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0 페이지가 넘는 소설을 이틀 만에 다 읽었다. 재미있어서, 그리고 감동적이어서, 슬프면서도 따뜻해서.
재밌는 소설을 읽을 때는 다음 이야기를 빨리 알고 싶어서 후딱 후딱 페이지를 넘기면서도, 한편으로는 작은 두려움을 느낀다. 너무 빨리 다 읽을까봐. 그러면서도 손에서 책을 놓을 수가 없다.
이 책은 찰스 디킨스의 '데이비드 코퍼필드'를 리메이크 한 책이라고 한다. 20세기 말의 미국을 배경으로. 아버지 없이, 약쟁이 엄마 밑에서 태어난 주인공이 비참하고 가혹한 현실 속에서 부딪히고, 망가지고, 좌절하고 그러면서도 성장해가는 이야기를 다룬 소설이다
'나는 알아서 태어났다' 책은 이렇게 시작한다. 주인공은 알아서 태어났다. 그리고 알아서 살아간다. 사람들의 악의와 음모 속에서, 그리고 사람들의 관심과 호의 속에서. 삶은 스스로 살아가는 것이면서, 동시에 사람들과 관계 맺으며 살아가는 것이다.
읽는 내내 미국이라는 자본주의 초강대국에 대해서, 그 안의 무식하고 난폭한 사람들에 대해서, 그리고 그 안의 다정하고 따뜻한 사람들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 소설에서는 미국 영화나 드라마에서 흔하게 보던 장면들을 여럿 접하게 된다. 그 중의 하나가 어린 주인공의 엄마가 거칠고 폭력적인 남자와 재혼하는 것이다. 새아빠가 된 남자는 어린 아이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이런 가정 폭력은 미국 드라마, 영화, 소설에서 너무나 흔하게 보는 것이다. 현실이 얼마나 더럽길래 맨날 단골 소재가 될까?
술과 약에 찌들고 총질이나 해대면서 강한 남자 행세하는 놈들이, 어린 아이와 약한 부인에게 폭력을 휘둘러 대는 장면들을 보면 욕이 튀어 나온다.
'이 새끼들아, 결혼하지 말고 혼자 살아'
왜 감당도 못할 결혼에 그리 목을 맬까? 남자나 여자나?
관료적이면서도 인색한 아동 보호 제도, 사람들을 질병과 고통으로 내모는 건강 보험 제도, 젊은이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약물 중독, 현실을 잊으려는 듯한 스포츠 영웅주의 등 미국의 많은 모순들. 부자에겐 천국이고, 빈자에겐 지옥같다,
엄마 노릇 제대로 못하던 엄마가 약물 과다 복용으로 죽으면서, 어린 주인공이 거칠고 험악하고 잔인한 세상을 살아가는 모습은 안타깝고 마음 아프지만, 그저 비극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작가는 기본적으로 선하고 낙관적으로 세상을 본다. 세상엔 악인도 많지만 선한 사람들도 많다. 어린 주인공의 삶은 하루 하루가 살아가기 위한 투쟁이지만, 본질적으로 주인공은 낙관적이다. 주인공은 안에 '무슨 일에도 녹지 않을 무슨 금속 같은 게' 있다. 그것은 사랑 아니면 용기일 것 같다. 아니면 둘 다거나.
책 전체에 걸쳐서 애정과 따뜻함이 배어있다. 현대의 다크하고 음울한 작품들과 다르게, 주인공의 잔인하고 가혹한 삶 속에서도 힘과 따뜻함이 느껴진다. 음울한 현실에 절망하기 보다 주인공을 응원하게 만든다. 그러면서 주인공인 어린 소년에게 오히려 내가 위로를 받는다. 무너지지 않고, 쓰러지지 않고 꿋꿋하게 나아가는 소년의 용기가 나를 위로한다.
결국 가혹하고 사악한 현실에서도 의지와 힘을 잃지 않게 만들어 주는 건 삶과 사람에 대한 낙관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낙관은 용기에서 나오는 거고. 개같은 현실을 알면서도, 굽히지 않고 부딪히고 싸워나가려는 용기. 그래서 이 책을 읽는 내내 흉칙함 대신 따뜻함과 설렘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인간에 대한, 미래에 대한 기대와 설렘. 아직 끝이 아니다. 이건 시작일 뿐이고, 과정일 뿐이다.
내가 회의적이고 염세적인 건 내가 겁장이라서 그런 거다. 미래에 대한 기대를 놓칠까 두려워하는 겁장이. 용기 있는 사람이 시련과 좌절 속에서도 미래를 포기하지 않고 싸워 가려고 할 때, 겁장이는 패배가 두려워 미리 포기 속으로 도망가 있는 거다. .
19세기 찰스 디킨스 소설을 현대를 배경으로 쓴 소설이라서 그럴까? 현대 소설이면서 옛날 소설 같았다. 19세기의 여유랄까 아니면 어눌함? 덜 잔인하고, 덜 사악하고, 덜 파괴적이었다. 그 모든 악을 다루면서도, 그 모든 악의 빈틈과 희망이 느껴졌다.
어린 시절 '올리버 트위스트'나 '소공녀' 같은 어린이용 소설책을 읽으며 느꼈던 즐거움이 되살아나는 것 같다. 내가 약간은 순수해지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 약간은 외로와지는 것 같기도 했고. 순수함은 외로움을 동반하는 걸까?
상도 많이 받았는데 궁금한 건 '여성 소설상'이다. 상 이름을 봐서는 여성성이나 여성 문제에 대한 상일 것 같은데, 난 특별히 이 소설에서 두드러진 젠더적 관점을 느끼지는 못했다. 그건 내가 남성이라서 그럴 수도 있다. 여성의 입장에서는 이 소설이 어떤 의미가 있을지 궁금해진다.
나이 들어 집중력이 떨어진 나를 몰입시켜 주는 소설. 나에게 감동을 주는 소설. 나를 약간은 순수하게 만들어 주는 소설. 소설의 힘. 이야기의 힘.
이 책을 다 읽었으니 이제 또 다른 재밌는 소설을 찾아야겠다. 소설은 중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