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엄마와 서른 일곱해나 같이 사는 주인공이 나오는 소설이라니. 스무 살이 넘어서도 엄마와 함께 살다니. 박선우의 장편소설 『어둠 뚫기』를 어찌 읽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열 살이 되던 해 강제로 엄마와 헤어지고 내내 단 한 달도 같이 살지 못하고 엄마를 떠나보냈다. 그토록 함께 살고 싶었는데 막상 같이 살려고 했다가 우리의 너무 다름에 도망을 쳐 버렸다.
『어둠 뚫기』를 다 읽었더니 꿈에 엄마가 나왔다. 살아생전의 그 모습 그대로. 치우지도 않은 집에서 나에게 자신의 옷을 주었다. 한 번도 입지 않은 새 옷이었지만 유행이 지난 옷이었다. 살아 있을 때도 그랬는데 꿈에서도 그러네. 엄마. 엄마가 준 옷은 몇 벌 남지 않았어. 꿈에서라도 그렇게 나를 챙겨줘서 고마워.
내 이야기는 이쯤하고 소설 이야기를 해보자면 『어둠 뚫기』는 이상하고 슬펐다. 낯설면서도 친숙했다. 엄마를 주제로 한 소설이 그렇듯 사랑하고 증오하는 감정이 흐르면서도 이해와 포용의 정서를 느끼는 게 맞나 싶은데 또 그게 맞는 것 같아 이상하고 슬프고 낯설고 친숙했다는 뜻이다. 아마 주인공의 성별이 여자였으면 뻔하고 뻔한 이야기가 되어 버렸겠지.
군 복무 중 2년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을 '나'는 엄마와 살았다. 형이 있지만 결혼을 하고 엄마와는 소원하다. 현실적인 문제 즉 대한민국의 청년들 모두에게 처해진 주거 문제 때문에 '나'는 독립을 하지 못한다. 감당하지 못할 월세와 대출금과 생활비를 생각하면 매일 언제 결혼할 거냐고 묻는 엄마의 잔소리는 애교 수준에 불과하다.
엄마와 살면서 엄마와 다투고 화해도 아닌 어정쩡한 평화를 유지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나'의 정체성을 엄마에게 이해받지 못하면서. 한동안 '나'는 주말에 잠만 잔다. 도저히 이해받지 못할(그런데 그런 걸 왜 이해받아야 하는지. 하긴 이해만큼 살아가는 데 있어서 중요한 것도 없다.) '나'의 상황을 '체념 증후군'으로 설명하는 부분에서 『어둠 뚫기』라는 소설을 나는 이해했다.
분노→포기→체념의 감정으로 인생의 고통이 사라지는 건 아니고 엷어진다. 게이라는 정체성의 혼란은 잠을 자는 행위로 주인공을 살린다. 누구에게나 엄마가 있다. 엄마 없는 자식은 없다. 엄마가 언제 있느냐의 문제. 엄마가 있었으면 지금의 상황이 달라졌을까. 잘 모르겠다. 대신 남과 비교나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다.
매일 꿈속에 엄마가 나오면 좋겠다. 매일 속상해서 그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