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부짖는 늑대와 매서운 눈빛으로 한곳을 응시하고 있는 늑대의 모습으로 ‘야성의 부름’이라는 제목을 표현하고 있는 표지가 인상적이다.
야성 : 자연 또는 본능 그대로의 거친 성질
벅은 산타클라라에서 저택의 모든 영역을 마음대로 누빌 정도로 편안한 삶을 지냈다. 하지만 정원사의 조수였던 매뉴얼이 돈을 구하기 위해 몰래 벅을 팔아버리면서 벅의 삶은 엉키게 된다. 편안하게 자신의 생존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지만 이제 그는 살아내기 위해 생각하고 행동하고 싸워야만 한다.
1897년 알래스카의 클론다이크 지방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향했다. 일확천금을 노렸고 벅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인간들의 탐욕함은 더 잔인하다. 그가 처음으로 자신이 더 이상 원래의 세계로 돌아갈 수 없음을 인지한 때는 몽둥이와 엄니의 법칙을 깨달은 때다. 인간의 매질은 자신이 길들여져야 함을, 엄니의 법칙은 같은 개들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무자비한 본능을 일깨워야 함을 의미했다. 벅은 살아남기 위해 때로는 교활한 짓도 서슴지 않는다. 눈에 띄지 않게 도둑질을 하고 우두머리였던 스피츠를 몰아내기 위해 개들 사이를 엉망으로 만들며 스피츠와 싸워 이기기까지 한다. 그는 야성을 드러내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그가 지나친 사람들은 그저 ‘주인’에 지나지 않았다. 썰매를 끄는 것은 살아남기 위해서였을 뿐이다. 사람들은 채찍을 휘두르길 주저하지 않았고 몽둥이로 무자비하게 내려칠 뿐이었다. 그들에게 썰매를 끄는 개들은 그저 필요에 의한 것이었다. 여러 번 주인은 바뀌게 되고 마지막에는 너무나 지칠 정도로 학대당하고 일어나기를 포기하였을 때 존 손튼을 만난다. 존 손튼은 몸을 날려 벅을 구하고, 벅은 존 손톤에게 완전한 사랑을 배운다. 그를 위해서라면 목숨을 기꺼이 내놓을 정도로 충성을 다한다. 존 손톤이 보여주는 것은 벅이 처음 느낀 ‘사랑’이었다. 처음으로 인간의 사랑을 느꼈을 때 동시에 그는 먼 숲속에서 야성의 소리,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듣는다.
벅이 변하는 모습은 진보한 것일까. 혹은 퇴보한 것일까. 어느 누구도 벅이 위대한 개라는 것에 의문을 품지 않는다. 문명의 세계에서 멀어지며 본성을 찾아가는 벅을 보고 어느 누가 퇴보했다고 말할 수 있었을까. 또한 벅과 함께한 개들의 모습에서 사람들의 다양한 군상을 보는 것은 자연스럽다. 힘이 강한 우두머리였지만 결국 자신의 자리를 넘겨줄 수밖에 없는 스피츠, 자신의 마지막 숨을 토해내면서까지 썰매를 끌려고 했던 데이브, 다정했던 스킷과 닉의 모습들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벅은 다양한 인간, 개들을 만나면서 야성에서 태어나지 않았지만 자신의 몸 안에 흐르는 피가 야성으로 돌아가길 원한다는 것을 느낀다. 그래서 그가 존 손톤의 애정 어린 사랑을 받으면서도 숲속에서 들려오는 울음소리에 이끌려 회색 늑대를 만나게 되는 장면은 쉽게 잊을 수 없다.
잭 런던은 책의 첫 시작에 앞서 아래와 같은 글귀를 실었다.
“방랑을 향한 오랜 동경이 약동하며,
관습의 사슬에 분노하자,
야성의 피는
다시 동면에서 깨어난다.“
금광이 발견되지 않았고, 매뉴얼이 돈이 필요하지 않았다면 벅은 그대로 문명의 세계에 머물러 있었을지 모른다. 독자들은 벅이 마주한 야생의 삶, 인간들의 무자비함에 눈살을 찌푸린다. 벅이 존 손톤을 만나기 전까지, 차라리 저택에서 나오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결국 벅이 야성의 삶을 받아들이고 독자들도 벅이 온전한 자신을 발견했다고 믿는다. 그것이 차라리 벅에게는 필요한 운명이었다고 생각한다. 벅도 물론 문명의 세계를 그리워했을 것이다. 하지만 야성의 본능이 문명의 세계를 벗어난 의미를 찾아 주었다. 비록 그는 다시 생존하기 위해 처절하게 싸우고 굶주리기도 하고 죽을 위기를 마주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는 야생의 형제들과 나란히 달리며 울부짖는다. 문명은 벅에게 관습의 사슬이었다. 아늑함이 모든 생명들에게 과연 좋은 것일까. 야생으로 남거나 돌아가는 것에 우리는 관여할 수 있는 자격이 있을까. 우리들이 당연시하는 많은 것들에 다시 질문을 던진다.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아는 것. 세상과 마주해 오롯이 선 자신이 아무리 외롭게 여겨져도 온전한 자신을 발견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 벅이 보여준 야성의 부름에 응하는 모습은 우리 안의 삶에의 애정과 본능을 부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