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물에 대한 글을 쓸 때에는 참 조심스러워진다. 사건의 전말을 상세하게 쓰려고 하다가는 자칫 선을 넘어 스포일러가 되어 버릴 수도 있으니 말이다. 추리물이나 스릴러물, 특히 반전이 중요한 요소인 작품들은 아직 읽지 않은 입장에서 스포일을 당해 버리면 김이 새기 마련이다. 그래서 기껏 글을 써놓고 스포일러가 될 만한 문장을 삭제하거나, 심지어는 문단 하나를 통째로 덜어버리기도 한다. 어디까지 밝혀도 되고, 어디를 감춰야 되는 건지, 고민을 많이 한다. 피에르 르메트르의 <알렉스 Alex>가 딱 그런 책이다. 작가 피에르 르메트르(Pierre Lemaître)는 프랑스 파리 태생으로, 55세의 나이로 뒤늦게 문단에 등단한 후 연이어 발표한 작품들이 전 유럽 추리문학상을 휩쓴, 사회파 스릴러의 거장이다. 이 책 <알렉스>는 그의 '형사반장 카미유 베르호벤 3부작' 중 아직 번역출간되지 않은 <세밀한 작업>에 이은 두 번째 작품으로, 스릴러의 전통을 단숨에 뒤집는 대담한 발상과 연이은 반전이 특징이다.
이 작품은, 한 아름다운 여성이 파리 한복판에서 괴한에게 납치된 후 알몸으로 허공 위의 새장에 갇히게 된 사건으로 시작된다. 그녀를 납치한 사람은 누구이며, 납치해서 잔혹한 폭력을 휘두르고 새장에 가둔 목적은 무엇일까. 모든 것이 수수께끼에 싸여 있다. 하지만 이것은 시초에 불과하다.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그녀의 과거 행적을 파헤치는 형사반장 카미유 베르호벤은 참 개성이 넘치는 캐릭터라 할 수 있다. 저명한 화가였던 모친의 과도한 흡연으로 인해 그의 키는 성인이 된 뒤에도 고작 145cm에 불과하다. 또한 몇 년 전 아내 이렌이 납치되어 죽은 트라우마로 일선에서 물러서 있던 그는, 이 납치사건을 수사하면서 과거의 일들이 겹쳐 지나가는 느낌에 괴로워한다. 한편 사건은 경찰과 대치하던 납치범이 자살하고 감금장소에서 생사를 오가던 그녀가 어디론가 사라지면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이 소설의 주목할만한 특징은, 두 주인공의 시점이 마치 영화의 교차편집처럼 번갈아 진행된다는 점이다. 그러면서 비극적인 과거와 강박관념, 새롭게 태어나고자 하는 슬픈 소망, 자기 파괴의 충동 등 두 주인공 각자의 내면적 상흔을 낱낱이 파헤치고, 독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서사에 깊은 감정이입을 하게 한다. '그녀가 소망하는 것, 원하는 것은 자신의 피를 모조리 비우고 그대로 죽어 버리는 것이다. 그녀는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았다. (중략) 그녀는 자기 죽음을 본다. 그녀는 이미 죽은 사람과도 같다.'(p.109 중 발췌)
초반부에서는 사건의 희생자로 등장했던 그녀는, 곧이어 모습을 바꾼다.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그녀의 과거 행적을 파헤치던 형사반장 카미유는 그녀가 수많은 이름과 정체성을 가진 인물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하지만 사건의 키를 쥔 그녀는 감금되었던 장소에서 사라져 버린 후 종적을 알 수 없다. 카미유는 자살한 납치범 트라리외가 그녀와 연관이 있는 파스칼의 아버지이며, 파스칼은 한참 전 실종되었다는 것을 알고 수사에 착수하여 그녀가 한때 살았던 집 정원에 매장되어 있던, 아황산으로 머리통의 절반이 녹아 버린 그의 시신을 발견한다. 한편 그녀가 지나가는 곳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알 수 없는 연쇄적인 살인사건들이 일어나는데, 농축 아황산을 입 안에 부어 내장이 녹아내리는 참으로 잔혹한 살해 수법 외에 사건의 피해자들 간의 공통점이나 접점 등은 없어 보인다.
10년 전의 두 건의 고농축 아황산 살인사건과 그녀와의 연관성을 간파한 카미유는, 연이어 일어나는 살인사건들을 수사하며 그녀를 추격한다. 한편 그녀는 한 호텔방에서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되고, 카미유는 신분증을 보고 나서야 그녀의 진짜 이름이 '알렉스 프레보스트'라는 것을 알게 된다. 하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다. 실은 이 책의 3부, 곧 알렉스가 죽은 후의 전개가 상당히 중요한 부분이다. 알렉스가 과거에 어떤 일들을 겪은 것인지, 어떠한 계기로 사건들이 일어나게 되었는지, 그녀의 죽음에 얽힌 사정은 무엇인지, 그 외에도 상당히 중요한 내용들이 등장하는 부분으로, 사건들의 이면에 숨겨져 있던 참혹한 진실과 엄청난 반전(그리고 약간의 속시원함)이 기다리고 있다.
또한 앞부분에서 아주 간단히 언급되고 지나갔던 것들이 이 소설의 결말에 지대한 영향을 준다. 일종의 복선인 셈이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언급하면 사건의 전말과 충격적인 반전으로 인한 재미가 반감될 것 같아서, 굳이 여기에 적고 싶지는 않다. 스포일러가 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책의 내용을 언급하려니, 참 많은 부분이 생략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지금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미덕은 진실이 아니라 바로 정의일 거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그렇지 않은가요?"(p.528 중 발췌) 이 책을 읽으며 가장 인상적으로 느껴진 문장이다. 이것이야말로, 작품의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책을 덮으며 그나마 안도할 수 있었던 원인이기도 하다.
여담이지만 최근 몇 년간 많은 추리물들이 번역출간 되었는데, 지난 몇 년 동안 일본 추리물이 전성기였다가 요즘 들어서는 유럽 쪽의 작품들이 제법 눈에 띈다. 개인적으로 일본 추리물을 참 좋아하지만, 영미권이나 유럽쪽의 추리물은 그다지 끌리지 않는다는 느낌이었다. 언어로 설명하기가 힘들지만, 스타일의 차이에서 오는 이질감 혹은 문장이 머릿속에 안착이 잘 안되는 느낌이라 하면 될 것 같다. 아무래도 번역본인 이상, 일본어를 국어로 번역했을 때의 문장과 프랑스어나 독일어 등을 국어로 번역했을 때의 문장의 느낌이 확연히 다르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해 본다. 하지만 이 책 <알렉스>는 그러한 느낌을 거의 받지 않고, 500페이지가 넘는 책임에도 불구하고 몰입해서 읽을 수 있었다. 이는 작가의 명쾌한 문장과 역자의 탁월한 번역 덕분이리라.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수작(秀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