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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든 것의 새벽
  • 데이비드 그레이버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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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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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중반 유럽의 법, 정치 사상가들이 (처음으로) 평등한 자연 상태라는 발상을 다루기 시작한다. 그것은 정부, 문자, 종교, 사유 재산 같은 서로를 구별해주는 중요한 수단들이 없는 사회를 말하는데, 유럽의 선교사들이 아메리카의 선주민들을 만나면서 시작된 변화였다.

당시 유럽은 끊임없이 이득을 추구하는 절대 권력 체제의 사회였다. 반면, 아메리카 선주민들은 적어도 어떤 남녀도 타인에게 예속되지 않는 자율적 삶이 보장되고, 강제적 처벌이 없는 자유로운 사회를 이루고 있었다. 평등이라는 개념이 아예 없는 유럽인들과 자유롭기 때문에 누구나 평등한 아메리카 선주민들은 서로의 사회를 알아가는 과정에서 '평등'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하고, 이는 유럽 계몽주의 사상으로 이어진다.

아메리카 선주민 사회와 유럽 사회의 핵심적 차이는 부의 차이가 개인의 자유에 미치는 영향이었다. 선주민 사회에서는 부를 타인에 대한 권력으로 전환할 명백한 방법이 없는 반면, 유럽 사회는 소유에 대한 권력이 곧바로 인간 존재에 대한 권력으로 바뀔 수 있었다.

1703년에서 1751년 사이에 유럽 사회에 대한 아메리카 선주민들의 비판은 유럽의 사유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유럽의 관습에 처음 노출되었을 때 아메리카인들이 보였던 불쾌감과 혐오감은 수십 가지 언어로 수많은 대화를 거치며 차츰 진화하여, 권위, 건강, 사회적 책임,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유의 본성에 대한 논의로 발전했다.

예수회 같은 일부는 자유의 원리를 직설적으로 비난했고, 식민지 정착인, 지식인, 본국의 독서 대중은 그것을 도발적이고 매력 있는 사회적 제안이라 보았다. 유럽의 제도에 대한 아메리카인들의 비평은 위력이 너무도 강해 기존의 지적, 사회적 합의를 반대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최고의 무기로 선택했고, 위대한 계몽주의 철학자라면 거의 모두가 참여했다. 그 과정에서 자유에 대한 논의도 점점 평등에 관한 논의로 변해갔다.

"현재 우리가 가진 자유, 평등, 민주주의의 이상이 서구 전통의 산물이라는 생각은 사실 볼테르 같은 사람들에게는 엄청나게 놀랍게 느껴졌을 것이다. 앞으로 보겠지만, 그런 이상들을 선전했던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이구동성으로 그런 사상이 외국인들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 말했기 때문이다. "(31쪽)

신진 경제학자 A.R.J. 튀르고는 아메리카인들의 비평에 대항하여 사회 진화의 이론을 주장한다. 그는 사회적 진화가 항상 수렵에서 시작하여 목축으로 넘어가고, 그 다음에는 농경으로 갔다가 마지막에는 도시 상업 문명의 단계에 도달한다고 추론했다. 그의 주장은 애덤 스미스와 그의 동료들에 의해 인간 역사에 대한 일반 이론으로 가공되고, 얼마 안가서 유럽 사상가들과 대중들에게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자리 잡는다.

루소는 야만인들은 철학이 없고, 상상력이 없기 때문에 행복하다는 '어리석은 야만인의 신화'를 퍼뜨렸다.19세기 제국주의자들은 이 전형성을 열렬하게 채택했고, 거기에 다윈 진화론과 우생학같은 '과학적인 정당화'의 외피를 다양하게 추가하였다.

그러나 상상력이 부족한 것은 루소와 유럽 사회였다. 그들은 진정으로 자유로운 사회가 어떤 모습일지 상상하기 어려웠다. 반면 아메리카인들은 자의적인 권력과 지배가 어떤 것인지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고, 그것을 피할 수 있도록 자신들의 사회를 설정했다.

