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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님의 서재
  • 데미안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디자인)
  • 헤르만 헤세
  • 2,970원 (10%160)
  • 2017-01-01
  • : 107,264

중 1때 데미안을 읽고 이번에, 수 십년 만에 데미안을 다시 읽었다. 그리고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매우 다르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내가 데미안을 읽은 것은 국어 선생님 때문이었다. 그 선생님은 이야기꾼이었던 것 같다. 가끔 소설책 내용을 이야기로 풀어줬는데, 선생님의 이야기는 너무 재미있었다. 데미안도 그랬다. 너무 재미있어서 집에 있던 세계 문학 전집에서데미안을 찾아 읽었다. 직접 읽은 데미안은 너무 재미없었다. 대체 무슨 내용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기억나는 건 카인의 표식과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아프락사스'가 다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카인의 표식도 잊어버렸다. 아프락사스 단어만 머리 속에 남았다.

이번에 읽은 데미안은 달랐다. 재미있었다. 소설의 중반 이후에는 다시 이해하기 어려워졌지만 중반까지는 재미있었다. 내 얘기 같았다. 중학교때라도 이 이야기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 놀라웠다. 청춘의 방황이 없어서 그랬던 것일까? 그 차이가 그렇게 큰 것일까?

이번에 읽으면서 나를 가장 사로잡은 부분은 방황하는 싱클레어였다. 밝고 허락된 세계의 평온과 축복에 안주하지 못하고, 어둡고 불온한 세계의 원초적 충동과 갈망을 추구하는 삶. 겉으로는 타락한 삶을 유쾌하고 행복하게 실컷 만끽하는 것 같다. 그러나 속으로는 외롭고 고통스럽다. 그래도 밝고 따뜻한 세계로 돌아갈 수는 없다.

내가 그랬다. 내 20대, 30대가 그랬다. 방탕하고 흐트러지고 파괴적인 삶을 살았다. 순간 순간의 말초적인 즐거움은 누렸어도, 속으로는 늘 외롭고 갈증났고 괴로웠다. 싱클레어처럼 "사랑에 대한 타오르는 열망과 이룰 수 없는 갈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나보다 더 상처받기 쉽고 수줍음 많은 사람은 없었다." 어쪄면 40대, 50대에도 계속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싱클레어의 방황하고 자학하는 심정은 바로 내 얘기였다. "내가 장차 무엇이 되든 나에겐 상관없었다. 나는 술집에 앉아 큰소리치며 별나고 짖궂은 방식으로 세상과 싸웠다. 이것이 세상에 대한 내 나름의 저항 방식이었다. 그러면서 나는 망가져갔다. 만일 세상에 나 같은 사람이 필요 없다면, 나 같은 사람들을 위한 더 좋은 자리, 더 나은 일도 없다면, 우리에게 남은 거라곤 망가지는 일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로 인한 손해는 세상의 몫이 될 것이다."

그리고 싱클레어가 베아트리체를 만나면서 방황과 갈등을 끝내듯이, 나도 매번 베아트리체를 만나면서 방황과 갈등을 끝냈다. 싱클레어처럼 나에게도 소명은 "자신을 찾아가는 일 하나뿐이었다." 나 또한 "경계선이 아니라 그저 다른 종류의 시각"을 가졌기 때문에 사람들과 분리되었다.

싱클레어와 내가 다른 것은 그 이후다. 싱클레어는 그 이후 에바 부인을 통해서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려고 한다. 그는 스스로에게서 데미안을 보고, 에바 부인을 본다. 그리고 그 합일을 통해 알을 깨고 나오려고 한다. 그러나 나는 늘 제자리였다. 베아트리체를 놓치면 나는 다시 원래의 허무와 혼란과 갈망의 세계로 돌아갔다. 다시 베아트리체를 만날때까지. 에바 부인을 보면 그 문턱에서 나는 주저 앉고 괴로워하다가 나의 세계로 돌아간다.

