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이 그렇겠지만, 나도 도서관에 가면 일단 신간 코너부터 들른다. 그 중에서도 영미 소설 코너를 제일 먼저 들른다. 아, 반납할 도서가 있을 경우에는 일단 반납부터 한다. 그 다음에 영미 소설 신간들을 흩어본다. 눈에 띄는 책이 없을 경우에는 인문이나 과학 분야의 신간들을 흩어본다. 만화가게에서도 그러지만 도서관에서도 동냥 나선 거지 마냥 '뭐 없나'하고 게걸스럽게 책을 흩어본다. 아마 뷔페에서 넓은 접시 하나 들고 눈을 반짝이며 샐러드 코너를 갔다가, 초밥 코너를 들렀다가, 고기 코너를 살폈다가, 후식 코너를 배회하는 모양과 비슷할 거다.
그날은 처음부터 눈에 들어오는 책이 있었다. 일단 책이 두꺼웠다. 난 소설의 경우 두꺼운 책을 선호한다. 반드시 그런 건 아니지만, 많은 경우 소설이 두껍다는 것은 그만큼 작가의 필력이 받쳐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야기가 풍성하다. 내가 소설을 읽는 이유는 이야기의 재미에 빠져들기 위함인데, 책이 얇으면 이야기가 너무 일찍 끝나서 아쉬움을 느끼게 된다. 두꺼운 소설이 재미있으면 그 즐거움을 그만큼 오래 누릴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얇은 책에는 손이 잘 안 가고, 두꺼운 소설에 먼저 눈이 가는데 그 책은 두꺼웠다. 그 다음에 눈이 번쩍 뜨이게 만드는 것은 작가의 이름이었다. '톰 행크스'
톰 행크스? 그 톰 행크스인가? 책을 빼서 작가 소개를 보았다. 맞다. 그 톰 행크스 맞다. '필라델피아', '포레스트 검프',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 '빅', '다빈치 코드', '캐치 미 이프 유 캔'의 유명한 영화배우 톰 행크스 맞다. 그가 소설도 쓰다니? 게다가 이런 두꺼운 소설을? 소개글을 더 읽어보니 이번이 처음 소설이 아니다. 그 동안도 그는 글을 써왔다. 이 책은 그의 첫 장편소설일 뿐이다. 내가 모르고 있었을 뿐이다. 이런 최정상의 헐리우드 영화 배우가 장편소설이라니? 그 솜씨는 어떨까? 호기심에 책을 빌렸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는 꽤 훌륭한 소설가다. 그의 연기 실력 만큼이나 그의 글 솜씨도 뛰어나다. 그의 영화 만큼이나 그의 소설도 재미있다. 잘 깎여진 밤톨 같은 그의 머리 모양처럼 이 소설도 깔끔하고 산뜻했다. 그의 소설을 읽는 느낌은 그가 출연했던 헐리우드 영화를 봤던 느낌과 비슷했다. 군더더기 없는 산뜻한 구성, 직관적으로 이해되는 깔끔한 화면,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전개, 살짝 터치만 하고 깊어지기 전에 멈추는 감정선, 바닥이 드러나지 않는 정형화된 캐릭터, 따뜻하게 마음을 어루만지는 상투성. 헐리우드 영화의 특징이 소설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꽤 재미있다.
내가 가장 놀란 것은 그의 글 솜씨다. 그의 연기력 만큼이나 그의 글 솜씨도 빼어나다. 글 못쓰는 작가들이 수두룩한 세상에서, 영화배우인 그의 글 솜씨는 놀랍다. 왠만한 작가들 뺨친다. 영화배우가 아니라 작가라는 명함을 내밀어도 부족하지 않을 실력이다.
'그렇게 걸작은 만들어진다'는 영화에 관한 소설이다. 헐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이야기로 담았다. 마블의 어벤져스처럼 히어로 만화가 영화로 만들어지기까지의 전반적인 과정을 담고 있는데, 그만큼 등장 인물도 다양하다. 만화 캐릭터의 모델인 참전군인, 참전군인의 조카이면서 원작자인 만화가, 만화를 보고 영화를 구성하는 정상급 감독, 호텔 직원으로 있다가 감독에게 발탁되어 영화계를 쥐락펴락하는 제작자, 그리고 수 많은 스태프들.
소설은 영화 제작의 단계 단계 마다 그 중심 인물을 따라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톰 행크스는 그 등장 인물들에게 저마다의 이야기를 부여했다. 등장하는 한 명 한 명의 삶이 아기자기하게 생동감이 있다. 빠져들만 하면 중심 인물이 전환하면서 새로운 이야기가 전개되어서 흐름이 깨지는 아쉬움이 있었지만, 그 여럿의 인물 각각에게 자신만의 삶을 부여하는 건 대단한 실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각각의 인물들이 자기 이야기를 탄탄하게 굳히면서도 하나의 긴 흐름 속에 녹아들어 있다. 마치 모듈을 조립해서 만들어지는 완성품을 연상시켰다. 내 뇌피셜이지만 톰 행크스가 꽤 오랜 기간 공을 들여서 글을 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탄스러웠다. 그리고 부러웠다. 이런 대배우가, 일생을 영화에 바쳐서 살아온 노배우가 글까지 이렇게 잘 쓰다니. 글 쓸 시간이나 있었나? 역시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재능이다. 톰 행크스는 배우로서도 작가로서도 대단한 재능을 가진 사람이다. 그 재능을 꽃 피우는 제일 마지막 열쇠인 '노력'이라는 재능까지 그는 갖추고 있다. 경제학자이면서 록커이면서 동시에 작가인 '요 네스뵈'마저 생각났다. 질투가 났다.
배우의 소설이라는 호기심에서 읽었지만 다 읽은 후에는 그는 내게 작가가 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아쉬움과 호기심이 남는다. 그의 소설은 헐리우드 영화들 만큼이나 '웰메이드' 작품이다. 완성도, 연출력, 스토리 텔링등 뭐 하나 나무랄 것이 없다. 그러나 나에게는 2% 부족하다.
재미있고 훈훈하고 따뜻한 소설이지만 마음을 뒤흔드는 것이 없다. 감동이 부족하다. 대중 소설에서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이 욕심 같아 보일지 모르지만, 통속 소설에서도 감동은 있다. 정신을 때리거나, 가슴을 후벼 파거나, 온 몸을 뒤흔드는 감동은 아닐지라도 촉촉히 젖어드는 감동은 있다. 상투적이고 진부한 표현이지만, 열정이라고 할까 아니면 혼이라고 할까 그것도 아니면 작가 정신이라고 할까? 그런 것이 나에게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이 아쉽다.
그의 글 솜씨에 치열한 주제 의식까지 더해진다면 어떤 작품이 나올까? 그가 그런 글을 쓸 수 있을까? 궁금해진다. 그러나 여전히 배우로서도 왕성히 활동하는 그에게 그런 글을 쓸 시간이나 있을까? 검색해보니 톰 행크스는 56년 생이라고 한다. 하릴없이 뒤로 빼며 늙은이 행세나 하는 나 자신을 부끄럽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