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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르크스가 옳았던 이유
  • 테리 이글턴
  • 18,000원 (10%1,000)
  • 2025-01-20
  • : 965

1. 마르크스주의는 끝나지 않았다.
마르크스주의는 이제껏 시도된 그 어느 비판보다 가장 면밀하고 엄격하며 포괄적인 자본주의 비판이다. 따라서 자본주의가 위력을 떨치는 한 마르크스주의도 마찬가지로 자기 본분인 비판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최근에 보면, 자본주의는 그 어느 때보다 혈기왕성하다. 전 지구적 규모에서 자본은 여느 때보다 더욱 집중되고 약탈적이며, 노동계급은 양적으로 늘어났다.

부와 권력의 엄청난 불평등, 제국주의 전쟁, 강화된 착취, 점점 더 억압적인 국가 등 자본주의는 상상할 수 없는 규모의 인간 파괴를 의미할 수 있고, 종말론적 환상은 오늘날 엄연한 현실주의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마르크스주의가 끝났다고 주장하는 것은 방화범이 교활하게 활기치고 있다고 해서 소방 활동이 시대에 뒤떨어진 일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시대에 뒤떨어진 것은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 자체이다. 자본의 끊임없는 재생산은 자본주의가 벗어날 수 없는 경계이다. 자본주의는 거대한 경제적 발전을 이루었다. 하지만 때가 되면 자본주의가 발생시킨 부가 모두에게 돌아갈 것이라는 신화는 조금도 달성되지 않았다.


2. 마르크스주의는 도그마가 아니다.
자본주의는 피와 눈물로 구축되었다. 근대 자본주의 국가는 마오쪄둥의 중국이나 스탈린의 소련 못지않게 혐오스러운 노예제와 대량 학살, 폭력과 착취의 역사가 낳은 산물이다. 다만 자본주의는 충분히 오래 살아남아 이런 공포의 많은 부분이 잊혔는데, 스탈린주의나 마오주의는 그렇지 못했을 뿐이다.

마르크스 자신은 경직된 도그마와 군사 테러, 정치 억압과 전제 국가 권력을 비판했다. 사회주의 운동은 냉철한 유물론적 주장이지, 신심에서 우러나온 관념론자의 주장이 아니다. 사회주의는 숙련되고 교육받은 정치적으로 세련된 대중, 번성하는 시민 조직, 발전된 기술, 계몽된 자유주의 전통, 민주주의 습관 등이 필요하다.

역설적으로 스탈린주의는 마르크스 작업의 신뢰를 떨어뜨렸다기보다 그 타당성을 입증한다. 스탈린주의가 어떻게 탄생했는지 명확한 설명을 원한다면, 마르크스주의로 가야한다. 마르크스주의가 어떤 물질적 조건에서 발생하고 어떻게 기능하며 어떻게 실패할 수 있는 지를 알아야 한다.


3. 마르크스주의는 결정론이 아니다.
마르크스주의는 두 개념, 즉 계급투쟁과 생산양식을 한데 묶어 새로 마련한, 장기적인 역사 변화에 대한 이론이자 실천이다. 마르크스는 역사가 어떤 특정 방향으로 움직인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역사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어떤 엄청난 부도 소유하지 않으며 어떤 전투도 벌이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을 행하고 소유하고 싸우는 것은 인간, 실제 살아 있는 인간이다. '역사'는 마치 별개의 존재인 양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인간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다. 역사는 자신의 목적을 추구하는 인간의 활동일 뿐이다."


4. 마르크스주의는 유토피아를 꿈꾸지 않았다.
마르크스는 예언자였지 점장이가 아니었다. 마르크스는 공산주의가 "현실이 맞추어 가야 할 이상"이라는 생각에 반대한다. 대신 그는 공산주의를 "사물의 현 상태를 폐지하는 현실 운동"으로 보았다.

마르크스의 요점은 이상적인 미래를 꿈꾸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미래가 도래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현재의 모순을 해결하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자신과 같은 사람은 더 이상 필요치 않을 것이다.

악성 유토피아주의의 한 형태가 실제로 근대에 악영향을 끼쳤지만, 그것의 이름은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다. 그것은 다양한 문화와 경제에 단 하나의 체제를 강요하여 모든 병폐를 치료할 수 있다는 광적인 생각으로, 그 이름은 자유 시장 주의다.