싱클레어는 새로운 신을 찾고, 굳건한 신념으로 초월적인 존재가 되려고 한다. 나로서는 이해할 수도 납득할 수도 없는 이야기다. 나에게 새로운 신은 필요 없다. 신은 극복하거나 버려야 할 존재이다. 싱클레어의 신념은 나에게는 맹목으로 보이고, 싱클레어가 추구하는 초월적인 존재에서 나는 독재자를 느낀다.

왜 이렇게 달라질까? 그건 아마도 내가 표식이 없기 때문일 거다. 나는 카인의 표식을 지닌 자가 아닌 평범한 사람일 뿐이다. 그래서 카인의 표식을 지닌 싱클레어와 같은 시선과 같은 생각을 가질 수가 없는 거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책의 후반부를 읽으면서 불온하고 위험한 느낌을 받았다. 후반부의 싱클레어에게서 절대주의와 파시즘의 맹아(萌芽)를 느꼈다. 책을 다 읽은 후에 헤르만 헤세를 검색해 보았다. 그는 나치와 전쟁에 반대했던 평화주의자였던 모양이다. 내가 책에서 느낀 불안과는 다르게.

책을 한 번 더 읽어볼까 하는 생각도 잠시 했지만 그냥 관두기로 마음 먹었다. 언제가 또 기회가 오겠지. 나는 내 생각을 갖고 내 삶을 살면 되지, 굳이 헤르만 헤세의 생각과 삶을 쫓을 필요는 없으니까.

최근 '채식주의자', '단순한 열정' 그리고 '데미안'까지 이른바 '순문학' 소설을 연이어서 읽었다. 내면을 들여다 보는 소설들. 이 책들을 읽으며 나는 내가 왜 문학을 싫어했는지, 그리고 다시 문학에 재미를 느끼는지 어렴풋이 이해가 되었다. 이 책들을 읽으면서 내가 재미를 느낀 가장 큰 이유는 이 책들에서 내 모습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내 모습의 전부는 아니지만 어떤 단면들 또는 내 모습의 일부들. 자신을 찾아가는 일'은 여전히 흥미롭고 중요하다.

그렇기에 어린 시절의 나는 문학이 싫었을 거다. 힘들고 어렵게 간신히 읽은 책에서 유약하고, 우유부단하고, 변덕스럽고, 유치하고, 탐욕스러운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이 어찌 즐겁고 재미있을 수 있을까? 부끄럽고 고통스러웠겠지. 당연히 문학을 외면하고 싶었으리라.

하지만 이제 나이도 먹을 만큼 나는 다르다. 찌질하고 추한 나 자신의 단면을 보거나 일부를 보는 것은 여전히 고통스럽지만 이제는 버틸 수 있는 맷집이 생겼다. 비겁하고 비루한 자신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와 체념을 가질 만큼 오래 살아왔다.

게다가 문학 작품을 통해서 자신을 들여다 보는 것은 깨진 거울이나 굴절된 조각 거울을 통해서 자신을 들여다 보는 것과 비슷하다. 파편화된 조각의 내 모습이나 굴절된 조각의 내 모습은 나를 정확하게 보여주지 못한다. 쪼개지고 굴절된 내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러한 약간의 어긋남은 나를 몽환적으로 꾸며준다.

그래서 문학은 멋진 신세계다. 자신의 내면에 깊숙히 머리를 박으면 만나게 될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알몸의 나 대신, 문학이라는 패션으로 치장한 자신을 보여 주니까. 문학은 추함을 예술로 포장해주니까. 이렇게 나이 먹어서 나는 이제 문학이라는 패션에 재미를 느끼고 있다. 좀 더 즐기고 싶다.

자, 이제 '데미안'을 읽은 나의 소회는 일단 여기에서 끝내겠다. 헤르만 헤세는 나의 알을 깨지 못했고, 나는 아프락사스를 만나지 못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나에는 나의 베아트리체가 있다. 비록 퇴색되고 금이 갔을 망정.

그러나 괜찮다. 산다는 것은 퇴색되고 금이 가는 것이다. 그리고 살아있는 한 언제든 '재생'의 가능성이 있다. 재생이 없다 한들 그건 그거대로 괜찮다. 그게 삶이니까. 초월하지 못해도 괜찮다. 나의 의지는 그 한계를 받아들이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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