝났을까? 늘 그것이 궁금했었다.

그것은 자유주의 열강들의 야욕 때문이었다. 민주주의의 수호 보다는 자신들의 시장 보호를 우선한 서구 열강들의 방관 때문이었다. 프랑코 반란군을 적극 지원한 독일, 이탈리아의 파시즘 정권과 달리 영국을 비롯한 서구 자본주의 국가는 그저 방관만 했다. 공화주의자들을 지원한 국가는 오직 소련 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분열 때문이었다. 소련의 지원을 등에 업은 공산주의 세력은 파시스트 반란군의 진압 보다 내부 권력 쟁취가 더 급했다. 그들은 연합하여 파시스트 반란군에 저항했던 아나키스트들을 공격했고, 아나키스트 의용군의 일원으로 싸워왔던 조지 오웰은 몸을 숨겨 영국으로 도망쳤다..

삶은 가혹하고, 세상은 잔혹하고, 신은 불공평하다. 노동자는 궁핍하고, 부자는 배부르고, 악인은 승승장구하고, 밤길은 멀고, 해는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인간은 아름답고, 용기는 숭고하다. 


조지 오웰은 공화주의 세력의 분열과 거짓에 피로와 환멸을 느꼈다. 그러나 그 환멸도 그가 카탈로니아 해방 정국에서 느꼈던 혁명과 평등의 열기를 지울 수는 없었다. 조지 오웰은 자신이 알고 있는 진실을 알리기 위해서 이 책 '카탈로니아 찬가'를 쓴다. 그리고 나는 이 책에서 숭고한 아름다움을 마주한다.

책은 책을 부른다, 여행이 좋았을 때 새로운 여행을 계획하듯이, 등산이 좋았을 때 새로운 산을 오르듯이, 사랑이 달콤했을 때 또 다른 사랑을 찾듯이, 좋은 책은 또 다른 책을 찾게 만든다.

나는 이제 스페인 내전에 대해 더 알고 싶어졌다. 나는 이제 조지 오웰의 책을 더 읽고 싶어졌다. 그리고 나는 이제 갈등한다. 다음엔 '스페인 내전'을 읽을 것인가 아니면 '나는 왜 쓰는가'를 읽을 것인가? 좋은 책은 또 다른 책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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