아메리카인들에게 개인의 자유와 공산주의 사이에는 모순이 없었다. 공유와 필요로 운영되는 '기본적 공산주의'는 자유의 조건이었다. 굶주린 사람이나 집이 없는 사람은 일 하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의 자유가 없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개인적 자유라는 유럽식 개념은 사유재산 개념에 필연적으로 묶여 있다. 이 결합은 고대 로마의 남성 가부장의 권력에서 유래한다. 이 관점에서 자유는 다른 인간에게 의존하지 않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제 1장을 읽었다. 놀라운 얘기다. 60년 가까운 삶을 살아오면서 처음 들은 얘기다. 비슷한 얘기로 미국의 연방제와 민주주의가 아메리카 선주민들의 영향을 받아서 만든 제도라는 얘기를 처음 들은 것이 불과 몇 달 전이다. '하우데노사우니', 다른 말로 '이로쿼이'라고 불리는 아메리카 선주민들의 연맹 체제를 보고 배운 것이라고 한다. '세계를 움직인 열 가지 프레임'이라는 책에 나온 내용이다.

근데 내가 더 놀란 것은 아메리카 선주민 사회는 완전한 자유를 누렸다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하기 싫은 것을 강제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고 한다. 설득 외에 강제나 형벌 같은 것은 없었다. 선주민 사회는 그렇게 자유로운 삶을 누렸기에 당연히 누구나 평등할 수 밖에 없었다. 70년대 존 웨인 서부극의 잔인하고 난폭한 '인디안'을 보면 자라온 나에게는 참 충격적인 이야기다.

헐리우드 미국 영웅주의에 물들어 청소년 시절을 보내고, 헐리우드 미녀 배우들을 보면서 심미안을 키우고, 서구 중심주의 교육을 받아며 살아온 내가 서구 중심주의 세계관을 극복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명박이 '뼛속까지 친미, 친일'이라면, 나는 뼛속까지 친서구, 친백인의 인간이라고 할 수 있다.

다행히(?) 태생부터 반골이고, 불공평에 알레르기 가까운 거부감이 있는 삐딱이였기에, 나는 끊임없이 의심하고, 회의하고, 비판하면서 나름으로는 서구 중심 주의라는 '세뇌'를, 최소한 논리적, 이성적으로는 극복해왔다고 믿었다.

그러나 나의 의심과 회의와 비판은 '자유, 평등, 박애'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유, 평등, 박애라는 천부인권은 유럽의 계몽주의 사상에서 나왔다고 알고 있었다. 비록 그것이 위선과 제국주의 수탈에 기인한 풍요를 기반으로 할 지라도. 근데 그것이 아니라고 한다. 자유, 평등, 박애의 뿌리는 아메리카 선주민에게 있다고 한다.

나는 자유와 평등의 구현이라는 민주주의는 실제 운영에 있어서 '합리성'을 기반으로 한다고 믿고 있었고, 많은 사람들에게 '소비'되는 아메리카 선주민들의 신비주의 내지는 자연주의는 일종의 악세사리로 여기고 있었다. 마치 자본주의 중산층에게 소비되는 '체 게바라'같은. 그러면서 아메리카 선주민들을 그저 피해자로만 여기고 있었고, 그들의 삶과 문화와 역사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이제 나는 그것이 나의 무지와 편견일 수도 있음을 깨닫는다. 나는 여전히 무지하다. '불혹'을 거쳐도 여전히 미혹 하고, '지천명'을 지났어도 여전히 안개 속을 헤매고 있고, '이순'을 눈 앞에 두고도 여전히 단단한 고집의 알 속에 갇혀 있다. 날은 저물고 있는데 길은 멀다. 심지어 내가 가는 길이 무슨 길인지조차 모르고 있다.

책은 말한다. '뭔가 지독히 잘못되어버린' 이 세계가, 어쩌다가 이런 상황에 빠졌는지 알기 위해, '선주민 비평가들의 안내를 받아 인간의 과거에 대한 증거에 새로운 눈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나는 그 뒤를 천천히 따라가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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