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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고쿠도님의 서재
  • 동주
  • 구효서
  • 12,150원 (10%670)
  • 2011-10-17
  • : 366

대학 2학년쯤이었을까, 나는 학교의 거대한 도서관에서 방황하고 있었다. 딱히 읽으려고 마음먹은 책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러다가 나는 갑작스런 현기증을 느끼고 수많은 책들이 꽂혀 있는 서가에 머리를 기댄 채 잠시 있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그 근처에 꽂혀 있던 <윤동주 평전>에 시선이 닿았다. 어쩌면 그 때 순간적으로 윤동주의 영혼과 공명하면서 현기증이 났을지도 모른다는 묘한 생각을 하며, 나는 무엇에 홀린 듯 그 책을 빌렸다. 그것이 나와 윤동주의 깊은 인연의 시작이었다. 그의 평전을 읽으며 그의 순수하고 깨끗했던 삶에 대해 알게 되었고, 그의 시집을 읽으며 그의 시어의 아름다움을 알게 되었다. 나는 종종 <서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등을 암송하게 되었고,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스러져 간 그의 짧은 삶을 안타까워하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구효서의 새로운 장편 <동주>는, 제목만으로도 읽고 싶다는 강한 열망이 들었다. 그는 얼마 전 <랩소디 인 베를린>에서도 디아스포라에 대해 다루었었는데, 이번 소설 역시 디아스포라적인 내용으로 시작된다. 주인공 '나'는 재일교포 3세로,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은 어릴 때 들어 알고 있지만 그것은 그의 삶에 그다지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친구의 갑작스러운 실종으로 인하여 그를 찾기 위한 단서로써, 윤동주의 유고를 찾는 일을 시작하게 된다. 또한 화자의 이야기와 교차되는 또 하나의 이야기는, 윤동주에 대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던 교토의 15살 소녀 요코의 이야기다. 윤동주가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마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시샤 대학을 다니던 시절 그가 하숙하던 집에서 심부름꾼으로 있었던 요코는 윤동주와 종종 말을 주고받고, 그가 연행되는 것을 봤으며 나중에 그에 대해 기록하게 된다. 시대는 다르지만 이 둘이 각각 남긴 글에서 윤동주는 그저 후경(後景)으로 등장할 뿐, 전면에도 화자로도 등장하지 않는다.  

이 책의 가장 첫 부분은, 요코가 남긴 기록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녀는 친부모가 누군지도 알지 못한 채 나가사키의 어떤 가정에서 자랐는데, 양부의 상습적인 성적 학대로 인해 집을 나온 그녀는 우여곡절 끝에 교토의 대규모 아파트(지금의 아파트같은 개념이 아니라, 일종의 하숙집의 개념에 더 가깝다)에서 사동(使童)으로 있게 된다. 그리고 그 집의 수많은 학생들 중 왠지 눈에 띄는, 조용하고 말이 없던 동주와 만나게 된다. 그때 동주는 스물여섯 살이었다. 그는 밤늦도록 혼자 묵묵히 책을 읽었고, 뭔가를 열심히 썼다. 읽을 줄은 몰랐지만 그의 글자 모양에서는 한숨과 격정, 망설임과 회한이 느껴졌다고 요코의 수기에는 기록되어 있다. 고향에 두고 온 여동생이 생각나서, 동주는 요코와 곧잘 대화를 주고받았다. 이 책을 읽으며 내게 가장 강한 인상이 남았던 부분은, 일본어와 조선어, 그리고 시에 대한 이야기를 둘이 주고받다가 동주가 괴로워하는 장면이다. '요코, 집 안으로……. 그가 간신히 신음을 흘렸다. 들어가. 날……혼자……내버려둬. 필사적으로 내뱉었다. 제발……. (중략) 그는 후박나무에 기대어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어두웠지만 그의 창백한 낯빛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어느새 바람이 다 빠져나간 그의 몸은 길고 가늘고 초췌했다. 세상에 그렇게 안쓰러운 사람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p.90~91 중 발췌)' 조선어와 일본어, 영어, 만주어 등이 그의 안에서 충돌하고 있었고, 조선인이면서도 마음놓고 조선어로 시를 쓸 수 없었던 그의 극심한 괴로움을 너무도 제대로 표현한 부분이다.  

또한 주인공 '나'는, 여름방학 동안 절친한 친구 시게하루가 함께 하자고 제안한 기묘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다. 그것은 'U'라는 정체불명의 인물로부터 지시를 받아, '만주'라는 검색어를 검색하고 그것을 요약하여 그에게 메일로 보내주는 것인데 그 작업에 어떠한 의미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당이 많았기 때문에 그는 매일같이 도서관에 나가 도서 목록 등을 검색하고 만주에 대한 책을 읽는다. 그러던 어느 날, 시게하루가 돌연 사라지고 '나'는 시게하루의 행방을 찾기 시작한다. 도서관의 미등록 도서 <昨日の満洲を話す(어제의 만주를 말하다)>, 방향이 바뀐 전봇대 표지판, 약도, 미즈하라 노파의 집, 그리고 윤동주의 유고 뭉치. 사라진 윤동주의 유고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자료 인멸 세력의 존재들 때문이라는, 그 유고를 찾아야 시게하루의 행방도 알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 그는 그 단서들을 추적해 나간다. 그러다가 그는 홋카이도 북단까지 찾아가게 되고, 거기서 갈대 바구니에 담긴 이타츠 푸리 카(아이누어로 '언어의 비단'이라는 뜻), 곧 요코의 기록과 조우한다.  

