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이 작가의 작품집 <겨울 선인장>을 읽고 펑펑 울었던 생각이 난다.
작품의 면면에 감추어진 삶에 대한 깊은 통찰과
작가가 깊이 품은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 때문이었다.
이번에도 역시 이 작가는 나를 그렇게 만들고야 말았다.
지금, 여기의 노인들의 애환이 사뭇 진풍경인 까닭이다.
<바람이 분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그들의 나이만큼 삶을 통찰하는 힘이 더욱 깊어졌다.
그리하여 독자로 하여금 고단한 삶을 인정하게 하고 나아가 삶과 악수하게 만든다.
리얼리티가 살아 있는 서사와 맛갈스러운 대화는
독자로 하여금 소설을 읽는 또다른 기쁨을 한껏 누리게 한다.
늙어간다는 것, 잘 늙어간다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
누구에게나 어린 아이였던 시절이, 청춘이 있었듯 누구에게나 노년이 찾아온다.
어쩌면 쓸쓸한 그 노년의 풍경 속에서 이렇듯 애틋하고 따듯한 순간들을 만날 수 있다면,
노년은 결코 쓸쓸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아니, 노년이어서 더욱 찬란할 것이다.
작가는 노년의 이야기를 통해 오히려 청춘들에게 값진 선물을 주는 것 아닌가.
'바람이 분다'의 정숙처럼 우리에게는 가슴에 아로새겨진, 어떤 마음의 풍경들이 있다.
너무 지치고 힘겨운 날엔 정숙이 그랬듯 그 풍경 속으로 들어가 마음 뉘이고 싶은 밤이다.
산은 봄빛이 붓칠을 한 듯이 아련했고 산들바람이 볼을 간질였다. 호수 위로 잔물결이 일고 호수 가득 물별이 반짝였다. 그는 정숙의 뒤에 가만히 서 있었다. 그의 숨이 정숙의 등을 통해 전해졌다. 아주 잠깐인 듯도 하고 아주 오래 그러고 서 있었던 듯도 하다. 액자 속에 넣어서 벽에 걸어놓는 대신 정숙은 그 풍경을 가슴에 아로새겼다. 너무 지치고 힘겨운 날, 정숙은 그 풍경 속으로 들어간다... P.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