5. 마르크스주의는 경제환원론이 아니다.
마르크스에게 역사의 진로에 형태를 부여하는 것은 계급투쟁이며, 계급은 경제적 요인으로 환원될 수 없다. 그에게 계급은 사회 구성체이자 공동체이자 정치 현상이다. 계급은 스스로를 계급으로 의식하게 될 때라야 비로소 온전한 계급이 된다.

마르크스에게 노동은 경제적인 것을 넘어 훨씬 많은 것들을 포함한다. 노동은 젠더와 혈연관계와 성(性)을 포함한다. 인간은 의미 있는 동물이므로, 노동은 결코 단순히 기술적이거나 물질적인 사건일 수만은 없다. 노동은 인간이 되는 방식에 관한 것이다.


6. 마르크스는 기계적 유물론자가 아니었다.
마르크스에게 사람은 자신의 물질적 환경을 변형하는 행위를 통해 스스로를 변형하는 생물이다. 그들은 역사나 물질이나 정신에 전당 잡힌 노리개가 아니라, 자신의 역사를 만들 능력이 있는 능동적인 자기 결정적 존재였다. 이는 마르크스주의 유물론이 계몽주의 유물론과는 다르게 민주주의적 유물론임을 의미한다.

기계도 생각을 할 수는 있겠지만, 우리와는 아주 다른 방식일 것이다. 기계의 물질적 구조는 우리와 매우 다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기계는 육체적 욕구가 없으며, 그런 욕구와 긴밀하게 연결된 인간의 정서적 삶이 없다. 인간의 사유는 감각적이고 실제적이며 정서적인 맥락과 분리될 수 없다. 객관적인 세계를 인간 실천의 결과로 사유하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 유물론은 '만물은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거나 '신은 없다'같은 우주에 관한 진술이 아니다. 그것은 역사적 동물이 어떻게 기능하는가에 관한 이론이다.


7. 마르크스주의는 계급 강박증이 없다.
마르크스주의는 태도의 문제가 아니다. 마르크스주의에서 계급은 어떻게 느끼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하느냐의 문제다. 특정한 생산양식 안에서 어디에 위치하는가(노예, 자영농, 소작인, 자본가, 금융업자, 노동력 판매자, 소자본 소유자)의 문제인 것이다. 계급은 자신의 구성을 늘 바꾼다. 그렇다고 계급 자체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

최고 경영자가 스니커즈에 청바지를 쿨하게 차려입는 동안, 10억 명 넘는 사람들이 매일 굶주린다. 슬럼 거주민들은 전 세계 도시 인구의 3분의 1에 이르고, 도시 빈곤층은 적어도 세계 인구의 절반을 차지한다. 이들은 고전적인 의미의 노동계급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생산 과정 밖에 있는 것도 아니다.

노동계급의 사망은 너무나 과장된 것이다. 계급이 죽었다고 확신하고서, 대신 문화와 정체성, 인종과 성으로 눈을 돌린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오늘날의 세계에서 이런 문제들은 예전에도 늘 그랬듯이 사회계급과 뒤얽혀 있다.


8. 마르크스주의는 폭력 혁명을 옹호하지 않는다.
스탈린과 마오쩌둥은 그 규모를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대량 학살자였다. 그러나 자본주의 범죄는 어떠한가? 자본주의의 역사는 전 지구적 전쟁과 식민주의 착취와 집단 학살과 기근의 이야기다. 왜곡된 마르크스주의 해석이 스탈린주의 국가를 낳았다면, 자본주의의 극단적 변이는 파시즘 국가를 낳았다. 자본주의의 끔찍한 역사에 비하면, 쿠바 혁명 같은 사건은 티 파티에 불과하다.

혁명은 탈주 기차가 아니라 비상 브레이크를 거는 것이다. 사회주의 혁명의 경우, 이는 조직된 노동 계급이 다양한 동맹과 더불어 부르주아로부터 권력을 탈취하는 것을 말한다. 노동계급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폭넓은 계급이다. 혁명은 소규모 반란 집단이 아닌 다수의 행동이다. 사회주의 혁명은 민주주의 혁영일 수밖에 없다. 비민주적인 소수는 지배계급이다.