한편 윤동주에 대한 요코의 이야기는 이어진다. 좀처럼 싸움 같은 것을 하지 않는 온화한 동주가, 어느 날 같은 아파트의 야마다라는 일본인 학생과 싸우는 것을 그녀는 본다. 야마다의 아끼는 구두를, 동주가 종종 만나는 다리 밑 늙은 걸인인 일명 교진(橋人)에게 가져다 주었다는 오해에서 비롯된 싸움은 아이누인과 조선인, 만주인 등에 대한 일본의 동화정책과 언어 강압책에 대한 동주의 비판으로 이어진다. 사실 교진에게 야마다의 구두를 갖다 준 것은 요코의 짓이었고, 요코는 교진과 종종 만나 먹을 것을 갖다주거나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교진은 자신에게 탄생과 성장, 유랑의 삶을 되짚어보게 한 은인이었다고 요코는 회상한다. 유달리 하얀 피부의 요코가 아이누인이라는 것을, 그녀도 동주처럼 '말과 말의 영토를 앗긴 자'라는 것을, 그렇기에 동주가 요코에게 많은 이야기를 해준 것을 교진은 알아본 것이다.  

그리고 어느 날부터인가 요코에게 접근하여 좋아하는 빙수를 사 주면서 아파트의 조선 학생들의 동태를 물었던 사람이 있었는데, 요코는 그가 특고 형사인줄도 모르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빙수를 얻어 먹는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아파트에 경찰들이 들이닥쳐 동주와 그의 고종사촌 송몽규를 연행해 간다. 그것이 그를 본 요코의 마지막 기억이다. 그녀는 동주가 잡혀간 것에 일말의 책임을 느끼고, 지극한 후회로써 동주를 기억하며 자신의 고향에 도달하기 위해 아이누어를 공부했다. 동주의 유고는 원본이 아닌 일본어 번역본이고, 특고의 강압에 못 이겨 스스로 번역한 그의 시는 동주의 시가 아니고 그의 시여서도 안 되었다고, 요코는 말한다. '말을 앗긴 것도 모자라 자신의 시를 자신의 손으로 훼손했어야만 하는 치욕과 능멸을 어찌 외마디 비명으로 다 감당할 수 있었겠는가. 시인 윤동주는 이미 시모가모 경찰서에서 죽은 거였다. 그리하여 시인 윤동주의 존재란 그의 시가 조선어였을 때까지만 온전하다는 주장을, 나는 감히 내세우려는 것이다. 검사국과 재판소와 형무소로 이동해 죽어간 건 그의 빈 육신이었다.(p.318 중 발췌)'  

윤동주의 사인은,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조선인 재소자들에게 자행했던 모종의 생체실험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시인' 윤동주의 죽음은, 그가 시모가모 경찰서로 연행되어 조선어로 쓴 그의 시들을 일본어로 번역하도록 강요당했을 때라고 작가는 요코의 기록을 통해 말한다. 나는 크나큰 부끄러움을 느꼈다. 알량한 일본어 실력으로, 윤동주의 <서시>를 일본어로 번역했던 것이 얼마 전 일이다. 조선 시인으로써 조선어로 시를 쓰려 했던, 모든 국가 모든 민족 모든 언어가 한 점 부끄러움 없이 만화(萬花)의 숲을 이루기를 염원했던 그를, 나는 또다시 죽인 것이 아닐까. 내게 있어서 한국어는, 일본어는, 그 외의 언어들은 과연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일까. 많은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요코의 기록을 읽은 '나'는, 자신이 일본과 한국 사이에 끼어 있었음을, 모어(일본어)와 모국어(한국어) 사이에 놓여 있었음을 느끼고 한국 이름을 짓고 한국어를 배워 글을 쓴다. 동주의 간도, 요코의 홋카이도, 그리고 '나'의 한국은 일종의 '사이의 섬', 곧 감정적인 충격과 분노와 실망이 완충되는 장소인 것이다. 이 책 끝부분에 실린, 전 세계에서 2500개의 언어가 소멸 위기에 놓여 있고 그 중 일본에서 아이누어를 할 줄 아는 화자가 15명으로 추산된다는 기사는, 다시 한번 나를 안타깝게 한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던 시인 윤동주의 고뇌와 괴로움을, 그리고 이 세상의 수많은 국외자(局外者)와 디아스포라들의 슬픔을, 이 책을 읽으며 가슴 깊이 느끼게 되었다. 더욱이 그 윤동주의 <서시>를, 이부키 고(伊吹郷)가 일본어로 옮기면서 시의 원뜻을 어쩌면 고의로 훼손시킨 것에 대해 일종의 분노를 느끼게 되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 윤동주의 <서시> 전문 

이 중,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는 당시 윤동주가 처해 있던 시대적 상황으로 볼 때 이 모든 것을 죽음으로 내모는 자들에 대해 증오심을 가지고 있었을 것인데, 이부키의 번역에서는 '行きとして行けるものをいとおしまねば(모든 살아 있는 것들을 사랑해야지)'로 뉘앙스도 뜻도 전혀 달라지게 된다. 게다가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이라는 표현은 '팔백만의 신'에 대한 믿음을 설파하는 일본 고유의 신도적 세계관으로 통하는 것으로, 윤동주의 기독교적 정신세계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재일조선인 서경식 교수의 책에서 읽은 적이 있다. 이래서야, 윤동주가 무덤 속에서 벌떡 일어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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