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 31일을 기억하고 싶다. 기억하고 싶다고 해도 곧 뇌리에서 사라지겠지만. 기억하고 싶었다는 걸 기억할 수만 있더라도 괜찮으니까. 쉬는 날이었는데 잠깐 사무실에 가서 일을 했고(생각해 보니 다 해낸 건 아니었다. 빠뜨린 게 있었다. 이건 2025년 1월 2일의 나에게 맡기자.) 책을 한 권 읽었고(예소연의 『어느 순간을 가리키자면』, 추천) 씻고 외출까지 했다. 바쁘다 바빠 현대사회.
해가 저물자 찬바람이 불었고 커피를 마시면서 카톡 방에 올라온 새해 인사에 답을 했다. 그렇게 다들 잘 지내자고. 서운하고 밉고 힘들었던 일은 2024년을 보내고 행복한 일만 가득한 2025년이 되자고. 올 한 해 먹었던 음식 중 제일 맛있는 걸 나눠 먹고 이야기를 나누고. 슬픈 사람들을 남겨 둘 수 없음에 마음이 아팠다. 설거지를 하면서 먹먹한 제야의 종소리를 들었다.
사랑이 있으면 될까. 돈도 명예도 권력도 없이 사랑만 있으면 될까. 서로의 잠바 주머니에 가냘픈 손을 넣어주고 걸으면 그걸로 되지 않을까. 있었으나 없는 과거에 미련을 두지 않고 오지 않을 미래에 목을 매지 않으며 지금만을 위해 살면 되지 않을까. 정대건의 소설 『급류』를 읽고 나서 든 생각이다. 내가 너를 사랑하고 너 또한 나를 사랑하는 기적 안에서 말이다.
여름이면 물놀이 관광객이 몰려드는 도시 진평에서 도담과 해솔은 만난다. 소방관인 아버지 창석에게 수영을 배우는 도담 앞에 물에 빠진 해솔이 나타난다. 그 순간 도담은 아무런 망설임 없이 해솔을 구하러 뛰어든다. 『급류』의 시작인 두 사람 아니 네 사람의 익사 사건은 사랑에 관한 은유이다. 사랑은 이것저것 앞뒤 가릴 것 없이 빠져드는 것. 빠져들어 죽어 버릴 수 밖에 없는 것.
서로를 안고 죽어도 괜찮을 것으로 『급류』는 사랑을 정의한다. 진평강 하류에서 서로를 안은 채 떠오른 시신을 발견하는 장면은 이윽고 비슷한 장면으로 독자를 데리고 간다. 네 사람. 도담의 아버지 창석. 해솔의 어머니 미영. 그리고 도담과 해솔. 네 사람은 이상한 형태의 사랑의 소용돌이 속으로 자신들을 끌고 간다. 이상하지 않을 수 없는 게 사랑이라는 걸 알기에 그들의 사랑은 괜찮고 괜찮아졌으면 한다.
사랑은 풍덩 혹은 서서히 빠진다. 빠져드는 모습만 다를 뿐 결국 우리는 사랑 안으로 가라앉는다. 빠져나오려고 발버둥 치는 건 무의미하다. 부정하고 빠져나오려 할수록 가라앉을 뿐이다. 애초에 뛰어들지 말지 빠지지 말걸 후회해도 소용없다. 사랑에 빠진 서로를 안고서 숨을 참고 서서히 떠오르기를 기다려야 한다. 수면 위로 다다랐을 때 숨을 내쉬고 나온다. 그리고 살아가면 된다. 사랑을 안은 채. 사랑에 빠진 나로.
도담과 해솔이 가진 사랑의 빛깔에 대해 생각한다. 각자의 상처가 크다고 여기는 그들의 사랑은 어느 날은 회색이었다가 어느 날은 분홍이었다가 수시로 변모한다. 다채로운 빛깔을 나눠 가지면서 그들은 사랑하고 살아간다. 그거면 된다. 아픈 서로였다가 행복한 서로였다가 웃었다가 울었다가 각자를 숨기지 않은 채 있는 그대로 사랑하며 살면 된다.
아주 짧은 사랑 노래
너의 손을 잡고
너의 등을 토닥이며
걸어가고 싶어
바람이 지나가면
햇살이 내리쬐면
더욱 좋을 거야
우리는 아플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