마르크스주의자는 의회민주주의에 의구심을 갖는데, 그것이 민주적이서가 아니라 충분히 민주적이지 않아서이다. 의회는 국민들에게 자신들의 권력을 영구적으로 위임하라고 설득하면서도, 통제권은 거의 주지 않는다. 혁명은 사람들이 대중적인 위원회와 회의를 통해 자신들의 존재에 관한 권력을 쟁취하는 과정으로, 현재 취할 수 있는 어떤 것보다 훨씬 민주적이다.


9. 마르크스주의는 국가를 믿지 않는다.
마르크스는 국가에 대해 완강히 반대했다. 그러나 그가 완강히 반대한 것은 중앙 행정부라는 의미의 국가가 아니었다. 마르크스가 더 이상 보지 않기를 희망했던 것은 폭력의 도구로서의 국가이다. 사라져야 할 것은 지배적 사회계급의 통치를 떠받드는 권력이다. 국립공원과 운전면허 시험센터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마르크스는 인민 주권에 대한 진심 어린 신봉자였다. 그는 민주주의를 너무 소중히 여겼기에 의회에만 맡겨 둘 수가 없었다. 민주주의는 지역적으로, 대중적으로 모든 시민 사회 기관에 두루 퍼져야 했다. 마르크스가 인정했던 국가는 소수의 엘리트가 지배하는 정부가 아니라 시민들 스스로가 자신들을 다스리는 지배였다.

마르크스가 파리 코뮨에 대해 말한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바로 인민민주주의를 말한다. 프랑스 혁명가 오귀스트 블랑키가 평민을 대표하는 지배라는 의미로 만들어 낸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말을, 마르크스 자신은 평민들에 의한 통치라는 의미로 사용했다.


10. 마르크스주의는 급진적 운동에 기여했다.
"공산주의는 서로 다른 형식의 지배와 착취(계급, 젠더, 식민주의)가 갖는 상호 연관성과 이들 모두를 철폐하는 것이 각각의 성공적 해방의 실현을 위한 근본적 토대임을 인식한 최초의 그리고 유일한 정파 프로그램이었다"

마르크스주의는 여성의 권리를 꾸준히 옹호하면서도, 세계 반식민주의 운동도 가장 열렬히 지지했다. 이와 같이 마르크스 주의는 근대 시기의 세 가지 가장 위대한 정치투쟁(식민주의에 대한 저항, 여성 해방, 파시즘에 대한 싸움)의 선두에 섰다.

마르크스가 인간의 이름으로 자연을 약탈한 또 다른 계몽적 합리주의자라는 비난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그는 미래 세대의 복지가 걸려 있는 자연적인 지구의 조건을 위험에 빠뜨리지 않으면서 경제 발전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자연주의자요 유물론자로서 마르크스는, 인간은 자연의 일부임에도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이 생물임을 망각하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결론>
마르크스는 개인에 대해선 열렬히 신뢰했고 추상적 독단에 대해선 깊은 불신을 품었다. 그가 보기를 희망했던 것은 획일성이 아니라 다양성이었다. 그가 생각한 훌륭한 삶의 모델이란 예술적 자기표현이라는 생각에 토대를 둔 삶이었다.

마르크스는 물질적 생산을 물신화하지 않았다. 그의 이상은 여가이지 노동이 아니었다. 그가 경제적인 것에 그토록 지칠 줄 모르게 주목했던 이유는, 그것이 인류에게 끼치는 힘을 줄이기 위해서였다. 그의 유물론은 확고한 도덕적, 정신적 신념과 온전히 양립 가능하다.

그는 사회주의가 자유와 시민권과 물질적 번영이라는 중간계급의 위대한 유산의 계승자라고 보았다. 자연과 환경에 대한 그의 견해는 놀랄 만큼 시대를 앞서갔다. 마르크스 작업이 잉태한 정치 운동보다 여성 해방, 세계 평화, 파시즘에 대한 저항, 식민지 자유 투쟁에 대해 더 확고하게 옹호한 투사도 없었다.

이토록 희화화된 사상가가 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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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으면서 든 생각은 마르크스는 직접 민주주의자라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나는 마르크스주의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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